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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책
니나 게오르게 지음, 김인순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9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3p.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초록색이다. 진한 초록색 목소리. 오래되고 지혜로운 숲처럼 크고 조용하다.
이 책의 메인 플롯보다 이 책 전체를 끌고 가는 목소리 "나"의 생각과 감정의 궤적이 마음에 든다. 나는 어떤 색일까? 아마 김진명 소설 "직지"의 주인공이 이런 컬러로 세상을 보는 식의 캐릭터였던 것 같다. 우리는 그냥 문자의 홍수 속에 살고 있지만 이런 이미지로 세상을 보는 참신함은 늘 반갑다. 나는 어떤 색으로 묘사할 수 있을까? 초록색이고 싶다.
"32p. 아빠는 나한테 오늘 길이었다. 나한테 올 수 있었는데. 나한테 올 수 있었는데!"
생각을 해 보니 21년 전 어느 겨울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가고 있다. 아버지는 항상 나에게 오셨다. 우리의 삶이 늘 이런 식이다. 아버지에게 가던 첫 날이었는데 아버지는 살아계시지 않았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영안실에서 차디찬 모습으로 바뀐 시신을 확인하는 서류에 사인한 것이 전부였다.
"98p. 코마도 삶이야. 다만 독특한 방식의 삶일 뿐이지."
"99p. 코마는 아직까지 별로 연구되지 않은 현상에 속해요. 우리는 코마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고, 구체적인 원인이나 과정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 주는 것 없는 통계에 의존하고 있어요"
코마는 혼수상태로 표현되기도 하고 식물인간이라도 불리기도 하는데 깨어나는 뉴스가 들리면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안락사 시켜도 되는가 코마 상태에서도 뇌는 정상적으로 작동한다고 하는데...슈마허는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다.
"123p. 지금 아빠의 얼굴은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는 땅 같다. 지금 아빠의 주름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더 이상 웃지 않고 더 이상 고통에 시달리지 않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코마도 이런 측면에서는 사망선고에 다름이 아닐까? 내 아버지는 죽음의 순간에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가장의 짐을 내려놓게 되어서 이제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하셨으면 좋았을 것 같다. 평생 노동자로서 근면성실하면서 가정적이고 다정다감한 가장의 모범 이미지를 각인시켜 주셨다. 우리 조선땅의 아버지들은 대개 그렇게 사셨다. 이제라도 저 세상이 있다면 거기서 아버지의 혼이 해탈하셨음 좋다고 생각한다.
126p. 아버지는 말했다 우연들은 끝에 이르러야 비로소 그 의미가 드러나는 놀라운 사건들이란다. 그것들은 네게 삶을 변화시킬 것을 제안한단다. 너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어.
아 모르겠다. 우연하게 우리는 지금 여기에 온 건가?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 북한 핵 개발, 이명박의 온갖 비리, 박근혜의 집권과 최순실, 촛불시민혁명, 문재인 대통령, 트럼프 당선, 그리고 기레기언론의 민낯, 조국수호에서 검찰개혁까지... 그 끝에 만나게 될 놀라운 사건이 무엇일까? 통일조국일까? 지구 최강국일까?
132p. 사람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은 없어. 네 아빠가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그 순간 세상엔 그 사람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없게 돼.
일생에 한 번 기자가 될 뻔 한 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이렇게 잘 들어줄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 당시 나는 비겁하게 도망쳤다. 지금 후회한다. 후회를 줄이는 인생을 살아야는데 나는 자꾸 내 얘기를 하고 싶다.
아마 또 후회할 것이다. 입을 닫고 고전에 눈을 열고 귀를 열자 지혜의 숲을 더 푸른 빛깔로 물들이자.
145p. 세상을 작게 만들어라. 정확히 보아라. 네 앞에 놓인 기나긴 밤이 아니랄 바로 앞의 순간만 생각해 라.
단순하게 볼 수만 있으면 인생에는 답이 있다. 내가 하려던 얘기도 이렇게 단순하게 할 수 있어야한다.
난 대학교수들처럼 어렵게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도올 선생님이 참 쉽게 얘기한다. 쉽게 얘기하려면 공부를 더 빡세게 해야 하고 훨씬 더 어려운 길로 나를 몰아가야 한다.
178p. 아직은 아냐! 제발, 아직은 아니라고!
답을 찾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을 거라고.
살아가면서 아버지와 함께 하고픈 그러나 그 때 미쳐할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산다.
지난 촛불시위 현장에서 아버지와 같이 노무현 대통령을 추억하고 싶었고
다산초당가는 길을 밟으며 다산의 유배지의 삶을 들려주고 싶었고
한라산이 겨울에 어떤 모습인지 같이 등산하면서 감동하고 싶었고
해운대 파크 하얏트에서 광안대교를 바라보며 와인을 마시고 싶었고
이제는 한동안 안 가겠지만 교토에서 의상과 원효가 그려진 그림을 같이 감상하고 싶었고
카잘스 콰르텟 공연을 보면서 현악 4중주의 아름다움을 알려드리고 싶었고
군산에서 먹는 짬뽕의 남다른 풍미를 같이 만끽하고 싶었고
국립부여박물관에서 금동대향로에 비쳐지는 백제문명의 경이로움에 같이 감탄하고 싶었고
정동진의 선크루즈에서 보는 일출을 보며 한 해를 함께 계획하고도 싶었다...
그리고 이 땅에 자민당 2중대 혹은 친일독재부역세력이 쫄딱 망하는 꼴을
아버지와 같이 보고 싶다.
아마 이 리스트는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