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또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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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 지식과 교양을 디스플레이하다
고전연구회 사암 엮음 / 포럼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꿈꾸어오던 나의 서재의 모습은 좋은 원목가구로 잘 짜여진 틀에 크기맞춰 줄지어 꼽아놓은 책장.
남들이 봐도 그럴싸해 보이는 그런곳을 꿈꾸어 오곤 했었다.
그렇게 된다하여 독서(讀書)와 간서(看書)의 수준과 질이 높아지는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외면보다는 내면에 충실하자, 충실하자'라고 외치던 나의 모습과 이 얼마나 상반되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가.
책이 가지고 있는 내면보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모습들만을 따지고 있었다니 참으로 어리석지 않을 수 없다.
# 현시대에도 있었으면 좋을법한 독서당.
조선시대에는 독서당이란 곳이 존재했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이 처음 사가독서제를 시행하여 시작한것이 세조 때 단종을 폐위시키고 임금이 되는 과정에서 집현전을 없애면서 사가독서제 폐지하여 사라졌다가 성종때 비로소 독서당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P92)
큰 인재들에게 독서휴가를 보내주는 것인데, 독서당에 들어가기 위해서 따로 시험을 치렀을 정도라고 하니 왠만한 인재가 아닌 이상에야 갈 수도 없는 곳이였으리라.
오로지 책을 볼 수 있는 공간과 환경을 만들어주어 온힘을 그곳에만 쏟을 수 있게 했다는 것이 참으로 매력적인 일이 아닐수가 없다.
안타까운건 지금까지 그 맥락이 이어져 내려왔다면 세계에 이름을 떨칠 큰 인재가 나왔을텐데 그것을 이어가지못하고 끝내 사라져버린게 아쉬울 뿐이다.
"점잖으신 군자여, 어찌 인재를 일으켜 세우지 않으리오." (P91)
젊으신 대통령님이여, 어찌 인재를 일으켜 세우지 않으리오. 해외로만 나가는 인재를 붙잡으시오.
방법을 모르신다면, 책을 펴시오.
# 소귀에 경읽이 였던 학창시절 나의 공부습관
자랑처럼 떠들어 다니며 지니고 다니던 습관이 하나 있었다.
'나는 공부하고 몇일 지나면 다 까먹어. 머리가 나쁜가봐' 라며 부끄럽지도 않은지 참새처럼 짹짹 잘도 종알거리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행동이라는 것을 말이다.
백곡 김득신님의 서재 "억만재(億萬齋)"를 보며 깨달았다.
김득신은 어렸을적 남들에 비해 현저히 학습능력이 뒤떨어져 있었는데 아버지인 김치만은 나중에 크게 대성할거라 굳게 믿어주었다고 한다.
그 믿음의 결과로 59세때 과거에 급제하는 반열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았는지는 생각만 해서는 잘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무려 '백이전'이란 한권의 책을 1억 1만 3천번을 볼정도로 읽고 읽고 또 읽었던 노력이 그 뒤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고작 난 시험을 치르기위해 한두번 공부한것이 다였으면서도 머리에 남지 않는다 불평만 할 뿐 어떠한 노력조차 하지 않으려 했던것이다.
공부뿐만이 아니라 책을 읽을때에도 한번 읽고, 그것두 집중하여 읽는거도 아니고 짬짬이 시가내어 쪼개 읽기형식으로 읽어놓고서는 훗날 그 안에서 무엇을 이야기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며 투덜되었던 것 또한 부끄럽기 그지없다.
후투루보지 말았어야 할 독서를 내멋대로 정의내리고 행동하였던 것이다.
'억만재'를 읽으면서 무엇보다 가장 크게 가슴에 남아있던것은 부족한 자식에게 끝까지 믿음을 안고 끌어안았다는 김치만선생님의 가르침이였다.
육아에 관심이 많고 공부를 하고 있다고는 하여도 훗날 내아이가 김득신선생님과 같다면 그의 아버지처럼 행할 수 있을까?
: 한번읽고 책장에 꼽아두기에는 너무 아까운 책이다.
수시로 독서가 안될때, 인생길을 걸으면서 막히는 부분이 있을때, 조상님들의 지혜를 배우고자 할때마다 옆에두어 두고두고 봐야할 책인것 같다.
이렇게 좋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니, 이건 꿈과도 같은 일이다.
어디 로또 맞은것이 이보다 더 좋을소냐? (^^; 로또가 당첨되면 당연히 좋긴 좋겠지만, 그 안에서는 인생의 의미를 찾을수가 없으므로)
입가에 웃음지으며 오늘은 그만 책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