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영천은 지리적으로 대구와 가까웠으므로대구의 항쟁이 급속도로 전파되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사회·경제적 불안정성도 항쟁의 발생과 강도에 영향을 미쳤다.
영천은 1944~1946년 사이 인구 증가율이
26퍼센트에 달할 정도로 해방직후
귀환동포가 많이 유입되었으며,
이로 인해 사회·경제적 불안정성이 커졌다.
식량 문제가 심각했는데도, 미 군정청의
‘공출‘ (하곡 수집)이 가혹하여
행정당국과 농민 간의 갈등도 심했다.
1946년 2월에는 군수 이태수가 직접
나서서 미곡수집령을 위반할 경우
엄벌에 처하겠다고 주민들을 위협했고,
군 식량계원은 농민들이 하곡 공출에
응하지 않는다며 서로 뺨을 때리게 하고,
보리를 운반하는 차에 태워 유치장에 가둔 뒤
유치장행 운임 10원과 유치장 숙박료 90원을
받는 일도 있었다. - P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