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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일기
정정화 지음 / 학민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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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강일기󰡕가 대학교 도서관에 있는지 검색했다. 중앙도서관 공개 서가에 없고 제2 도서관에 있다. 사서가 어떤 창고 같은 데에서 꺼내어 책을 건넸다. 누구도 펼친 적이 없어 보일 정도로 무척 깨끗했다. 201881515쇄본이다. 1998815일에 11쇄가 나온 후 20년 동안 5쇄를 찍었다. ‘차례부터 펼쳤다. 열여덟 꼭지 중에 열여섯 번째 북에서 온 사람부터 읽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았다는 글쓴이가 해방 후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제일 먼저 알고 싶었다. 한국전쟁 발발 전에 치러진 2대 국회의원 선거, 북한 인민군의 서울 점령, 이승만 정부의 국민을 향한 거짓말, 남편의 납북, 북한 기관원인 김흥곤과의 만남, 이를 빌미로 체포되어 감옥 생활을 한 경험, 5·16 직후 아들이 스스로 거절한 정계 진출 기회 등 23쪽에 걸친 두 개 꼭지의 이야기가 담백하고 간결하게 서술되어 있다. 마지막 열여덟 번째 꼭지는 제목이 새벽에 꾸리는 이삿짐이다. ‘내 나이 벌써 여든 일곱인데라는 문구를 보니 글을 쓴 시점이 1986년인가 보다. 셋방살이를 청산하는 이삿짐을 싸면서 아범을 효자라고 칭찬하고 어멈의 수고스러움에도 마음을 준다. ‘조국의 타오르는 아침을 맞게 될 그들에게로 끝맺음할 때만 해도 내 마음은 덤덤했다.

  ‘책을 내면서의 제목인 못난 줄 알건만 털어 놓고 하는 말을 보자마자 숨을 가다듬었다. ‘욕심이 없되 허망하지 않고, 뜻이 있되 결코 나대지 않는 자연의 모습이 진정한 영웅과 참된 열사의 길이라고 적은 문구가 크게 다가왔다. 저자 자신은 그런 모습과 거리가 멀단다. “여든여덟의 나이되도록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를 읽고는 가슴이 먹먹해지고 뜨거워졌다. 시아버지와 남편 봉양으로 시작한 글쓴이 정정화의 독립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비 조달과 유지, 정부 요인 뒷바라지 등으로 이어졌다. 험난하고 혹독했을 그 과정과 해방 이후의 삶을 앞으로 읽어 나가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플지 내 몸이 미리 반응하기 시작했다.

  󰡔장강일기󰡕는 큰 고생을 했던 저자에게는 죄송하지만, 무척 재미있다. 열한 살에 결혼한 정정화는 그 시절 남편을 서로 입술을 버끔거리고 혓바닥 놀림을 해대는 소꿉동무라고 했다. ‘스무 살’, 글자만으로도 설레는 그 나이에 상해로 길을 떠나는 정정화를 상상했다. 흑백사진으로 보는 인물과 배경, 단동의 옛 지명인 안동이란 단어가 지닌 의미, 이곳에서 임정의 연락 업무를 담당한 우강 최석순, 신의주의 비밀 연락소인 세창양복점 주인 이세창 등과 같은 새로운 지식과 사실에 눈이 반짝였다. 194511월 임정 요인이 귀국할 때 호치민이 환송연을 베풀었다는 이야기, 학도병 박재희를 괴롭힌 일본군이 악양에서 패잔병이 되어 굽실댔다는 장면은 흥미로웠다. 정정화의 시아버지인 김가진의 도움을 받았던 이승만과의 결별과 그로 인해 김가진 사택이었던 백운장을 되찾지 못한 일, 애초에 남한 단독선거일이 59일이었는데 개기일식이 예정되어 있어서 불길하다 하여 510일로 연기된 일, 오늘날 감사원이라고 할 수 있는 감찰위원회의 감찰위원직 제안을 글쓴이가 거절한 일 등은 󰡔장강일기󰡕에서 처음 알았다. 그러나 중일전쟁 중에 강물 위에 뜬 망명정부였던 목선에 백 명이 넘는 사람이 5,000km 피난길을 가는 장면 같은 숨어 산 20년이자 쫓겨 다닌 20재미를 곧 아픔으로 이어지게 했다.

  임시정부가 통일정부로 개편하고 일제에 선전포고를 하고 공격을 준비할 때 맞이한 1945815, ‘왜놈이 항복했다라는 말은 정정화에게 우리가 이겼다, 나라를 찾았다라는 말이어야 했다. 그는 조국의 광복이 와락 품안에 안긴 것에 당황했던 것 같다. 그러나 독립은 쟁취된 것과 다를 바 없다.”라고 주장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나대지 않는자연을 닮은 그로서는 차마 못할 말이었겠다. 그러나 우리의 독립은 겉보기에는 주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손으로 찾은 것과 같다. 중경, 연안 그리고 하와이 등 세계 곳곳에서 독립을 위한 항일 투쟁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타오를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장강일기󰡕이다. 우리 독립투사들의 노력으로 우리의 독립은 쟁취한 것이었음을 이 책을 읽고 많은 사람이 다시 한 번 더 확인하기를 바란다. 10쇄 이상 발행되어 널리 읽히고 기억되어야 할 독립운동가 정정화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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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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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는 크게, 조선 황제는 작게 나타내라.” 순종의 서북순행길에 동행한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개성 만월대 폐허에서 사진사에게 지시한 촬영 구도라고 소설 󰡔하얼빈󰡕에서 김훈은 적었다. 그 사진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 <서북순행 사진첩> 안에 있다. 202373일자 경향신문 김창길 기자가 김창길의 사진 공책이란 칼럼에 누구의 렌즈로 보느냐에 따라 권력자의 모습은 달라진다라는 주제로 쓴 글을 읽고 알았다. 신문의 해당 지면을 펼치자마자 눈에 들어온 그 사진을 보고, 혹시 소설 󰡔하얼빈󰡕에서 읽은 그 사진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맞았다. 사진을 오려서 모니터 바로 뒤에 있는 책받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토는 조선이 그 폐허와 같아 보였겠다. 그 위에 자신이 꿈꾼 대일본제국의 식민지 조선을 그렸겠지.

안중근은 󰡔백범일지󰡕에서 동학 농민군 토벌에 나선 인물로 나온다. 조선 독립운동의 으뜸이자 평화주의자인 안중근이 봉건제 혁파와 민중해방의 기치를 올리고 일어선 동학군을 잡는 데 나선 사실의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줄곧 궁금했었다. 김훈의 상상력이 그 진실에 닿기에는 부족했는지 아니면 의미 없는 사실이라 생각했는지, 동학군을 향해 안중근이 총을 겨눈 이유를 󰡔하얼빈󰡕에서는 읽을 수 없다. 조선 왕조에 반기를 든 역적의 무리에 안중근은 유학자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나는 추측하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조선의 유생이 결사반대했고 동학의 반대편에 있었던 서학인 천주교의 신자가 되었을까. 이에 대한 답이 󰡔하얼빈󰡕에 있을 것 같았는데, 이 또한 나는 찾지 못했다. 그 답에 견줄만한 실마리를 아쉽게도 발견하지 못했다. 안중근의 의거를 살펴보는 데 김훈에게는 그것의 무게가 그리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천주교의 평화정신이 그 답일지 모르겠다.

안중근의 사형 선고 소식에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는 황사영을 떠올렸다고 김훈은 소설에 썼다. 황사영은 김훈의 소설 󰡔흑산󰡕에 나오는 인물로, 신유박해 직후 붙잡혀 거열형으로 죽은 천주교 순교자로, 나는 그 소설에서 그를 처음 알았다. 조선 정부가 겨눈 칼끝이 황사영의 턱밑까지 왔을 무렵, 숨어 지내던 옹기 가마 안에서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그는 편지 한 통을 쓴다.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서양의 군대를 요청하고 있는 그 서신의 내용을 나는 󰡔흑산󰡕에서 처음 알았다. 황사영을 알기 전에 현기영의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와 이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이재수의 난󰡕에서 천주교 신부와 신자는 박해받는 이가 아니고 지배자이고 가해자였다는 점을 알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여운 탓인지, 󰡔흑산󰡕의 황사영은 내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종교와 신앙이 맹신과 광신에 의한 폭력으로 검게 색칠해지는 느낌이었다.

김훈은 스물일곱 살에 죽은 황사영의 그 편지글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있는 뮈텔 주교의 마음을 󰡔하얼빈󰡕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뮈텔은) (황사영) 천둥벌거숭이의 몽매함에 한숨 쉬었고 순수한 신앙의 열정에 목이 메었다. 황사영은 국가를 제거하려다가 죽임을 당했고 안중근은 국가를 회복하려고 남을 죽이고 저도 죽게 되었는데, 뮈텔은 이 젊은이들의 운명을 가로막고 있는 국가를 가엾이 여겼다.” 뮈텔은 자기에게는 조선도 일본도 없다 말한다. 그러나 그는 신앙과 문명을 군함에 실어서 세계에 전하는 조국 프랑스와 프랑스 왕, 군대, 교회에 감사했다.

김훈의 소설 󰡔현의 노래󰡕에서 우륵은 가야 왕조를 버리고 신라에 들어간다. 칼 대신 선택한 현으로 우륵이 이루고자 한 바가 무엇이었을까.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과 󰡔남한산성󰡕에서 최명길과 김상현은 각각 왜와 청의 침략에 무너질 것 같은 조선 왕조를 지키려 했던 사람이다. 가야, 조선을 훑은 김훈은 나라를 가운데에 두고 삶과 죽음이 오간 태초의 시대를 소설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을 통해 상상했다. 인간이 말 등에 처음 올라탄 역사 이전의 시대에 초()와 단() 두 나라는 전쟁을 벌인다. 등장인물은 모두 바람 앞에 있는 등불처럼 언제 꺼질지 모를 나라(국가)에서 살았다.

이토가 추구한 타국 정복과 제국 건설에 의한 평화, 이에 맞서 안중근이 지향한 자주독립국과 평화, 그리고 현재에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평화를 목표로 한 폭력(전쟁) 등은 인간과 인간 삶의 모순이 국가를 가운데에 두고 얼마나 적나라하게 펼쳐지는지를 보여준다. 김훈은 안중근의 대의보다는 그의 가난, 청춘, 살아 있는 몸을 소설로 보여주려고 했다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동양 평화라는 이토 암살에 담았던 큰 뜻이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 의병 활동 중에 산 속에서 붙잡은 일본군 포로들을 살려준 안중근의 판단은 결과적으로평화주의자의 순진성을 그대로 노출한 것이다. 안중근의 의거 목적이 개인적 차원에서는 그 판단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안중근은 한국독립 전쟁의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이토를 죽였으니 전쟁포로라고 재판정에서 주장했다. 개인 자격이 아닌 국가를 대신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국가의 대표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뜻이다. 어느 쪽이든 낮고 작게 평가할 수 없다.

소설 󰡔하얼빈󰡕에 따르면, 이토는 조선 사대부의 자결이 아닌 무지렁이 백성의 저항에 경악했다. ‘썩은 왕조의 탐학으로 껍질만 남은 조선왕조를 조선의 민중이 치열하게 옹위하는 사태를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경악이해의 어려움은 이토의 생각을 빌린 김훈의 마음일 것 같다. 김훈은 묻는다. 도대체 민중에게 국가란 뭐냐? 자기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주체는 일부 권력자이고, 국가란 수호신과 같은 존재로 여겼다는 것인지. 어떤 이는 국가를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총자본이자 지배계급의 지배 도구로 간주한다. 그런데 적어도 조선의 백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현대 사회에서 애국심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 또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다. 김훈은 감옥에 있는 안중근의 고해성사를 집전한 빌렘 신부의 입을 빌려 교회 밖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는지 묻는다. 안중근에게 국가(조선)교회 밖에 있는 하느님의 나라이었을까.

소설 󰡔하얼빈󰡕은 내게 안중근의 삶과 의거보다 안중근에게 국가란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으로 남는다. 작가 김훈에게 국가란 무엇인지, 김훈은 국가를 무엇이라 생각하고 있는지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묻고 있었다. 물론 김훈은 어떤 소설에서도 작중 인물의 말이나 화자를 통해 국가란 무엇인지에 관해 쓴 적은 없다. 󰡔하얼빈󰡕에서 뮈텔을 통해 국가를 가엾다고 적었다고 썼을 뿐이다. 가여운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놓는 사람의 생사와 그 마음이 김훈에게는 가엾게 여겨졌는지도 모른다. 김훈의 물음은 이제 끝인가. 감히 예측해 본다면, 김훈의 다음 물음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향할 것 같다. 우연이지만, 흥미로우면서 섬뜩한 사실이 있다.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지 딱 70년이 되던 날에 박정희 또한 총탄에 숨을 거뒀다.

독후감 쓰기를 거의 마무리하던 무렵, 어떤 역사학자가 올해 초에 발표한 두 편의 논문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의 편지전언, 조작과 실체”, “안중근·우덕순의 정체성과 김훈의하얼빈』-포수’ ‘무직’ ‘담배팔이의병’ ‘대한국인이 그것이다. “전라도 천년사를 둘러싼 논쟁을 비판하면서 역사적 사실에 주목하자는 어떤 역사학자가 쓴 신문 칼럼에 소개된 논문이다. 소설 중에서 역사 소설만큼 쓰기 어려운 소설이 있을까 싶다. 한편에는 사실과 진실이, 다른 한편에는 상상력에 의한 허구가 혀를 날름대는 가운데 외줄을 타는 소설가는 진땀을 흘릴 만하다. 202211월에 한 편의 영화가 개봉했다. 조선의 왕 인조가 자신과 정치적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에서 아들을 죽였다는 이야기다. 역사적 상상이 어디에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독자가 주목하는 것은 작가가 그렇게 외줄을 타고 건넌 지점에 무엇이 있느냐이다. 외줄을 타는 작가는 시선을 저 앞 외줄이 묶여 있는 기둥에 둔 채로 곁눈질로 좌우를 살피며 건널 테다. 김훈은 소설하얼빈으로 어딘가를,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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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독립운동 열전 1~2 - 전2권 독립운동 열전
임경석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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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서술만큼 품이 많이 드는 일이 또 있을까싶다. 저자의 노고가 면면마다 줄줄 흘러넘친다. 1900년 전후의 한글을 독해하는 일은 거의 외국어 번역 수준일 텐데, 󰡔독립운동 열전󰡕 1, 2권에는 그 시절 사료가 즐비하다.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역사학자의 눈과 손을 거친 영어, 일본어, 러시아어에 북경어와 광둥어로 된 자료의 흔적이 생생하다.

  한국의 독립운동 역사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잊힌 사건과 잊힌 인물을 각각 400여 쪽씩 되는 낱권에 넣었다. 두 권의 책은 씨줄과 날줄처럼 서로 얽힌다. 사건 들 간, 인물 들 간 서술이 독립운동, 해방운동, 혁명운동의 베로 짜인다. 한국의 독립운동에서 잊힌 한국사회주의 운동사를 하나의 실에 꿸 수도 있다.

  서술이 독특하다. 시사 잡지 기고문을 모은 책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독자의 궁금증을 자극하면서 흥미와 긴장감을 높여준다. ‘놀랍다.’,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를 풀어야 한다.’라는 문장은 역사책에서 처음 접한다. 15만원 사건을 소개하면서 한 꼭지 글의 마지막을 기선에 탑승한 네 청년은 안도감을 느꼈다. 무모하고 불가능해 보였던 계획이 성공한 것만 같았다.”로 맺는다. 사료를 근거로 인물의 감정을 적시한다. 다음 절을 곧바로 읽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 최봉설의 회고록을 기초로 한 그의 도주 장면 서술은 당장에 액션 영화를 찍어도 될 만큼 세밀하다. 신문 기사와 자서전, 증언 등을 종합하여 독립 운동에 참여한 인물이 겪었던 체포, 심문, 고문, 수형 생활의 참혹함을 전율하며 느낄 수 있다.

  딱딱하고 건조하기보다는 부드럽고 눈물 기운이 가득 배여 있는 가슴 뭉클한 역사책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두어 문장으로 2시간짜리 영화를 만들어 내는 요즘, 이 두 권만으로도 수백 편의 영화를 찍을 수 있겠다. 1차 사료도 풍부하거니와 저자의 독창적이고 열정적인 해석과 평가도 이 책의 매력이다. 개인적 차원의 활동으로 여겨진 의열단 활동을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당과 연계해서 해석하거나 전로한족총회 내의 다수파와 소수파 간 갈등을 상해파 공산당과 이르쿠츠크 공산당 간의 분쟁의 연원으로 평가한다. 잊힌 사건과 인물을 재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의 독립운동 담론을 풍부하게 할 만한 논쟁적인 책으로서의 위상을 지닌다.

  역사적 사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역사가로서 자세가 돋보인다. 한국 독립운동에 사회주의 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세세하게 파악하고 서술한다고 해서 사회주의 자체를 옹호하거나 찬양하지는 않는다. 역사가로서 객관적 사실에 입각해 역사적 진실을 밝히려고 한다. 역사적 사실은 단순해보이지만, 진실은 그 사실의 이면과 그림자와 함께 복잡한 양상을 띤다. 레닌과 이동휘의 회담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독립운동 정파 간 대립이라는 또 다른 사실 속에서 그 진실이 드러나듯 말이다.

  운동과 투쟁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배신자, 변절자 중에서 동지의 고통과 죽음을 팔아 일신의 안위를 누린 자 다섯 명이 16장에 실명으로 나온다. 20228월에 고위 경찰 공무원의 과거 프락치 의혹을 읽는 듯하다. 한국 독립운동 역사는 현재진행형으로서의 역사의 본보기임을 이 책은 증명하고 있다. 사진으로 남은 얼굴 하나하나가 현재의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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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것 아닌 선의 -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가장 작은 방법
이소영 지음 / 어크로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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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신문에서 만나다 책을 만나 더 소중하고 반가운 오래 간직할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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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와 타협 - 임진왜란을 둘러싼 삼국의 협상 동북아역사재단 교양총서 11
김경태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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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언젠가 어떤 책에서 읽었을 법한 말이다. 나의 창작은 아닐 테다. 책 끝에 역사를 좀 더 풍부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협상의 관점에서 전쟁을 보자는 저자의 제안을 읽다가 문득 떠올랐던 문장이다. 문법에는 의미상 맞지 않지만, 역사는 반복되고, 역사적 사실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므로 과거가 현재고 미래라는 의미, 역사는 과거의 사실로 끝나지 않고 현재로 계속 이어진다는 의미에서 진행 중에 있다는 의미의 문장이다. 허세와 협상을 읽는 내내 현재의 남과 북, 그리고 미, , , 일 관계를 되새긴 과정을 압축해서 표현하기에 적절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료를 근거로 한 세밀한 교섭 과정 묘사에 놀랐다. 참고문헌을 보니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줄인 책일 수도 있다는 추측을 했다. 그렇다면 더 놀랍다. 역사서답지 않게 긴장감 있는 줄거리로 논문을 요약했기 때문이다. 관련 논문이 여섯 편에 달할 정도이고 중국과 일본의 문헌을 샅샅이 훑었음을 문헌 정보로 보니, 200쪽도 안 되는 적은 분량의 책이지만, 아주 단단한 책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허세와 협상임진왜란을 둘러싼 삼국의 협상이란 부제에도 독후감으로 공모한 도서 중에서 가장 역사서답지 않은 제목을 단 책이었다. ‘허세라는 단어에서 역사적 사실만을 나열하지 않고 서사가 있을 것 같았다. ‘타협이란 단어에서는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개인의 공허한 성공담이 아닌, 역사적인 교훈이 있겠다는 추측을 했다. 이익을 다투는 개인 간 또는 집단 간의 관계에서는 상대의 말과 행동을 치열하게 논리적으로 의심해야 한다는 교훈(의심만이 살 길이다!)을 얻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재미있게 단숨에 읽었다는 점에서, 선택을 잘 한 내게 자찬(自讚)했다.

의심이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의심이 되기 위해서는 사실 파악이 중요하다는 점을 책 곳곳에서 확인했다. 첫 장의 세 번째 문장, ‘변하지 않은 사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군사를 동원하여 아무런 잘못이 없는 이웃나라인 조선을 침략하였다.’를 읽은 직후 사실이 주는 힘을 느꼈다. 연이어 저자는 우리가 임진왜란을 이야기할 때에는 반드시 이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라고 사실을 한 번 더 강조한다. 400여 년 전 그 시기에는 시간을 1일 동안 걷거나 뛰거나 말을 타고 갈 거리를 단위로 삼아 가늠했으니, 허세가 가능한 것도 사실 파악이 늦거나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었겠다. 물론, 사실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오늘날에는 가짜 뉴스로 허세를 부리기도 한다. 그 당시에는 사실 파악 전에 사건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어떤 결정 건에 사실은 의미가 없었을 수도 있었으니 교섭 담당자는 비상한 추론 능력이 있어야 했던 것 같다.

사실의 중요성은 다음에서도 읽을 수 있었다. 전쟁이 시작된 후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은 조선 땅이 매우 넓고, 조선인과 말이 통하지 않고, 조선인은 일본인을 해적이라고 여기며 도망치거나 공격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는 조선의 보고를 명은 일본군이 평양까지 접근한 상황에서 받았다. 명은 조선이 일부러 보고를 늦춰서 조선이 일본과 합세해서 자기 나라를 치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고 한다.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는 데 17개월이 걸렸다. 그만큼 전쟁은 길어졌다. 159895일에 최종적으로 확정된 철수 명령이 101일 부산에 도착했는데, 명군의 공격이 끝난 시점이었다. 명군의 참모 임무를 띤 정응태가 조선을 모함한 것도 사실의 진위를 파악하기 어려웠기에 가능했다. 이 모두 교섭의 어려움을 짐작하게 하는 사례이다. 저자는 자신이 인식하고자 하는 모습으로만 남을 인식하고, 자신이 보고 싶은 면만을 보고자 한다는 모든 인간이 지닌 관점의 보편성을 전제하면서 사실을 강조한다. 식상한 말이지만 역사서에서 읽으니 매우 인상적이었다.

전쟁을 시작하면서 교섭이 곧바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다. 교섭은 전쟁을 끝내기 위한 비물리적인 전쟁으로 보인다. 그것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기만(속임수)과 협박, 탐색과 의심으로 가득한 또 다른 전쟁인 것 같다. 기만과 협박은 허세로 드러났고, 탐색과 의심은 교섭을 타협으로 이끌었다. 전쟁은 승리와 이익만을 기준으로 도덕을 가늠하는 극단적인 윤리적 이기주의 면모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대화와 협상은 전쟁 전부터, 전쟁 시작 직후부터 끝날 때까지 진행된다고 한다. 전쟁 중에 죽고 다치는 군인과 민간인이 누리지 못하게 된 존엄은 논의 대상이 아니다. 협상을 위해 전쟁을 하는 것인지, 전쟁을 위해 협상을 하는 것인지, 무엇이 주()이고 객()인지 전쟁은 이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전쟁의 한 면은 파괴지만, 다른 면은 생산일까. 십자군 원정이 기독교 문명의 자폐를 치유하고 이슬람으로부터 기독교 문명이 고대 그리스 문명을 접하게 된 계기라고 해서 그 전쟁의 처참함이 결코 덜해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7년 동안 진행된 전쟁이 이질적인 삼국이 교류하는 장을 열었다고 해서 그 전쟁을 칭송할 수는 없겠다. 전쟁을 협상의 관점에서 본다 해도 그럴 수 없다.

무례한 행위의 역사를 읽었다. 고노 다로 외무상은 강제 징용 배상과 관련해 한국의 주일대사와 넥타이도 매지 않은 복장으로 면담하는 자리에서 대사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자국의 입장만을 일방적으로 쏟아 냈다. 그 무례가 이 책 여기저기에서 겹쳐졌다. 전쟁 전 교토에 도착한 조선의 통신사 일행을 기약도 없이 기다리게 한 히데요시의 행위며, 3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화평 조건에 ‘~ 그에 따라서 (조선을) 용서하기로 한다.’ 라는 문구가 대표적이다. 또한 히데요시가 명의 책봉을 받은 후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사은표문에 ‘~ 조선이 일본과의 약속을 어겼으므로 공격하였고라는 부분은 아베 정부가 한국과의 무역 분쟁을 한국 정부의 약속불이행 탓으로만 돌리는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북한과 미국 간 핵무기를 둘러싼 협상에서 남한의 위치는 명나라와 일본이 조선 침략 전쟁을 두고 벌인 교섭에서 조선이 서 있던 자리와 같아 보였다.

일제 강점과 남북 분단의 전사(前史)와 징조를 보는 듯한 내용에서는 섬뜩함마저 느꼈다. 조선 침략 1년이 지나 명나라 사절이 히데요시에게 항복 문서를 받기 위해 일본 나고야에 갔을 때, 히데요시는 영토보다는 혼인을 앞세운 7개의 강화 조건을 제시한다. 이를 저자는 일본이 조선 영토를 지배할 형편이 안 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다른 나라의 영토를 점거하거나 점거할 수 있는 실력이란 군사력으로 제압한 후 백성들을 지배하고 재생산 구조를 갖추기 위한 행정 시행 능력을 뜻하는데, 일본이 그 당시에는 그런 능력을 보유하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일본이 임진년 조선 침략과 점령에 실패한 후 300년이 지나 조선을 강제로 점거한 데 성공한 이유는 그 능력을 갖췄기 때문인가?

한편, 일본은 명군에게 일격을 당하고 조선의 저항을 견디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퇴각하였으면서도 명나라에는 명의 명령에 따라 조선 영토를 돌려주고 후퇴하였을 뿐이라고 허세를 부린다. 그러면서 북쪽의 4개 도와 수도는 명에 속하고, 남쪽의 4개 도는 히데요시에게 속한다는 영토 분할을 제시한다.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힘겨루기를 하게 되면 그 틈에 놓인 반도 국가는 분단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일까? 현재의 남북 분단이 필연으로 다가온다.

히데요시는 선전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축제로 환심을 얻는 기술을 연마했다고 한다. 히틀러와 괴멜스가 히데요시를 공부했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역사는 반복되고, 과거의 어떤 지점부터 현재까지 그 모습, 그 모양대로 진행 중에 있는지 모른다. 인간이 변하지 않은 이상 역사는 이대로 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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