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만찬 - 제9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서철원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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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연이었다. 소설 최후의 만찬을 읽는 중에 낭만주의를 접한 건 지극히 우연이었다. 두 권 이상의 책을 동시에 띄엄띄엄 읽어 가는 버릇이 내게 준 선물이었다. 신문에 실린 어떤 칼럼을 읽다가 불현듯 낭만주의가 뭐지?’라는 오래된 질문이 떠올랐고, 인터넷 검색에 만족할 수 없어서 우리는 왜 지금 낭만주의를 이야기하는가라는 책을 구매했다. 소설보다 더 몰입해서 읽었다. 그제야 겨우 소설 최후의 만찬을 제대로 안을 수 있었다. 감성, 상상, 환상, 주관, 동경, 죽음 등의 단어를 열쇠말로 삼아 소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독후감 쓰기를 목표로 읽지 않았다면, 죽음을 앞둔 윤지충이 조선은 자유의 나라이오.”라고 한 말에서 자유라는 단어를 보고 나는 이딴 역사소설이 어디 있냐?”며 책을 바로 덮고 말았을 테다. ‘자유19세기 말에나 일본을 통해 조선에 들어온 개념어이기 때문이다. 기록된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역사소설은 허무맹랑한 상상에 지나지 않아, 오늘을 사는 내게 의미 없는 읽을거리일 뿐이다. 상업적 흥행과 대중성을 고려하지 않고 제작된 예술 영화는 영화관에 감금된 채 시간을 죽여가면서 끈기 있게 봐야 겨우 관람해낼 수 있는 것처럼, 이 소설도 독후감을 쓰기 위해서는 의무적으로 완독해야 한다는 점을 떠올리며 겨우겨우 읽어나갔다. 그러나 장영실이 이탈리아에 가서 다빈치를 만나고,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의 오른쪽 끝에서 두 번째 인물이 장영실일 수 있다는 김홍도의 말에 이르러서는 읽기를 단호하게 중단하고 싶었다. 문학상 수상 작품인데 뭔가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겨우 마음을 추스를 즈음에 만난 것이 낭만주의였다.

 

2.

소설 최후의 만찬1791년 끝 무렵, 전주 풍남문 밖에서 천주교 신자로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거부한 죄로 참수당한 양반 계급인 윤지충과 권상연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전주에 뿌리내리고 오래 산 사람에게는 진하게 익숙한 지명에 반가움도 잠시, 음산하고 음울한 분위기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어둡다. 이 분위기는 이야기 끝자락까지 계속된다. 에필로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망자끼리 생에서 만끽하지 못한 훈훈하고 따스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이야기 내내 나는 무거운 바위를 지고 가는듯한 느낌이랄까, 눈을 감은 것과 뜬 것이 구별되지 않은 암흑에 앉아 있는 느낌이랄까, 그 기운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최하층민인 늙은 여자 악사(여령)가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관청에서 매를 맞고 죽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야기는 그 악사의 아들인 도몽을 비롯한 여섯 명의 초라니패가 정조가 베푼 궁중 연회장에서 정조 암살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끝내 몰살당하면서 끝난다. 이 사이에 정조의 고뇌, 정약용과 도향의 연분, 장영실의 흔적을 찾고 윤지충이 지니고 있었던 그림 <최후의 만찬>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이탈리아로 간 김홍도, 정약용의 카메라 옵스큐라에 찍힌 새로운 <최후의 만찬>, 금기의 연주법인 변음등의 이야기가 있다.

역사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해야 하듯이 역사 소설도 그러해야 한다는 믿음이 강한 내 입장에서 소설의 제목이 주는 의미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역사 소설이란 사실을 기록한 역사에 상상이라는 옷을 소설가가 입힌 결과물로 알고 있는 나와 같은 독자에게 그 이 지나치게 비역사적이라면, 역사 소설은 무가치하다. 이 환상일 뿐이라면 더 읽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지금 낭만주의를 이야기하는가에서 다음 글을 접하고서야 소설 최후의 만찬이 읽히기 시작했다.

 

낭만주의의 본질은 환상에 대한 탐닉과 몰임이다. 환상은 낭만주의의 정신적 구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낭만주의 세계관과 예술의 성격을 지배한다.(30, 이하 모든 쪽수는 김진수가 쓴 우리는 왜 지금 낭만주의를 이야기하는가의 것이다.)

 

낭만주의의 구조적 원칙은 이성에 대한 환상의 우위이다.(32)

 

조선의 지배계급이 행한 천주교 박해를 소설 최후의 만찬은 매우 치밀하고 일관되게 낭만주의의 주된 요소인 상상환상을 동원해 풀어내고 있었다. 작가는 장영실이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가서 다빈치를 만나고, 그의 그림의 모델이 되고, 이런 사실을 김홍도가 직접 밀라노에 가서 확인한다는 상상을 해낸다. 장영실이 그 먼 이탈리아 밀라노까지 어떻게 갔을지, 이를 이야기로 풀어낸 작가의 상상을 나는 처음에는 경멸했다. 박해무와 만경강 기슭에서 싸우고, 초라니 패가 존현각 연회에서 정조를 시해하려는 과정에서 정약용의 카메라 옵스큐라에 들어오는 늑대 두 마리, 작가의 이런 환상에 나는 경악했다. 역사 소설임을 포기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래 romantic이라는 형용사는 유럽 중세기의 영웅적 모험 소설인 로망스나 음모와 모험에 가득 찬 파란만장한 로망스 문학의 특정한 속성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실 같지 않은, 비현실적인, 신기한, 공상적인, 감상적인, 과장된, 열정적인 것을 뜻하는 경멸적인 용어였다고 한다.(26) 이성주의자인 나의 그런 경멸은 이처럼 당연했다. 객관성을 강조한 계몽주의가 낭만주의를 저열한 것으로 비난한 이유는 주관성의 극단을 보여주는 낭만주의의 상상과 환상에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의 주관성이란 주관·객관의 이분화된 주관을 넘어서 이분화되기 전의 세계와 일체화된 주관이라 한다.(104) 이 점을 받아들인다면, 이 소설에서 펼쳐진 작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은 비난이 아닌 감탄의 대상이 된다.

낭만주의를 특징짓는 중요한 정신적 기조는 동경이다.(47) 낭만주의는 밤과 죽음을 동경하는데, 죽음은 사멸이 아니라 변신이며, 지하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자유로운 해방 과정이며, 생의 소멸이 아니라 생명의 강화 또는 갱신 과정이다.(104) 윤지충과 권상연, 정조, 정약용, 최무영, 초라니패, 도향, 이들 모두 소설 최후의 만찬에서 그들 나름의 동경이 있다. 윤지충과 권상연과 같은 천주교 사도에게 동경은 천국, 하느님, 자유일 것이고 정조와 최무영에게 동경은 그들 나름의 성리학적 세계의 절대성이다. 이러한 동경에서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에필로그에서 초라니패 여섯 명이 죽은 후 오래 전에 죽은 이들을 만나는 생생한 장면이 이승의 것인지 저승의 것인지 내가 순간 착각을 할 때 그 하나됨을 저절로 알게 되었다. 피히테에게 동경이란 순전히 욕구에 의해서, 불쾌에 의해서, 공허에 의해서만 충족을 추구하는,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충동이고, 자유란 세계의 원리이자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 목적이다.(47) 윤지충과 권상연이 사형장에서 자유를 떠올리고, 이 둘의 참수 보고를 접한 후 내내 정조를 사로잡은 공허함도 작가의 낭만주의적 기획이었다.

로맨틱이라는 용어는 18세기 서구 유럽에서는 목가적 풍경을 가리키는 원예에도 적용되어, ‘그림 같은이란 말의 대용어가 되기도 했단다.(26) 작가는 여러 이야기와 장면을 그림 그리듯 묘사한다. <목차>에 적은 작은 제목들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57편의 독립적인 시의 제목으로 봐도 무방하다. 이런 점에서도 이 소설은 시적 언어로 가득 한 낭만주의적 역사 소설이라 규정할 수 있다. 절제보다는 과하게, 생생하게 적힌 시적 표현들만 내가 적어 놓은 것만 해도 30여 가지가 넘는다. ‘핏덩이 속에 흰 사슴이 보였다’, ‘새순같은 바람’, ‘눈빛은 맑고 단단했다’, ‘목에서 나무 부러지는 소리’, ‘목에서 늙은 버드나무가 보였다’, ‘약용의 목에서 기린이 울었다’, ‘북어 쓸개 같은 망설임’, ‘바람이 노 없이 건넜다’, ‘임금의 목에서 향기를 기다리는 목마름이 들렸다. 보는 것을 듣게 하고 들을 것을 보게 하고 맡게 하는 표현에 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으니, 심사평에 언급된 원로 소설가의 시샘을 짐작할 만하다.

 

3.

상상과 환상이 몇 가지 역사적 사실과 버무려진 역사 소설에서 독자인 내가 찾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관한 관심보다 내가 이 소설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을지에 관심을 갖고 다시 들여다보기로 했다. 혼불 문학상 심사위원이 제안한 바, 이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 대신에 독자인 내가 이 소설을 읽고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로 질문을 바꿔보았다. 낭만주의 예술 작품은 오로지 스스로를 천명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64) 이 소설에서 작가는 자신이 말하려고 하는 그 무엇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저 상상력과 환상을 동원하여 실제를 창조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소설을 쓰는 작가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애써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어 보인다. 내가 던진 질문에 나는 어쩌면 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그 질문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그저 독자인 내가 이 소설에서 그 무언가를 얻으면 된다. 아니, 아무것도 얻지 않아도 된다. 어쩌면 아무것도 얻지 않아야 작가의 의도 아닌 의도에 충실한 독자가 될 것이다. 예술의 무목적성의 확대는 예술의 자율성을 확대했고, 이를 두고 낭만주의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점이 낭만주의의 혁명성(64)이라면, 작가는 소설 최후의 만찬을 통해 혁명을 이룬 셈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 소설이 역사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면서 이 소설의 혁명성을 운운하는 일은 가볍고 오만한 일이다. 내가 모든 역사소설은 접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만찬에서 예수와 정조가 대비되고, 예수와 열두 제자가 먹은 빵은 정조, 신하, 백성이 먹은 설하멱과 대비를 이룬다. 새로운 것과 옛 것, 새물결과 전통을 상징하는 이 장면은 소설 최후의 만찬이 지향하는 조화로 읽힌다. ‘조화란 대립과 대조를 전제하는 말이다. 이것 없이 조화란 있을 수 없다. 모순된 것들이 변증에 의해 합일을 이루는 과정이 조화다. 그 모순의 다른 이름은 역설이다. 선과 악, 삶과 죽음, 사랑과 복수, 성리학과 서학, 실상과 카메라 옵스큐라로 투영된 허상, 정법의 음계와 변음, 그림 <최후의 만찬>에 그려진 자들이 맞이하고 있는 죽음을 앞둔 자의 공포, 두려움과 평온함 등 이성에 의해 이분화된 것들이 실상은 그 경계가 흐린 상태에서 공존하고 있는 이 현실이 역설이요, 조화 자체이다. 작가는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 주관과 객관 사이에는 어떤 질적인 분리도 없다(34)는 낭만주의의 기본 인식을 간파하고 있었던 같다.

낭만주의 예술론에서 예술이란 절대성의 매개체로, 예술은 세계의 근원이자 궁극적인 절대성을 자아의 성찰과 환상이라는 능력에 의해 매개한다(62)고 본다. 소설 최후의 만찬에서 보여주는 서학의 절대성을 상징하는 예수와 성리학의 절대성을 상징하는 정조 간의 대립은 진정으로 절대적인 것을 지향하는 전제이다. 윤지충과 권상연을 취조한 사헌부 감찰어사 최무영은 윤지충이 지니고 있었던 그림 <최후의 만찬>에서, 가운데 앉은 자의 머리 뒤로 소실점에 이르는 곳에 인왕산이 자리 잡고 있다고 정조에게 보고한다. 이것은 다빈치의 계획이고, 장영실의 뜻을 반영한 것이라는 말에서, 작가는 장영실이 조선의 왕과 예수를 절대적인 존재로 동일시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예수의 절대성을 다빈치가 그림 <최후의 만찬>으로 표현하려고 한 것처럼, 작가는 소설 최후의 만찬으로 궁극의 절대성, 절대적인 존재인 그 무엇을 향한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 윤지충이 죽은 나이와 예수가 죽은 나이가 같다는 작가의 언급은 그 열망의 다른 표현이다.

선과 악의 애매함과 모호함을 환상과 상상을 통해 보여주면서 절대적인 것을 부정하는 듯 보이지만, 오히려 이는 작가의 절대성을 향한 강한 열망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여기서 낭만주의의 아이러니개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낭만주의에서 성찰의 매개체는 아이러니이다.(84) 작가의 상상과 환상은 허상이 아닌 실상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이분화되어 있는 것들의 경계를 허무는 작가의 시도는 애매모호함의 극치를 보여주지만, 실제로는 명료하고 분명한 현실의 실상을 보게 한다. 정약용이 카메라 옵스큐라를 통해 허상을 보면서 실상보다 더 정교한 세계를 보듯이 말이다.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고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는 일체의 이분화 가능한 것들의 상대성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작가는 아이러니하게도 절대적인 것에 대한 강한 옹호와 집착을 드러낸다. ‘절대적인 것’, ‘절대성에 대한 작가의 강한 동경을 작가는 윤지충, 권상연, 정조, 정약용, 6인의 외인, 도향 등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보이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을 말하는 이런 아이러니가 스위스 알프스의 말로야 고개를 감싸는 뱀 모양의 구름(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처럼 소설 최후의 만찬전반에 내려앉아 있다.

책을 구매하자마자 책싸개로 감싼 탓에 이 독후감 쓰기를 마무리할 무렵에야 비로소 싸개를 벗기고 뒤표지에 적힌 글을 읽었다. 소설가 한승원은 최후의 만찬은 환상적인 소설이다.’이라고 썼다. 이 문구를 읽고 나의 비평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낭만주의 예술 작품은 환상에 가득 찬, 모험적인, 신비로운 등과 같은 종류의 형용사를 동반하는 특징을 지닌다. 이 소설이야말로 그런 형용사로 꾸며지기에 충분하다. 다빈치 그림의 <최후의 만찬> 오른쪽 끝에서 두 번째 인물이 장영실이라는 설정 자체가 환상이다. 다양한 시적인 표현은 소설의 분위기를 더욱 몽환적이게 한다. 정약용과 도향이 나눈 사랑, 장영실과 김홍도의 이탈리아 여행, 초라니 일행의 왕 암살 기도 등은 모험적이다. 변음을 연주하는 도향의 가야금은 신비롭다.

 

4.

4개월 동안 내 마음 어느 한 자리에 내내 있었던 이 소설을 이제 놓는다. ‘낭만주의가 함께 해서 다행이다. 이 소설을 읽는 와중에 영화 세 편을 보았다. <사도>를 보면서 사도 세자의 아들 정조와 호위무사였던 박해무를 생각했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를 보면서 장영실이 이탈리아 밀라노에 가서 다빈치와 만나고 그와 함께 한 삶을 상상했다. 2015년에 유럽에서 제작, 개봉한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에서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에서 여섯 제자가 아름답지만 한쪽 팔이 없어 늘 외로운 여자, 성도착증 환자 등으로 교체되는데, 소설 최후의 만찬의 작가가 혹시 이 영화에서 한 조각의 상상을 가져왔을까 궁금했다. 정약용의 조카사위인 황사영이 종교적 자유를 위해 외국 군대를 요청하는 밀서 내용에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는 소설 흑산을 다시 읽었다. 작가가 밝힌 <참고문헌> 목록에 흑산은 없었다. 흑산을 하루 밤새 단숨에 읽었다면, 최후의 만찬은 한 달 가까이 한 글자씩 새기며 더디게 읽었다. 비슷한 주제를 담은 두 소설이지만, 크게 다른 소설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김진수가 쓴 149쪽짜리 문고판 우리는 왜 지금 낭만주의를 이야기하는가가 없었다면, 이 글도 없었다.

읽기는 쓰기로 마무리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새긴 읽기였다. 읽기만을 목적으로 하는 읽기는 읽는 데 그치고 만다. 그 쓰기는 자기만 홀로 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와 공유를 목표로 써야 제대로 된 읽기가 가능하다. ‘쓰기 위한 읽기는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 읽을거리를 쓴 이의 노고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서는 읽으면서, ‘읽은 후 쓰기라는 자신의 노고를 보태야 한다. 작가가 쏟은 수년의 노고에 이 독후감이 보답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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