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파란 돌봄 - 가족, 돌봄, 국가의 기원에 관한 일곱 가지 대화 이매진의 시선 13
조기현 지음 / 이매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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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돌봄은 일상을 뒤흔드는 사고가 아니라 사랑이어야 한다

15일 장인어른이 입원하셨다. 여든 살 생일을 5일 앞두고 변비로 관장을 하셨다. 이후로 배가 계속 아프셨다. , 대장 내시경을 평생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에 혹시 큰 병은 아닐지 걱정되었다. 허리가 아프셔서 제대로 걷지 못하시는 분을 모시고 대학병원 응급실에 갔다. 전공의 파업으로 3시간 이상 대기를 하다 진료를 포기하고 구도심에 있는 영상의학과 병원에 가서 CT 촬영을 했다. 쓸개 담석, 전립선 비대, 척추관 협착과 골절 등을 진단받았다. 다음날 소규모 종합병원의 내과, 비뇨기과, 신경외과 진료를 거친 후에야 복통은 관장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이었을 뿐, 허리 통증 치료가 우선임을 알았다. 통증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의원에 가서 통증 완화 주사를 맞았다. 하루가 지나도 통증은 여전했다. 결국 신경외과가 있는 집 근처 병원에 입원하셨다. 낮에는 장모님과 아내가, 저녁 식사 후부터 다음 날 아침 식사 전까지 나, 처남 둘, 조카 한 명이 번갈아 가며 병실에 머물렀다. 첫째 날 내가 당번이었다. 전립선 비대증으로 10시간 동안 1시간마다 소변을 보셨다. 나도 자다 깨다 했다. 장인어른보다 세 살이 더 많은 장모님은 쇠약해지셨다. 3 아들을 비롯해 세 자녀를 온전히 돌보는 전업 가사 노동자인 아내는 쪽잠 잘 시간도 없이 병원과 집을 번갈아 오고 갔다.

조기현의 󰡔새파란 돌봄󰡕은 장인어른 입원이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읽기 시작했다. 첫 쪽부터 기록할 내용이 많았다. 아픈 가족을 돌보며 겪은 세상과 느낀 감정, 아픈 가족을 돌보기 전에는 미처 알지 못한 세상, 돌봄을 하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감정, 평온한 일상, 흙탕물, 아빠가 아니라 내가 사고를 당한 기분, 가족과 인간의 모습은 다양한데 제도는 너무 단순해요, 가족 중심의 보호자 개념에서 환자 중심 보호자 개념으로 전환 등. 조기현의 문장은 돌봄 경험자에게 익숙하거나 두고두고 되새길, 새로운 사유를 하게 할 것들로 가득했다. 잘 읽히는 문장과 내용이지만, 노트에 적느라 독서 흐름이 끊기고는 했다.

󰡔새파란 돌봄󰡕은 재생 종이에 콩기름 잉크로 인쇄해 촉감과 시각을 편안하게 한 200여 쪽 분량의 책이다. 그러나 읽는 내내 여러 감정이 들고 나면서 책에서 손을 쉽게 떼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닥친 돌봄에 일과 삶의 균형이 깨진 30대 초반의 성희 씨 이야기에서부터 11년간 할머니를 돌보는 20대 초반의 푸른이, 엄마를 돌보는 중학생 희준이까지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내게는 그런 상황이 닥치진 않았다는 데 따른 안도감과 언제 어떻게 나와 내 자식에게 닥칠지 모를 미래의 그런 상황을 예상하면서 불안감과 두려움이 겹쳤다.

15년 전 나는 40대 초반이었다. 어느날 아버지가 복통으로 응급실을 거쳐 입원하셨다. 2년 가까이 당뇨 합병증으로 요양병원에서 내내 누워만 계시다 봄날에 돌아가셨다. 그해 가을,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셨고 수술 후 오른쪽 손과 다리가 마비되었다. 한방병원에서 입원·재활 치료를 해도 효과는 없었다. 요양병원에 계시다가 다시 뇌출혈이 일어나 100여 일간 의식불명으로 계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8개월 후 아버지와 같은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셨다. 3년여 동안 나는 불효를 저지르고 있다는 죄책감과 직장생활과 간병을 병행하는 데 따른 피로감 등으로 불편했지만, 󰡔새파란 돌봄󰡕에 나오는 여러 사람처럼 내 일상은 크게 훼손되지는 않았다. 그때 경험은 이번 장인어른을 돌보는 데 도움이 되었다. 간병 순번을 짜고, 의사와 면담한 내용을 기록해서 여러 가족과 공유하고, 내 일상을 재조직하는 일이 수월했다. 이에 비하면 장모, 아내, 처남 들은 처음 경험하는 돌봄에 감정적으로 혼란스러웠고 육체적으로도 힘들어했다. 조기현이 쓴 󰡔새파란 돌봄󰡕의 주인공 모두가 청년인 데 비해 나와 내 주변 친지들은 40~50대 나이에 생활 기반이 안정적이다. 장인어른은 생활비를 넉넉하게 쓰면서도 자식들에게 지원을 해줄 정도로 경제력이 탄탄하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나는 두렵다.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면서 보호장구를 제대로 갖추려고 한다. 어떤 사고로 장애를 겪을지 모를 일이다. 가장 두려운 일은 대소변을 나 혼자 보지 못해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나의 존엄이 무너질 테다. 20년 전에 고향집 윗집에 사셨던 작은할아버지가 92세에 돌아가셨다. 어린 시절에 겨울방학이면 꼭 방패연을 만들어 주셨던 분이다. 작은할머니가 먼저 돌아가시고 한두 해 혼자 사셨다. 어머니가 자주 들러 돌보셔서 먼 지역에 따로 살았던 친자식들은 돌봄을 하지 않았다. 어느날 할아버지가 며칠째 누워계신다며 곧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소식을 어머니가 전하셨다. 인사드리러 갔더니 불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에 모로 누우신 할아버지가 검은 얼굴빛으로 주무시고 계셨다. 물과 음식을 넘기지 못한 날이 꽤 지났단다. 어느날 당신이 오래 사셨던 집에서 주무신 듯 돌아가셨다. 우리 아버지는 콧줄로 음식물을 드셨고, 양 손목이 병상에 묶인 채 계시기도 하셨다. 존엄한 죽음과 적절한 돌봄 간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2.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나는 불안하다. 온갖 부채로 집안 재산 대부분을 팔아넘긴 채 집을 떠나 방황하는 형이 있다. 형의 병치레에 도움이 될까 20여 년 전 형을 수혜자로 가입했던 보험을 작년에 해약했다. 원금의 60%도 안 되는 환급금을 내 생활비로 써야 했기 때문이다. 10년 넘게 안부를 모르는 형을 향해, 뇌출혈로 쓰러져 3년 만에 소식을 접하고 난데없이 보호자가 되어버린 󰡔새파란 돌봄󰡕에 나오는 성희처럼, ‘무소식이 희소식이다를 되뇐다. 어느날 갑자기 형이 나를 보호자로 부르고 내게 부양을 호소하면 나는 어떻게 할까. 이혼한 형이 병석에 누워 운신하지 못할 때, 형 개인의 잘못이라고, 죗값 치르는 셈 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외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개인이, 가족이 온전히 떠안아야 하는 돌봄은 현재 삶의 불안을 더욱 무겁게 한다.

󰡔새파란 돌봄󰡕의 에필로그에 존속 살해 혐의로 징역 4년을 받은 한 청년 이야기가 나온다. 병원비와 간병비를 보탠 그 청년의 삼촌은 이혼했다. 고교 친구 중에 재활학과 교수를 하는 친구가 있다.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아내와 함께 미국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친동생이 사고로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되었다. 부모님도 계시고 형도 있는데 친구가 돌봄을 맡았다. 동생의 재활과 인간다운 삶을 위해 전공을 장애학으로 바꾸고 영국에 있는 대학의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이런 이유로 아내와는 이혼했다. 학위 과정 중에도 1년간 귀국해서 과외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었고, 되돌아가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작년 한 해는 동생이 서울에서 독립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일로 분주했다. 주식 투자에 손댄 동생이 억대 빚을 진 데 대해 몇 마디 나무란 말에 동생이 형에게 한 말은 형이 내게 해준 게 뭐 있어?”였단다. 동생 빚을 다 떠맡은 채 강의와 연구, 아흔 살 가까운 나이의 어머님과 동생 돌봄 탓인지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로 친구는 가족 돌봄이 문제의 중심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정책 개발과 적용에 힘을 쏟고 있단다. 재혼 의사를 묻자 스쳐 지나간 인연만 몇 번 있었다고, 동생 이야기가 나오면 어느새 떠났다고 말하면서 웃는다.

 

3. 돌봄 하는 시간은 생애 밖으로 이탈하는 시간이 아니라 생애 자체이다

󰡔새파란 돌봄󰡕의 부제는 가족, 돌봄, 국가의 기원에 관한 일곱 가지 대화. 그런데 그것들의 기원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책에 없다. 어쩌면 󰡔새파란 돌봄󰡕은 그것들의 기원을 묻는 시작점에서 나눌 수 있는 이야기로 자격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는 가족, 돌봄, 국가의 기원이 도대체무엇인지 묻게 만든다. 돌봄이 사적인 영역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일임을 가족과 국가의 역할을 생각하면서 자각하도록 한다. 조현병을 앓고 있는 엄마를 돌보는 아름이, 알코올 중독자 동생을 돌보다 형제간의 연을 끊은 형수, 할머니 돌봄을 자처한 청년 경훈, 결혼을 통해 아버지에 대한 돌봄에서 벗어나려 했던 서진이 등 온전히 그 개인 한 명에만 맡겨진 돌봄 사례를 접하면서 저절로 국가가 떠올랐다. “국가가 도대체 뭐지?”라는 의문은 국가의 기원에 관한 물음으로 나아간다.

돌봄은 누구에게나 삶의 조건이다. 그래서 돌봄은 공적 가치를 지닌다. 공적 업무 담당자는 국가이어야 한다. 돌봄이 나아갈 방향 중의 하나는 돌봄에 국가의 책임을 강화하는 길이다. 󰡔새파란 돌봄󰡕의 중심 주장 중의 하나다. 저자 조기현은 진로 이행, 가족 돌봄, 생계 부양이 꼬이지 않는 세상을 바란다. 하고 싶은 모임과 가족 돌봄이 대립하지 않는 일상을 원한다. 아픈 이를 무능이라는 단어만으로 설명하지 않는 세계를 꿈꾼다. 어떤 이는 그런 삶을 이미 누리고 있고 어떤 이는 그런 삶이 불가능해 보이는 처지에 있다. 평등을 향한 염원은 그래서 자유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강하다.

돌봄의 문제가 개인의 복불복, 운명의 일까? 설령 그렇다 해도 돌봄에 따른 고통을 개인이 온전히 져야 하는가? 개인이, 그리고 가족 중에서도 일부(대개는 여성으로서 아내, 엄마, )만 모두 떠안기에는 가혹하다. 가족과 국가의 기원이 자연인지 인위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완전히 저절로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도 아니고 특정 목적을 위해 철저히 기획되어 만들어진 것도 아닐 것이다. 어느쪽이든 현재 존재하는 것이니 각각의 존재다움을 실현해야 한다. 물론 규정되는 그 존재다움 또한 절대적이지도 않고 고정적이지도 않다. 한편, 돌봄의 젠더적 불평등을 극복하고 남성 돌봄의 가능성과 장점을 󰡔새파란 돌봄󰡕에 나오는 경훈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과제 해결 지향형 간병을 남성만의 간병 스타일로 고정할 수는 없지만, 그런 유형의 간병이 정서적 소진을 방지하거나 최소화하고, 남성 간병의 심리적 거부감을 줄이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는 점. 돌봄을 여성의 일로만 여기는 성별 분업을 해소하는 길이라고 조기현은 강조한다.

돌봄 없는 존재는 없다. 돌봄의 보편성이야말로 돌봄의 공공성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근거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그것을 의식하고 자각하고 확인한다. 가족과 국가, 특히 국가는 돌봄을 공동 책임으로 여기고 책임을 넉넉하게 나눠질 수 있는 정책과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돌봄이 개인의 운에 더 적게 의존하면서 국가(사회)가 더 많은 책임을 져야겠다. 돌봄과 생애()가 분리되지 않을 수 있는 최선이다.

 

4. 우리 삶에서 돌봄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 돌봄 민주주의와 돌봄 시민

󰡔새파란 돌봄󰡕 저자의 말대로 돌봄을 하지 않은 사람은 돌봄을 잘 받고, 돌봄을 하는 사람은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 돌봄 책임이 여성, 가난한 사람, 유색 인종, 이주 노동자에게 분배되고 있다. 그럼에도 돌봄에 관한 공적 논의의 장에 그들은 배제된 채 남성, 권력자 등이 참여하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돌봄을 불행으로 만드는 맥락이다.

정치적 의미에서 시민은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사람이다. 돌봄 시민은 누구나 자신의 자유를 제한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돌봄을 하고 돌봄을 받을 수 있으며, 성별, 인종, 빈부, 국적의 차별 없이 돌봄을 평등하게 하고 누릴 수 있는 사람이다. 헌법에 돌봄의 공적 가치를 명시하자는 저자의 주장은 신선하고 의미심장하다. 돌봄은 개인 기부 또는 후원 형태의 시혜적 대상이 아니다. 개인과 가족이 온전히 떠안아야 할 개인적 영역에 머물러야 하는 행동이 아니다. 모두에게 필요한 공존과 공생의 근간이다. 장애 인식, 차별과 불평등, 혐오 등에서 벗어나거나 그것을 최소화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는 실천이다.

돌봄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성숙과 발전의 동력이다. 저자는 돌봄 민주주의 실현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고용 차별 금지, 충분한 보상, 일정 연령기에 영유아·노인·장애인과 함께하는 돌봄 책임 복무제 시행, 돌봄 교육을 초중등 의무 교육 과정으로 설정하기 등을 제안한다. 병무청이 입영 대상자를 발굴하면서 군복무 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국가 기관이듯, 돌봄을 관장하는 기관, 즉 장기간 돌봄이 필요한 환자를 발굴하고 이에 대응할 인력과 시스템을 구축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국가 기관으로서 돌봄청을 설치하자는 저자의 주장은 설득력이 강하다.

󰡔새파란 돌봄󰡕이 폭로하고 있는 돌봄의 현실은 참담하다. 가족 돌봄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이를 제대로 인정하고 보상하지 않는다. 법적으로만 가족인 사람을 돌봐야만 하고, 법적 가족은 아니지만 생활 동반자로서 돌볼 수 있는데도 제한적이다. 한평생 돌봄을 떠맡은 여성이 나이 들어서 정작 자신은 돌봄을 받지 못한다. 돌봄을 받지 못해 자신을 소중히 대하는 존재가 없는 가족 난민이 늘어나고 있다. 이 모두 우리 삶에서 돌봄을 중심에 놓아야 하는 이유이다. 이를 위한 노력 중 하나가 돌봄 시민 되기다. 나부터 돌봄 시민 되기에 나서서 돌봄 시민으로 거듭나야 한다.

15년 전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돌봄에 대해, 나는 돈을 번다는 이유로 돌봄을 안 해도 된다는 식의 보호형, 생산형 돌봄 무임승차권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도 장인어른 돌봄은 장모님과 아내의 몫으로 나는 여전히 무임승차에 한 발을 얹고 있다. 20대 초반인 큰아이와 두 명의 미성년 자녀는 미래의 어느 때든 나를 돌봄 대상으로 돌봄 주체가 될 수 있다. 당장 그렇게 된다면 모두 영 케어러가 된다. 내 자녀에게 돌봄이 일상을 뒤흔들지 않고, 사고가 아닌 사랑이 되고, 진로 이행에 방해가 안 되고, 자신의 생계 활동과 꼬이지 않으며 하고 싶은 모임을 할 수 있는 돌봄 여건이 사회적으로 갖춰져야 한다. 모두가 돌봄 시민이 되고 돌봄 시민으로 거듭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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