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야 할 세계 - 제13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문경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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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 밑에, 벌판에, 산 위에 있는 한 아이는 각각 소설 지켜야 할 세계의 주인공 정윤옥의 10, 20~40, 50~60살의 모습인 것 같다. 20247, 대학로 학전대표 고 김민기 님의 운구차가 학전앞마당을 떠날 즈음, 색소폰 연주자가 그가 만든 노래아름다운 사람을 연주했다. 가사를 눈으로 읽으며 음악을 들었다. 한 묶음 한 묶음이 정윤옥 삶의 초반과 중반, 끝을 고스란히 담고 있더라.

 

어두운 비 내려오면 / 처마 밑에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어린 정윤옥은 뇌병변장애를 안고 태어난 동생 지호를 8년간 돌보면서 미워하기도 했다. 어느날 지호는 교회 목사가 운영하는 장애인 시설로 간다. 윤옥의 엄마가 표현한 대로 어린 지호는 버려진다. 학업에 전념하면서도 동생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을 안고 살았던 윤옥에게 지호는 지키지 못한 세계이다. 대학생이 된 윤옥은 지호를 찾으러 하성호 목사의 거주지로 갔지만, 지호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어 절망한다.

 

세찬 바람 불어오면 / 벌판에 한 아이 달려가네 / 그 더운 가슴에 바람 안으면 /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교사 3년 차 정윤옥은 2학년 담임인데, 기부금 모금을 거부하면서 학년주임, 교감 등 여러 교사와 갈등한다. 3학년 학생 수연을 만나면서 민들레 야학꽁치김치찌개라는 수연의 세계를 접한다. 담임을 맡았던 영숙이 자살을 한다. 교직원노동조합에 가입했다가 파면당한다. 정훈이 수연을 성폭행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 시기에 윤옥은 비탈진 모래 언덕에 서 있는 기분으로 쌓아둔 모든 것이 모래처럼 허물어져 갔다.” 정훈 사이에서 태어나 네 살이 된 상현을 맡기러 온 수연은 윤옥에게금이 간 유리창같아 보였다. ‘선물처럼 찾아온상현을 맡은 지 3년이 되던 겨울, 수연이 상현을 보러 왔다가 돌아가던 날, 윤옥은 수연이가 영숙처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뒤쫓아가 자기가 잘 키우겠다고 말한다.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수연이가 내던 소리는 지호를 떠나보낼 때 윤옥의 엄마가 흘렸던 소리였다.

 

새하얀 눈 내려오면 / 산 위에 한 아이 우뚝 서 있네 / 그 고운 마음에 노래 울리면 /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정윤옥 선생님은 봄방학 전 2주 정도 기간에도 수업을 진행한다. 그에게 수업은 밥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성찬과 같은 수업이 있는 날, 그는 온종일 행복했다. 눈치 없이 고집만 부리는 선배로 비칠까 염려하고, 몸 편하고 마음 편한 일을 맡아 정년퇴직하는 날까지 있는 듯 없는 듯 지내고 싶은 마음도 드는 사람이다. 그러나 지호와 같은 장애가 있는 시영이의 담임을 맡고 자신의 교육관에 따른 수업을 위해 2학년 문과반 담임교사를 지켜낸다.

 

소설 󰡔지켜야 할 세계󰡕를 읽는 내내 지키다라는 동사를 붙잡고 있었다. 사전을 찾아보니 지키는 행위는 무언가를 침해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감시하고 막는 행동이다. 무언가가 함부로 지나지 않도록 길목이나 통과 지점 따위에서 주의를 기울여 살핀다. 규정, 법규 등을 어기지 않고, 지조, 절개, 정조 등을 굳게 지니는 모습이다. 지켜야 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곧 그것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는 것, 빼앗길 수도 있음을 전제한다. 지켜야 한다는 데에는 무언가가 다른 무언가를 빼앗을 수 있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왜 빼앗으려고 하는지, 빼앗아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왜 뺏기지 않고 지켜야 하는지, 지키지 않으면 내게 어떤 불이익이 있는지, 지켜야 할 세계가 있는데 지키지 못하거나 지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 답하기 어려운 물음이 일어났다.

다른 물음이 이어진다. 내가 지켜야 할 세계가 무엇인가, 나에게 지켜야 할 세계는 무엇인가. 앞의 물음의 방점은 에 있고, 뒤의 물음에는 나보다지켜야 할 세계에 있다. 내가 과거에 지켰던 세계는 무엇이고 현재 지키고 있는 세계는 무엇인가. ‘지켜야 할이란 문구는 시점으로는 미래를 품고 있고, 의미로는 당위를 안고 있다. 과거와 현재를 견주어 보고 앞으로 계속 주욱 지켜 나가야 할 세계가 무엇이겠나 하는 물음과 사실에 머물지 않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세계가 무엇이냐는 물음이다. 그동안 그 무엇을 지켜야 할대상으로 여기지 못한 탓인지, 쉽게 답을 하지 못한다. 그저 주어졌으니 머물러 있고, 그냥 원한 것을 갖게 되었으니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일 뿐, 그 무엇으로부터, 그 무엇에게 빼앗기지 않고 지켜야 하는 것으로 여기지는 못했다.

동생 지호가 살아있는지 사주점을 봐서라도 알고 싶었을까. 윤옥은 사주를 보는 레스토랑에 간다. 주인이자 셰프는 굴라시 스튜라는 동유럽 음식을 요리했다. 윤옥에게 그 식당 주인은 이 공간의 주인이라는 걸 보여주듯 당당한 모습이다. ‘주인’, ‘당당하다라는 두 단어에 눈길이 갔다. 당당하다의 은 한자어로 이다. , 사랑채, 마루 등을 뜻하는 단어로, 옛날에는 내세울 만한 주택을 지을 때 방 앞에 대청 또는 대청마루로서 당()을 만들었다. 조선 시대에는 오늘날 장·차관급의 관리를 당상관(堂上官), 그 아래의 관리를 당하관(堂下官)으로 나눠 불렀다. 무언가를 지키고 있는 주체는 말 그대로 주인이다. 그 모습과 태도는 떳떳(당당)하다. 지키는 모습은 당당하고 당당해야만 한다.

윤옥이 지켜야 할 세계는 엄마, 지호, 수연, 상현, 영숙, 시영, 그리고 학교, 수업 등이다. 지호는 지키지 못했다. 속죄였을까. 그 외의 사람과 대상을 지키려고 윤옥은 최선을 다했다. 그중에는 날을 세우지 않고는 지킬 수 없는 세계도 있었다. 이런 윤옥과 대비되는 인물은 정훈이다. 그는 민중들의 문해교육, 억압받는 민중들의 인간화를 위한 해방 교육을 주창한 프레이리의 교육 사상을 지키지 못했다. 그 반대의 길에서 교육감이라는 권력을 탐하고 부정과 부패를 저질렀다. 자신의 탐욕이 자신이 지켜야 할 세계를 빼앗은 셈이다.

한편, 지키는 행위가 개개인의 몫인 것만은 아닐 것 같다. 꼭 지켜야 할 가치는 여럿이 함께 지켜야 한다. 윤옥이 동생 지호를 지키지 못한 것은 우리 사회가 돌봄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 케어러(Young Carer, 가족 돌봄 청년)의 가혹한 상황을 서술한 󰡔새파란 돌봄󰡕이란 책에서 저자 조기현은 돌봄을 사회적 차원에서 이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단박에 읽었다. 작년 가을 어느날, 오후에 책을 받아 들고 표지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단발머리 여자가 경계석 위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밤이 깊어 갈 무렵 다 읽었다. 잠깐 저녁을 먹으러 식탁에 가느라 손에 놓았을 뿐이다. 내내 천천히, 하지만 쉬지 않고 읽었다. 울컥하기도 했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지호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윤옥과 시선을 맞추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다 이해한다는 듯이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누나, 안녕이란 대목에서, 해직당하는 윤옥에게 전별금을 건네는 교감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장면에서, “열아홉이었을 때 만난 수연이 쉰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윤옥에게 수연은 우리 반 그 아이 같았다. 안타까웠고 아까웠다.”라는 문장에서 그랬다.

딱 한 글자 의 무거움과 경건함독후감을 막 쓰기 시작할 때 적었던 제목이었다. 신달자 시인이 여든 살에 펴낸 묵상집 󰡔미치고 흐느끼고 견디고󰡕에서 읽었던 삶은 딱 한 자인데 이것처럼 무겁고 복잡한 것이 없습니다.”라는 문장에서 가져왔다.

한라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수림상회에서 윤옥과 윤옥의 엄마가 노후를 보내고, 상현이는 임용이 되어 낳아 준 엄마 수연과 길러준 엄마 윤옥과 정을 나누는 결말은, 상상만 해도 마음을 울리는 감동을 준다. 그러나 작가는 정윤옥의 시신을 실은 운구차는 그녀가 1년 전까지 일했던 고등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라는 문장을 첫 문장으로 윤옥의 죽음을 알린다. 삶의 허망함과 윤옥을 향한 애잔함을 극대화하려 했을까. 애잔함(가엽고 불쌍하여 마음이 슬퍼짐)에 독후감 쓰기를 멈추고 있다가 고 김민기 님의 부음을 들었다. 그의 노래 아름다운 사람을 듣고서야 애잔함은 아름다움으로 바뀌었다. 소설 󰡔지켜야 할 세계󰡕의 정윤옥 선생님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는 맑은 두 눈과 더운 가슴과 고운 마음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이다. 무겁고 허망한 마음이 애잔함으로, 다시 아름다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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