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빛을 따라서
권여름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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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내 삶을 짓누르고 있는 것은 가계빚이다. 내 집 마련하느라 얻게 된 빚은 아니다. 처남 두 명의 공동소유로 된 집에서 무주택자로서 20년 가까이 살고 있다. 많은 빚은 소득보다 지출이 많은 결과이다. 변명을 하자면, 형에게 수천만 원을 빌려주고 떼인 탓이기도 하다. “나중에 어떻게 되겠지.”하는 대책 없는 낙관주의도 큰 몫을 했다. 정년퇴직 수당으로 이 빚을 다 갚을 수는 있을지, 퇴직이 가까워질수록 빚은 줄어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월급날, 마이너스 대출 통장 계좌에서 돈을 꺼내 여기저기에 메꿔 넣은 후에는 안도감보다 훨씬 큰 불안감이 들어온다. 자식들에게는 대학교 다니는 비용만을 댈 테니, 그 이후는 너희 손으로 해결하라고 말했지만, 자식 결혼할 때 내게 들어온 축의금 정도만 건네주는 부모가 될 것 같아 벌써부터 미안하다. 권여름의 소설 󰡔작은 빛을 따라서󰡕의 주무대인 필성슈퍼와 그 집 식구들은 현재의 우리집, 그리고 나, 나의 식구와 비슷하다. 어찌 우리집만 그러겠는가.

소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필성슈퍼가 영업 위기를 겨우겨우 이겨내고 넘어서는 과정, 주인공 화자인 은동이 가족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배우 꿈 도전기, 할머니 황서은이 문맹에서 벗어나고 문해력을 키우는 과정 등이다. 이 세 이야기가 오밀조밀 모이고 얽히면서 만들어지는 자잘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작지만, 큰 파동을 띤 빛을 보는 것 같다. 가만히 들여다보아도 눈부시지 않고 마음을 가라앉게 하면서 입가에 살짝 힘이 들어갈 정도의 웃음을 주는, 그런 빛을 안겨준다. 무엇일까.

동네 주변에, 출퇴근 길에 새로 문 연 가게가 보이면, 혼자서 소리내어 잘 되어 번창하소서.”라고 말한다. 금세 문 닫는 가게를 흔히 보았기 때문이다. 집에서 서른 걸음쯤이면 닿는 오래된 슈퍼가 나들가게로 새 단장을 했어도, 컵라면 하나 사는데 큰 길가에 있는 편의점으로 간다. ‘나들가게에서 물건을 사면 유통 일자 마감이 임박해 있거나 지나 있다.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상품 회전이 잘 안된 탓이다. 한창 술을 즐겨 마실 때는 그래도 일주일에 서너 번은 막걸리에 소주, 맥주를 사느라 들렀지만, 술 끊은 뒤로는 안 간 지 2년이 다 된다. 소설의 주무대인 필성슈퍼는 아파트 상가에 흔하게 있는 동네 잡화점이다. 우리집 근처에 15년 전에 들어선 평수 넓고 비싼 아파트 상가에는 처음부터 마트 대신 작은 편의점이 있었다. 그것조차 작년에 폐점했다. 직선거리로 100m도 안 된 데에 대형마트와 대형 식자재마트가 생겼기 때문이다.

필성슈퍼는 근처에 대형마트가 개업하자 두부 한 모도 배달하기 시작한다. 김장배추를 절여서 판다. 외국계 대형마트 입점을 저지했지만, 그 업체가 샘골마트로 허가를 받고, 쌤마트로 문을 연 후, ‘필성슈퍼는 매출이 확 준다. 배달 강화, 담배 매출, 여름 한철 물놀이 손님, 트럭에 물건을 싣고 위도로 건너가 팔기, 위도 반건조 갑오징어와 간장소스로 길거리 맥주 판매 등, ‘필성슈퍼식구들은 고군분투, 악전고투를 한다. 1997IMF 이후 한국 경제의 부침과 일반 사람의 간당간당한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래도 한 번도 망한 적 없는 필성슈퍼는 오늘 우리의 모습이다.

은동은 용돈을 모으고 할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받은 돈을 꼬박꼬박 모아 조금 큰 도시에 있는 배우 아카데미 학원에 다니려고 한다. ‘개나 소나연기를 하려고 한다는 학원 관계자의 말에 치욕감을 느끼고 포기한다. “꿈을 잃은 자는 이토록 차가워질 수 있다.”라는 은동의 독백에 나는 순간 전율을 느꼈다. 은동이 연기자 꿈을 품으면서 했던 말, “꿈은 부러운 것이 없게 만든다.”에 감동이 컸기 때문이다. 은동의 마음에 절망감과 함께 들어선 모멸, 모욕의 정도를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폐허그냥이었던 오은동이 쌤마트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할머니와 함께 하면서 뻔뻔하고 당당한 폐허’, ‘의기양양한오은동으로 바뀐다. 한편, 할머니와 삼 주일 넘게 벌인 시위는 은동에게 연기에 도전하는 무대였다. 삶 자체가 연기고 연기가 곧 삶이라는 어떤 유명 배우의 말을 은동은 마트 앞에서 몸소 실현한 셈이다. ‘한 번도 망한 적 없는 은동의 삶을 확인한다.

황서은 할머니는 한글을 깨친 후에야 자신의 이름이 서운이 아니라 서은임을 안다. 자신의 이름을 서운이라 지은 부모를 평생 서운하게생각했던 그였다. 고창 오빠네 집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서, 샘골여성 문예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한 시에서 할머니는 한글을 알게 된 마음을 보여준다. 마음이 시원해지면서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 되고, ‘가슴에 뭔가 들어차 부풀어오르고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우르르 무너져버리는 기분. 한글을 가르친 손녀 은동은 할머니의 시를 읽고서야 비로소 알아야 면장이라도 혀.”에서 면장面長이 아니고 面墻임을 안다. ‘할머니가 담()을 넘으려는 순간, 눈앞의 벽이 허물어지는 상상을 하는 은동이고운 가루로, 빛으로 부서져 흩날리는 것들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묻는다. 분명한 것은 한 번도 망한 적 없는 할머니의 삶이다.

글자를 못 읽으셨던 우리 어머니 생각이 소설을 읽는 내내, 그 후에도 여러 번 났다. 일흔여섯에 뇌졸중으로 훌쩍 떠나셨다. 반신불수의 상태로 병원에 계실 때 한글 읽기라도 알려드릴 걸 그랬나. 더 오래 건강히 사셨으면 내가 알려드렸을까. 소용없는 생각이고 후회다. 물건 사러 오는 사람 하나 없는 밤을 보내다 귀가하는 길에서 은동은 할머니에게 금반지 하나를 받는다. 그리고 듣는다. ‘위태로운 시간을 버티고 살아내는 사람들의 머리에서 울리는 종소리같은 간당간당소리. 모양이 소리로 변했다. 작은 것이 대롱대롱 간신히 매달려 있거나 가득 차 있어야 할 것이 거의 닳아져 곧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모습이 은동이에게는 세상을 향해 용감하게 양팔을 벌린 것처럼’ ‘필성슈퍼의 문도 열릴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의 종소리로 변한다.

인구 감소로 소도시와 농어촌 지역의 중고교는 소멸의 위기에 있다. 사립학교라면 교직원의 생계를 위협한다. 명문 사학이냐 여부는 맨 꼭대기에 있는 대학에 몇 명이 입학했느냐가 가른다. 한국의 많은 청소년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춘기를 간당간당보내고 있다. 차별과 불평등에 익숙해지고 관대해진다. 협력은 선택이고 경쟁은 필수다. 성적 순위로 특별반(우월반)을 운영하는 야만적인 관례는 이제 불법이지만, 은동이 겪었던 경쟁은 더욱 격렬해지고 수도권 집중 현상은 심해졌다.

소설 󰡔작은 빛을 따라서󰡕의 이야기가 시작하는 1996년에서 28년이 지난 2024, ‘필성슈퍼와 그 식구들은 현재 어찌 되었을까. 그동안 한 번도 망한 적 없었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아마도 여러 번 망하지 않았을까. ‘손님이 찾아오지 않아도 문을 여는 마음은 마음뿐, 이미 폐업했을 것이다. 대기업 편의점이 필성슈퍼공간의 반절쯤을 차지하고 24시간 불을 밝히고 문을 열어 놓고 있을지 모른다. 내가 매주 로또 복권을 1, 1,000원씩 인터넷으로 구매한 지 2년 정도 되었다. 오늘 당장 빚에 눌리지 않기 위해서다. 빚이 불안감으로 내 마음에 들어오려 할 때 복권은 요긴하게 쓰인다. 빚과 빛은 점 하나 차이다. 그 점 하나가 빛이 될 것 같다. 복권 말고 내 꿈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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