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물론 입문 - 새로운 물질성과 횡단성
문규민 지음 / 두번째테제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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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물론 입문󰡕을 읽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다. ‘꿈꾸는 고기덩어리인 인간처럼 인공지능 기계 덩어리도 자각과 사유 능력을 지닐 수 있는지, 30여 년 전에 대학 신입생 때 처음 접한 유물론과 다르게 현재 읽고 있는 신유물론의 새로움이 무엇인지 내내 고민하고 있다. 4, 제인 베넷을 소개하면서 저자가 그렇다면 가장 비유기적이고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 예컨대 쇳덩어리 안에도 하나의 생명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말에 당황하고 황당해 하면서 책을 덮고 쉬었다. 아침에 읽다만 신문을 펼쳤다. 어떤 칼럼의 필자가 초보적인 비건 실천 결심의 이유로 살아 있는 모든 생명에겐 각각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라는 대목을 읽자마자 나는 살아 있는 모든 생명물질로 바꿔 모든 물질에겐 각각의 이야기가 있다.”라고 기록장에 적었다.

이 책의 들어가며에 뇌공학 교수 정재승이 인간의 고귀한 정신과 사랑하는 사람의 정체성이 1.4kg의 뇌에서 비롯된다고 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던 말이 나온다. 정재승은 우리는 정신이라는 위대한 속성을 탄생시킬 만큼 물질이 그 자체로 경이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물질은 정신이 위대한 만큼 더불어 위대하며, 이 우주는 물질을 통해 정신이라는 물질을 이해하는 토대를 비로소 만들어낸 것이다.”라고 썼다. 인간의 뇌에 있는 100억 개가 넘는 신경세포들이 전기신호를 주고받으며 나타나는 현상이 정신이라면, 물질세계의 그런 창발성이 물질의 가장 놀라운 속성이라고 정재승은 주장한다. 정재승이 신유물론자였나? 예전에 나는 관념론자의 반론을 염두에 두고, 유물론은 정신에 대한 물질의 선차성을 주장한 것()이지 정신의 중요성을 무시한 것은 아니라는 말을 꼭 덧붙였다. 이와 유사하게 󰡔신유물론 입문󰡕의 저자 임규민도 물질에 이미 그 자체로 인간이 따라잡기 힘든 심오함, , 역량이 내재하고 있다고 해서 신유물론이 물질을 무한한 생기로 충만해 있다거나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신비로운 존재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신유물론은 물질을 되찾은 유물론이고 물질에서 출발하는 유물론이다. 인간 활동이나 담론적 구성을 부정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 역사유물론, 사회구성주의를 통과, 관통, 즉 횡단한다. 어떤 것과도 쉽사리 절연하지 않고 함부로 대립하지 않는다. 횡단성은 이분법적 범주의 불안정성과 우연성을 폭로하면서 근본적인 의미 대신에 통계적인 물질의 성질을 드러낸다. 미리 주어진 초월적 본질을 부정하면서 총체성 없는 통일성종합 없는 구성을 추구한다. 신유물론은 물질세계의 전반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한다.

신유물론의 새로운 물질성이란 물질의 능동성, 역량을 뜻하고 신유물론의 횡단성이란 물질 간 경계를 돌파하는 운동이자 그 운동을 통해 만들어진 구성물이다. AI라는 물질은 인간과 기계 간의 경계를 돌파하는 운동성을 지닌 존재이자 이것의 결과물이다. 동시에 횡단성이 가로질러진 것들 사이에 걸쳐 있음양쪽에 걸쳐 있지만 어느 쪽에도 속해 있지 않음을 뜻한다는 점에서 AI는 인간과 기계 사이에 걸쳐 있으면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물질이다. 이런 인식에 이분법적 범주는 자리할 수 없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저자 룰루 밀러가 살폈던 생물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시도한 자연의 질서화, 범주화가 허구에 불과한 것이라는 점을 󰡔신유물론 입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물질은 물질과 의미, 자연과 문화도 가로지른다. 물질은 자연에만 속하지 않으며 문화에만 속하지도 않는다. 물질은 자연을 벗어나 문화로 나아가고 반대로 문화를 벗어나 자연으로 나아간다. 자연과 문화를 횡단하는 자연문화의 하나가 코로나19 팬데믹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핵에너지, , 장애인의 보조기구, 동물의 가축화 과정 모두 자연과 문화 간 횡단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신유물론의 존재론은 교차성 존재론으로 이어진다. 물질은 항상 기호가-되는-중인 물질이고, 기호는 언제나 물질이-되는-중인 기호다. 김정희원의 󰡔공정 이후의 세계󰡕에서 그는 교차성의 정치를 주장한다. 젠더, 계급, 인종, 장애 유무, 성적 지향, 나이, 종교, 언어, 민족, 국적, 학력, 출신 지역 등과 같은 모든 범주가 다르게 겹쳐질 수 있고, 그에 따라 억압, 불평등, 차별의 양태가 달라진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범주들이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따라 다른 효과를 만들어낸다. 교차성 정치이론은 흑인 여성 페미니스트가 자신들이 겪어온 특수한 형태의 차별과 불평등에 주목하면서 만들어졌다. 신유물론이 정치철학으로 이어질 수 있는 지점이다. 이렇게 신유물론에서 발견한 새로운 물질성과 횡단성은 현실 정치의 변화무쌍함으로 나타나고 정치철학에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나는 이전의 유물론이 물질적 토대를 근거로 현실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내용을 읽고 느낀 명쾌함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저자는 신유물론이 다양하게 전개하고 있지만 비인간, 탈인간적 경향, 인간중심적이고 인간주의적 사유와 단절이 공통점이라고 정리한다. 신유물론에서 물질은 물질과 기호 사이, 자연과 문화 사이, 인간과 비인간 사이를 넘나들며 이들 사이의 문턱을 낮춘다. 동시에 단일한 범주로 드러나지도 않고 이분법적 범주로 나뉘지도 않으며, 둘 중 하나가 아니라 언제나 둘 사이의 하나이며 둘 사이를 가로지르는 하나, 그리고 하나가 되지 않는 하나이다. “비물질적인 것들이 물질적인 것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신유물론은 명백한 유물론이다. “꿈꾸는 고기는 자연산도 합성도 아니지만, 동시에 자연산이면서 합성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모순율을 거리낌 없이 주장할 정도로 저자의 뒷배에는 인도불교학이 있다는 것을 속표지 날개에 적힌 저자 이력을 보고 알았다. 저자는 자신을 알아차리는 로봇은 그저 인공적이지만은 않은 인공물, 자연물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인공물이라는 기묘한 지위를 가진다.”라고 말한다. 이는 배중률을 위반하는 주장이다. 물질은 불온한 것이 분명하다.

물질의 잠재성과 현실성, 칼의 절단 능력은 실재적이지만 잠재적이다. AI에게 주체적인 사유능력은 실재적이지만 아직 현실적이지 않은 잠재적인 것, 곧 잠재성일지 모른다. 신유물론에서 발견한 새로운 물질성이란 능동적이고 생기 있는 성질이다. 창조적이며 스스로 힘써 행한다. 인간의 의도나 계산, 예측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뭔가를 행할 수 있는 행위성을 지닌다. 이런 잠재성이나 역량을 마누엘 데란다는 형태형성적 힘이라 하고 제인 베넷은 생기적 물질성, 로지 브라이도티는 조에(zoe: 인간-아닌 생기적 힘), 캐런 바라드는 행위성이나 역량 발휘를 넘어 행위성이라 한다.

죄가 나쁘지 죄인은 나쁘지 않다.”라는 말처럼 범법 행위와 범법자를 분리하려는 시도는 분리불가능성이라는 물질의 수행성을 위반한다. AIAI의 행위를 분리하려는 시도도 물질의 수행성을 위반하는 관점이다. 죽은 것처럼 보이는 물질이 무력하지 않으며 나름의 행위성을 발휘하고 있다는 생각이나 물질이 지닌 능동성과 활기는 물질이 인간의 예측과 통제를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을 예견하게 한다. AI도 그러하다. 고깃덩어리가 꿈을 꿀 수 있다고 해서 이를 근거로 기계도 꿈을 꿀 수 있다고 추론할 수 없다. 그러나 고깃덩어리가 수억 년을 거치며 내재적 능력을 발휘하여 자아를 싹틔우고 자각하고 사유 능력을 획득한 것처럼 캐런 버라드의 물의를 빚는 물질로서의 기계 덩어리도 그런 능력을 획득하지 못할 것이라 단정하기 어렵다. 인간과 유사하거나 그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가능성은 잠재성 측면에서 존재한다.

1995년 어느 날 나는 조간신문 <해외토픽>에서 10년 후에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이 인간의 뇌에 칩으로 심어져 더 이상 영어 사전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될 것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매일 영어신문을 읽으면서 모르는 단어 200개씩을 단어장에 적어가며 힘겹게 외워대던 때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1999년부터 2003년에 걸쳐 개봉한 영화 󰡔매트릭스󰡕 세 편 중에서 조종법을 무선으로 전송받아 헬리콥터를 조종하는 장면이 가장 깊게 각인되어 있다. 이 둘 모두 허구라고 단정했다. 그런데 󰡔신유물론 입문󰡕에서 신경모방칩(neuromorphic)’을 심은 ‘TrueNorth’를 접했다. 인공지능에 기계로 된 몸을 입혀 주었더니 자아가 싹을 틔웠다고 한다. 󰡔신유물론 입문󰡕 5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로지 브라이도티의 포스트 휴먼은 인간의 신체가 자연-문화 연속체임을 인식하고 그것을 새로운 자연-문화 연속체로 재구성하는 기계-되기의 결과이다. 보편화된 사이보그와 인간 신체의 기술적 산물화가 포스트 휴먼의 특징이다. 여기서 인간과 기계 간의 대립과 이원론은 해체되고, 그 대립과 이원론을 통해 존립한 인간 존엄성은 해체되어 존엄의 대상은 모든 물질로 확장된다. 정보통신기술과 생명기술로 매개된 신체는 사이보그다. 기계-되기란 인간의 신체가 자연-문화 연속체임을 인식하고 그것을 새로운 자연-문화 연속체로 재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AI(인공지능)가 연구된 지 60년이 넘었다. 정재승의 정의에 따라 특정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인간이 만든 지능적 시스템인 인공지능이 상용화되었다고 해서 일자리는 줄지 않았다 한다. 제조업에서는 줄었지만, 서비스업의 일자리는 늘었다. 다양한 요구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 사람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감정 파악, 그 사람에 대한 공감, 행동 대체에 관한 직관과 추론 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때 가르쳐주지 않아도 배울 수 있는 능력, 창의적인 대응이 필수적인데, 이를 인공지능이 대신하게 될지에 관한 예측 판단은 엇갈린다. 정재승은 20163월 이세돌과 알파고 간의 두 번째 바둑 대국을 수십 년 동안 인간이 두었던 바둑으로 학습했던 알파고가 그것을 뛰어 넘는 자신만의 전략들을 추론해내었다.”라고 평가했다. 알파고는 직관과 가르쳐주지 않은 것을 배우는 능력인 추론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미래에는 AI도 인간처럼 언젠가는 양심이란 것을 지닐 수 있을까? 인간에게만 가능한 것은 아마도 도덕성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부끄럼일 것 같다. 아담 스미스가 도덕적 행위의 중요한 동력이라고 생각한 부끄럼’, 맹자가 도덕성의 원천 중의 하나로 꼽은 수오지심AI가 자체적으로 생성해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측은, 사양, 시비의 감정은 어떨까. 일곱 가지 감정인 희((((((()은 무수히 많은 인간의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감정에 대응한 결과물을 조합해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도덕 감정인 사단까지 AI가 인간처럼 재현할 수 있을까. 마누엘 데란다가 새로운 물질성의 핵심이라고 주장한 물질에 실재하는 잠재성을 근거로 하여, 신유물론의 탈인류주의는 그 실현 가능성을 수용할 것 같다. 한편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는 사단의 일부가 없거나 그 작용이 활발하지 않다. 도덕적 민감성이 0에 가까운 인간 존재가 고깃덩어리 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 반대편에서 도덕적 민감성이 매우 높은 기계 덩어리도 가능할지 모른다. ‘부끄럼이 없거나 부끄럼을 모르는 인간(범법자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법기술자, 법전문가, 법조인도 있다.)이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것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그런 AI의 사회적 해악은 상상을 뛰어넘을 것 같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인공지능 연구 기업 오픈AI가 챗봇 GPT’라는 언어생성기를 공개했다. GPT의 기반인 GPT3 알고리즘은 파라미터(매개변수)1,750억 개다. 인공신경망의 파라미터는 인간 뇌에서 뉴런 간 정보전달 통로인 시냅스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인간의 뇌는 약 1,000억 개의 뉴런을 갖고 있고 뉴런을 연결하는 접합부인 시냅스는 100조 개다. 2023년 초에 공개되는 GPT4는 매개변수가 100조 개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한다. AI는 인간의 지능을 증폭, 증강, 대체할 것이다. AI를 전기처럼 사용하는 시대를 미래학자 마틴 포드는 󰡔로봇의 지배󰡕에서 예측했다. 딥러닝 방식의 생성AI가 개발되고 있는 현재, 인간만이 창작 활동을 수행할 수 있다는 생각은 단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에 그칠 것만 같다. 알파고의 묘수에 소름 끼친다고 하고, GPT의 활약을 섬뜩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 같다. 인간의 단순한 보조 도구로 예측·분류 기능만을 수행하는 AI가 이제는 사람처럼 작동하는 시대의 출발점으로 챗GPT는 평가받고 있다. 얼마나 소름 끼치고 섬뜩해진 후에야 AI를 담담히 받아들이게 될지 모르지만, 곧 다가올 미래이다.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뇌 활동에 장애가 있는 인간에게 사유 능력은 제한적이거나 전무할 수 있다. 감정도 양과 질 면에서 모든 인간이 다르게 지니고 다르게 작동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 능력의 보편성을 전제로 한 AI와 인간 간, AI와 동물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고민하고 정리하는 일은 내용적으로 오류일 수 있다. AI가 인간과 동일한 또는 그 이상의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사유 능력을 지니고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을지를 주제로 한 논의는 의미가 없다. 예측에 그칠 뿐이기 때문이다. ‘자의식이 무엇인지 명확한 정의가 있지 않은 상태에서 챗GPT가 자의식을 지닐 수 있는지에 관한 논쟁은 큰 의미가 없다. ‘생명에 관한 일관되고 명쾌한 정의가 없는 상태에서 기계 덩어리 AI가 생명 활동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도 무의미하다. 이러한 논의보다는 탈인간중심주의를 비롯한 탈이원론, 탈범주화를 기반으로 한 AI에 대한 관점, 태도와 이것이 미래 사회를 어떻게 이끌어 갈 수 있을지 정치, 경제, 문화적 차원에서 고민해야 한다.

세탁기와 피임약으로 여성의 삶은 크게 변혁되었다. 하지만 성불평등 사회 구조와 인식이 굳건한 현실에서 여성 노동의 착취는 심화했다. AIAI를 장착한 사이보그가 보편화한 세상에서 인간은 노동에서 해방될 것이다. 그러나 사유재산의 불평등으로 인해 양극화는 현재보다 더 극대화 되고, 인간 세상은 파멸을 맞이할지 모른다. AI가 신유물론이 전망하는 것처럼 물의를 빚는 물질’, ‘불온한 물질로서 능동성을 발휘하여 인간처럼 또는 인간 이상의 사유 능력을 갖게 된다 해도 각자도생, 개인 책임을 우선하는 자본주의, 자유주의 사회구조 속에서는 이 구조를 더욱 강화하는 데 작용하여 자유롭게 연대하며 살아가는 사회인 인간 해방 사회로는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고깃덩이가 생각을 한다면 기계덩이도 생각할 수 있다. 고깃덩이가 수만 년 동안 진화를 거듭하면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 것처럼 기계덩이도 기술발전과 자체 진화를 거치면서 고깃덩이 수준 또는 그 이상의 생각 능력을 지닐 수도 있다. 인공지능의 자연 지능화, 이것이 로지 브라이도티가 주장한 자연-문화 그리고 문화-자연의 연속체인 포스트 휴먼이겠다. 인간과 인간 외의 자연 간 다름을 강조한다고 해서 이 둘 간의 위계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강조가 반드시 차별적인 위계 설정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탈위계는 비지배로서의 자유(공화주의적 자유), 착취와 억압에서 해방된 개인으로 나아갈 수 있다. 역사유물론과 사회구성주의를 횡단하고 젠더, 계급, 인종, 성적 지향성 등 다양한 범주의 교차를 통해 차별과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인공지능의 시대, 사이보그의 시대는 대변혁의 시대일 것 같다. 정치는 더욱더 중요해지고 더 큰 힘을 발휘해야 한다. AI와 사이보그를 통해 인간은 형벌과 소명으로서의 노동에서 해방되어 정치적인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노동 해방 이후에는 인간이 무엇을 하며 사냐고 묻는다면 답은 정치 활동이다.

유물론이라는 개념 엔진을 나는 저자의 바람만큼은 아직 제대로 장착하지 못하고 있다. “로봇의 자각 능력은 인간이 설계해서 심어 준 게 아니라 마치 씨앗에서 싹이 자라듯이 기계로부터 싹튼 것이다.”라는 문장이 󰡔신유물론 입문󰡕을 인공지능인문학 추천도서로 삼는 데 작용했는지 모른다. ‘마누엘 데란다를 자꾸 데리다로 잘못 읽은 것만큼이나 󰡔신유물론 입문󰡕을 낯설게 읽었다. 하지만 이 책 덕분에 AI를 기계, 기술의 차원에서만 보지 않고 물질개념으로 보기 시작했다. ‘유물론은 인간과 사회를 통찰하는 중심적인 사유 중의 하나이다. ‘자각하는 것, 자아가 생성되고 이를 인식한다는 것, 지능등이 물질의 논리에서 사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 나아가 신유물론AI를 인문학적으로 사유하면서 실천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 크게 공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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