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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민의 한양읽기 : 궁궐 상 ㅣ 홍순민의 한양읽기
홍순민 지음 / 눌와 / 2017년 10월
평점 :
홍순민의 한양 읽기 궁궐 - 홍순민 지음 / 눌와
부제 : 왕조국가의 중심, 임금이 사는 곳
누군가 한양 도성에 대해서 정리를 해주겠지? 하며 기다렸던 책이다.
그 누군가가 정리를 안 해준다면 내가 정리를 해도 해야겠다고 벼르던 내용이 담겼다.
최초의 도성이 만들어지게 된 정확한 경위를 알아보고 내용을 정리한 것인데~
그리 깊지 않은 수준으로 편안하게 한양도성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자료로부터 격리시켜주는 공인 지침서에 가까운 책이라고나 할까?
태조가 쌓고 태종에 의해 물러남을 강요받고, 왜 거기에, 왜 그 이름이 어떻게 붙여졌는지를 넘어서 반정과 전란 동안 겪었던 수난에 대해서도 논한다.
근거 없이 선조가 도성을 떠나는 시점 장예원에서부터 불길이 난민과 반민들에 의해서 타올랐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반박한다.
일본 장수 선봉대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가 들어오는 시점까지 도성은 무사했었노라고, 그리고 이 스토리는 선조 수정실록을 거쳐서 일제에 의해서 근거 없이 강제 유포되는 가슴 아픈 스토리도 같이 있다고 말한다.
앞으로 누구라도 조선의 법궁 경복궁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함부로 입에 담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선조의 임진왜란을 대하는 태도와 행보에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임란을 거쳐 호란까지 다양한 수모를 당한 법궁이 어떻게 자리를 옮겼고, 무슨 사연으로 이어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테마를 간단하게 정리해서 이해가 쉽다.
궁을 이야기한 책인 덕분에 임금이 움직인 동선을 따라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정릉동 행궁, 경희궁을 따라가고, 당연히 양대 난을 통해서 허물어진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을 보다가 고종의 이어로 이어지면서 덕수궁을 마지막으로 조선의 궁궐의 마침표를 찍는다.
그리고 조선의 궁궐이 마지막 커튼을 내리는 시점의 이전의 복원과 중건은 우리 문화재의 삶이 지속되므로 과거의 유산이 되고, 그 이후 훼손되거나 새로 지어진 것은 그 시대의 것이 아니라고 본다.
한 문화재의 탄생과 문화재의 마지막 시점을 정해주는 이야기는 상당히 공감이 가는 부분, 살아 있을 때 새로 짓고 뜯고 고치고 올리고 하지만, 어느 시점 이후로는 딱 그대로 보존해야 하는 시점을 정할 필요가 있을 때 그 시점을 정해주는 듯.
사람이 죽어서 DNA를 영원히 남겨주듯, 궁궐의 흥망성쇄를 지나 지금에 이어지는 것을 과거에 넘겨주는 것은 그 속의 정신을 넘겨준다고 생각하면 큰 의미가 없을 듯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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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서울의 옛 이름으로 '한양'이 있다. 한양에서 양이란 산남수북왈양(山南水北曰陽), 일지소조왈양(日之所照曰陽), 즉 산의 남쪽이자 강의 북쪽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산이란 북한산이요, 강이란 한강일 터, 한양이란 그러므로 북한산의 남쪽 기슭, 한강의 북쪽 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_ 조선을 건국하고 새 수도를 결정했던 사람들은 진정 풍수설에 입각하여 천도를 하고, 종묘와 궁궐의 터를 잡았을까? 풍수설이 그렇게 강하게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였을까? 전혀 아니라고 하기도 어렵지만, 딱히 그렇다고 하기도 어렵다.
_ 도성 안 도로는 법으로 규정하여 더욱 엄격하게 관리, 그 너비를 대로는 56척, 중로는 16척, 소로는 11척으로 정했다.
_ 2011년 7월 28일 문화재청 고시로 사적 제10호의 명칭이 "서울성곽"에서 "서울 한양도성"으로 바뀌었다. 명칭을 부여하는 기준에 맞춘 것인 줄은 알겠지만, 도성은 유일하기에 '도성'이라고만 해도 충분하고, 그것이 도성에 대한 예의를 더 갖추는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_ 중루에 누기(물시계)를 함께 설치하여 그것이 알려준는 시각에 따라 종을 쳤다. 그러나 시각을 재는 누기가 정확하지 못한 데다가 그 담당자가 착오를 일으키면 관원이나 민간인들의 도성 출입까지도 이르거나 늦는 수가 많았으므로 1437년(세종 19)에는 경복궁 안에 있는 자격루에서 잰 시각을 종루로 전달하였다. 전달을 위하여 지금의 광화문 앞에 쇠북을 설치하였다가 1459년(세조5)에는 종각을 지었다. 1440년(세종22)에 가서는 기존의 종루를 헐고 길 가운데 남향으로 동서 5간, 남북 4간에 2층으로 고쳐지어 위층에 종을 달고 아래층으로는 사람과 말이 다니게 하였다.
_ 신분제 사회인 조선시대에는 건물도 그 주인의 신분에 따라 격이 달랐으며, 명칭도 구별해서 지었다. 건물에 붙은 이름 가운데는 전자는 임금이나 임금에 버금가는 인물과 관련된 건물에만 붙였다. 궁궐이나 일반 사가에서는 아무리 높은 사람이 사는 건물이라도 임금이 아닌 한 당자나 그 이하의 합, 각, 재, 헌, 누, 정 등의 다른 글자를 붙여 격을 낮추었다. 기념비전의 이름에 각이 아닌 전을 붙인 것은 황제인 고종과 관련된 건물임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_ 경복궁 전로라는 이름은 인조신록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 후기 승정원일기에는 매우 자주 등장한다. 임진왜란에 불타버린 후로 조선 후기 내내 경복궁은 비어있는 건물이었지만,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관리되고 있었다. 여타 궁궐과 마찬가지로 임금이 사시는 지엄한 곳으로 대우를 받았다. 관원들은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앞을 지날 때 영의를 표하기 위해 말에서 내려야 했다. 왕세자도 타고 가던 가마인 연에서 내려 걸어서 지나가거나, 연을 낮추어 지나갔다.
_ 임금들이 가장 자주 그리고 오래 임어하였던 궁궐은 단연 창덕궁이다. 창덕궁에 임어한 기간이 약 62%, 창경궁은 17%, 경희궁은 20% 정도였다. 각 궁궐에 임어한 회수는 창덕궁이 37회, 창경궁이 13회, 경희궁이 31회로 창덕궁이 가장 많고 창경궁이 가장 적었다. 이러한 사실은 창덕궁이 원론적인 의미의 법궁이고, 경희궁이 이궁임을 보여주는 근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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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민의 한양 읽기 궁궐 - 홍순민 지음 / 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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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속에 간직한 임금이 사는 곳인 한양의 궁궐을 읽는다. 그 그림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다는 것은 그 주인이 어떻게 집을 짓고 어떤 삶을 살다가 어떻게 변해가다 지금에 이르는지를 알아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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