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미디어 권력이 일상을 지배하는 이유는 미디어가 전달자가 아니라 그 자체로 메시지이며, 몸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중독은 그것이 내 몸의 일부여서다. 기억은 뇌가 아니
남이 힘들게 쓴 책과 평론에 대해 단 한 글자로 더 큰 권력을 휘두르며 커뮤니케이션의 마침표는 내가 찍는다는에 중독된 이들이었다.
생각한다. 언제 어디서나 모욕이 일상인 사회다. 약자는 세상살이가 그런가보다 체념하거나 저항하지만 바로 이차 가격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까 ‘갑‘은 어떤 패악을 저지르더라도 "미안합니다." 한마디면 ‘잘 교육받은 지도층‘이다.
즉 ‘저들은 자기가 한 일을 알고 있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면, 약탈자의 깨달음 여부는 그 사회의 역량에 달려 있다. 죄는 사회적 판단이지 개인의 양심, 무지 여부가아니다. "자기가 한 일을 모르나이다?" 예수의 상황은 불리했고그래서 용서했다. 용서는 약자의 유일한 특권이기 때문이다.
정의는 그들의 교정(正)이 아니라 공동체의 정상화다. 인간이 변하는경우는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상대방이 저항할 때이고, 나머지는 자신이 고통을 받을 때다.
공부의 필요와 의미는 스스로 정하는 권리다. 사람들은 진학차원이 아니더라도 "공부해서 손해 볼 일이 없다.", "인간은 평생 공부해야 한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주부나 장애인이 공부하고자 할 때는 대도가 다르다. 이들은 사람이라기보다 역할(안마, 가사노동……)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들 자신을 위하는 일은 사회에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간은 사회의 것이다
있을 뿐이다.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올라간 것이 아니라 죽으라‘는 현실에 맞서 살려고, 이기려고 올라간 것이다. 생명을위한 절박한, 당연한 선택이다. 고공으로 도약은 투쟁 수단이라기보다 생존을 위한 최강의 에너지다.
반응은 용감하지만 두렵고 책임져야 하는 삶이다. 사람들은 "잊어라.", "신경 쓰지 마라.", "티브이 채널을 돌려라." 하며 공모한다. 매일 ‘모른 척‘ 여부를 놓고 씨름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고통에는 목적이 있음을, 고통이 없다면 위험에 처하게 된다. 느낄 수 없는 것은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 (151쪽)
심지어 동성애도 아니고, 동성애자를 반대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사람이 반대의 대상이 될 수있는가? 흑인 차별에 반대한다는 말은 있을 수 있어도, 인종 문제와 관련해 "블랙을 좋아하십니까, 싫어하십니까?" 같은 말은가능하지 않다. 나는 "동성애에 반대하는가?"란 질문이나 "좋아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질문 자체가 폭력인데 답할 필요가 있을까. 나라면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분에반대한다."고 말할 것이다. 존재와 행위는 그것이 범죄로 판단될 때만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 기준도 사회 구성원의 의식에따라 변화한다.
고난을 견디는 능력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위로하고 공감하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피해자와 잠재적 피해자들의 상부상조와 이를 지지하는 사회, 이것이 정의다. 한계를 넘는 고통 속에서도 인간이 살아남는 것은 ‘시간이약‘ 이어서가 아니다. 그 시간에 삶도 자아도 변화하기 때문이다. 없었던 일로 돌아간다는 의미의 ‘회복(回復)‘은 불가능하지만 고통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한다.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악몽일 수도 있고, 헤어진 이들과 평화롭게 다시 만날 수도 있다. .대개치유를 마음의 평화나 감정적 위안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치유는 사고 방식의 근본적 변화, 인간 행동 중 가장 인지적인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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