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서로를 무너뜨리면서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운명의 형태를 보여준다. 학교 폭력처럼 보이는 도입부는 영화 시나리오적 구성으로 빠르게 전환되며, 초등학생 시절부터 중년까지 겅중겅중 뛰어넘는 시간선 속에서 인물들의 삶은 이미 정해진 시나리오처럼 흐른다. 배우, 감독, 작가 등 영화 제작과 관련된 직업들이 등장하며, ‘모든 시간이 나에게 일어나’는 제목 그대로 주인공은 태어나기 전부터 예정된 삶의 편집 속을 살아간다.소영과 하영 그리고 소을과 나을로 이어지는 여성 서사는 반복과 변주를 통해 세대 간의 차이를 보여준다. 윗세대의 관계는 집착과 광기, 가스라이팅과 사랑이 혼재하며 서로를 파괴하는 형태로 존재했지만, 다음 세대는 같은 굴레를 답습하지 않고 더 단단한 의지로 자신만의 역할을 개척한다. 너의 전부가 되길 바라는 욕망이 구원과 파괴를 동시에 불러온다는 점에서 이 관계는 단순한 우정이나 서정적 사랑으로 규정되기 어렵다.결국 이 소설은 망한 사랑과 구원 서사를 영화적 구조로 직조해낸 이야기다. 인물들의 선택은 한 가지 방향으로 고정되지 않고, 마치 편집에 따라 전혀 다른 결말도 가능할 것처럼 열린 상태로 남는다. 윤희재 감독의 마지막 글을 통해 독자는 어디까지가 시나리오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구분하지 않은 채, 여전히 여러 가능성으로 살아 움직이는 운명의 플롯을 마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