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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책, 모비 딕
너새니얼 필브릭 지음, 홍한별 옮김 / 교유서가 / 2020년 11월
평점 :
호손의 <주홍 글씨>를 읽고,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를 읽으면서도 왜인지 <모비 딕>은 못 읽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것은, 학부 교수님조차도 문학사적으로 의미있는 작품이란 점은 확실하지만 학생들이 지루해할까봐 수업 자료로 채택하지 않으셨다고 할 때였다. 19세기 미국문학을 전공하시고 가르치는 교수님조차 <모비 딕>에 대해서는 '어디 한번 읽어봐'라는 뉘앙스로 학생들에게 시간이 되면 읽어보세요~ 라고 하시다니. 이 책은 극악무도한 난이도의 서적임이 틀림없음을 직감했다.
영제만 봤을 때는 모비 딕을 "도대체" 왜 읽어야 하는가, 왜 "굳이" 읽어야 하는가? 왜 "꼭" 읽어야 하는가? 에 대해 극과 극의 반응을 할 수 있는데, 번역된 제목은 묘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책이 사악하다니.
저자는 영문학을 전공하고 잡지사에서 항해와 관련된 책을 쓰기도 하며, 작품에도 등장하는 낸터킷 섬에서 포경선에 관한 글을 쓰는 작가이다. 항해와 글이라는 두 가지 영역에서 멜빌과 유사한 궤적을 그려나가는 사람으로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작중 배경과 멜빌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롭다. 그의 글에서는 감춰지지 않는 멜빌을 향한 존경의 마음이 흠씬 묻어난다. 나는 두려워 마지 않은 책을 최소 여남은 번은 읽었다고 밝히는 저자는 일종의 <모비 딕> 덕후일 수밖에. 그는 작중 인물 개개인과 그 외 다양한 키워드를 통해 모비 딕에 관한 통찰과 분석을 담은 에세이를 엮어 "왜 모비 딕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변을 하면서 독자들에게 모비 딕을 읽도록 매력적으로 유혹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을 읽고 나서 <모비 딕>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필브릭 씨 당신은 성공했습니다😹) <모비 딕> 속에 멜빌이 함축하고자 했던 각종 철학적 고찰과 19세기 중반 미국의 현실단상은 이해하기 쉽도록 재치있는 문체로 서술되어있다. 또한 허먼 멜빌의 삶을 되짚어 보는 순간들은 녹록치 않은 경제적 상황 속에서 세상과 스스로를 격리하고 고독하게 저술활동을 했던 그의 내면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게 돕는다.
저자가 인용하는 <모비 딕>의 문장들은 한 번 읽는 것으로는 모자라다는 생각이 든다.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간이 지니는 광기와 겸허함은 인생 어느 지점에서는 되새길만한 교훈...비슷한 것을 주는 울림이 있다. 멜빌이 우려했던 바와 달리, 출간된 지 15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은 <모비 딕>을 읽는다. 거기엔 <모비 딕>에 대한 글을 통해 담론을 형성하는 이 책의 저자같은 사람들의 공이 꽤나 클 것 같기도 하다.
시간이 흐르고, 유행이 왔다 가고, 과거는 밀봉된 세계가 된다. 과거의 사람들을 유리창을 통해 들여다보고 비웃거나, 더 나쁘게는 우리 시대의 복잡한 문제들에 시달리지 않은 좋은 시절이라며 부러워하기는 쉬운 일이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헛소리다. 삶은 삶이고, 멜빌이 <모비 딕>에서 묘사하는 세계는 우리가 우리 시대에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세상 못지 않게 최첨단이고 혼란스럽고 기이하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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