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레이트 인 재즈 - 무라카미 하루키 재즈 에세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와다 마코토 그림 / 문학사상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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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자주 다니던 길임에도 버스를 잘 못 탔다. 이 길이 맞나 어리둥절한 와중에 주차 항의 전화로 멘붕 상태에서 끝내 택시로 찾아가는데 기사님을 믿지 못하고 또 우왕좌왕...... 우여곡절 끝에 약속장소 도착, 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 어찌나 멀게 느껴지는지 집에 돌아오니 한이틀 밤샘한 기분이었다. 그저 버스 잘못 타고 길 못 찾고 욕 좀 먹은 저녁이었지만 ‘사십 넘어 길도 못 찾고 왜 이러고 사나’ 싶은 심경이 들자 스스로 참 초라하고 궁상맞게 느껴졌더랬다. 우두커니 앉아있다 눈앞에 있던 빌리 홀리데이의 음반을 켰다. 중저음의 허스키한 목소리..... 그녀의 목소리는 이렇게 얘기하는 것 같았다. ‘괜찮아. 살다보면 그런 날이 있어, 그런 소소한 일 신경쓰지 마.’ 한 인간의 목소리가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I'm a fool to want you. - Lady in satin 수록곡)

그렇게 재즈가 일상에 들어왔다. 내쳐 무라카미 하루키의 재즈 수필까지 읽어보았다. 하루키의 재즈 수필은 재즈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도, 재즈 뮤지션을 알지 못해도 재밌다. 57명의 재즈 음악가들의 삶과 사랑, 음반과 그 음반을 듣던 당시 하루키와 일본인들의 삶의 이야기가 짧은 글 속에 녹아있다. 이 책이 싱싱한 활어처럼 느껴지는 것은 와다 마코토의 그림도 한 몫을 한다. 오륙십 년대 활동한 뮤지션의 사진이 없겠는가마는 와다 마코토가 그린 그들의 모습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의 한 순간을 상상하게 한다. 잭 티가튼의 엄정한 모습이나 캡 캘러웨이 노랑 양복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호기심이 확 당긴다. 지은이도, 그린이도 10대 시절부터 재즈를 즐겨 온 이들이다. 글, 그림 모두에 재즈, 재즈 뮤지션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있다. 하루키가 들려주는 짧은 이야기는 어디로 튈런지 알 수 없어 매력적이다. 찰리 파커를 이야기하면서 버디 리치 얘기가 삼분의 이를 차지하는 식이다. 내키는 대로, 들려주고 싶은 대로 이야기는 자유로이 흐른다.

 

그들은 한 몸이 되어 쿨하고 간소하며 동시에 땅속의 용암처럼 뜨거운 리듬을의 쏟아낸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훌륭한 게츠의 연주는 천마처럼 자유롭게 구름을 헤치고 날아올라, 눈이 시릴 만큼 반짝이는 별들로 총총한 밤하늘을 우리 앞에 제시해준다. 그 선연한 꿈틀거림은 시간을 초월하여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왜냐하면 그의 노래는 사람이 그 혼 속에 은밀하게 품고 있는 굶주린 늑대 떼를 가차 없이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들은 눈 속에서 짐승의 하얀 숨을 토해낸다. 손에 잡아 나이프로 도려낼 수 있을 정도로 하얗고 단단하고 아름다운 숨을......그리하여 우리는 조용히, 혼의 깊은 숲에서 사는 숙명적인 잔혹함을 보게 된다.

 

테너 색스폰 연주자 스탠 게츠와 음악에 대한 하루키의 묘사다. 누군가의 음악을 이렇듯 아름다운 이야기로 들려준다면 들어보고 싶은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이다. 하루키가 들려주는 셀로니어스 멍크 이야기에 빠져 바로 그의 음반을 검색해보았다. ‘고독의 절실한 한 형태’라는 셀로니어스 멍크의 음악. 하루키와 같은 느낌이 오지 않더라도 어떤가? 20세기를 빛낸 고독한 한 음악가와의 만남은 21세기 고단한 삶을 사는 우리에게 무언가 또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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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수의 탄생 일공일삼 91
유은실 지음, 서현 그림 / 비룡소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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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청소년들은 7시반경 집을 떠나 학교에 가고 오후 서너 시경 차량에 실려 밤늦도록 학원 수업을 듣고 귀가한다. 시간 차는 있겠으나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의 경우 이 생활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 학교, 학원 이 틀 안에서 친구들과 놀거나 시간을 채워나간다. 부모가, 학교가, 사회가 만든 시간표에 맞춰나가다 보니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누구인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채 살아간다.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할 여유가 없는 아이들을, 무한경쟁의 불안감에 쫓기는 어른들이 키우고 있다. 세계 경제 순위 13위인 나라에 살지만 무한 경쟁체제를 내재화한 어른들의 삶의 목표는 명문대, 정규직, 노후보장이 되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열심히 살지만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른 채 내달리는 경우가 많다.

 

유은실 작가의일수의 탄생은 폭주기관차처럼 달리는 우리에게 건네는 질문지이다. 새마을 문구점 외아들 백일수는 모든 것이 특별할 것 없는 완벽히 보통인 아이다. 성격도, 성적도, 인물도 어느 한 곳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아이. 보통 아이 일수는 엄마의 기대에 눌려 늘 주눅 들어 있다. 보통 아이 일수는 더 잘나지 못해 미안하고 자신과 다른 누군가를 부러워한다. 삼십대 중반까지 일수는 학교도, 학원도, 군대도, 직장도 자신의 인생에서 스스로 결정해 본 적이 없다. 부모가, 학교가, 사회가 준 틀에서 쳇바퀴 돈다. 서예 스승의 너는 누구냐는 선문답 같은 질문에 우물쭈물 답을 내놓지 못하는 일수가 답답하지만 우리 또한 답해보았던가? 자기계발 의지와 각종 스펙으로 중무장한 채 죽을 때까지 생존 경쟁으로 치닫는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에게 까지 가지라고 말한다. 직업의 종류와 아파트 평수는 묻지만 너는 누구냐,’‘너의 좋고 싫음은 무엇이냐등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사회에서 완벽히 평범한 일수는 삼십대 중반에 이르러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늦은 질문이 삶에 무슨 도움이 될까? 가족 소통을 다뤘던 마지막 이벤트로 우리에게 즐거운 이벤트를 선사한 유은실 작가 특유의 밝고 명랑한 분위기와 가벼움 속에서 가슴을 울리는 대사는 여전하다. 일수의 탄생은 초등 저학년부터 읽을 수 있지만 정확하게는 나를 찾아 나서는 어른을 위한 우화이다. 그러니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은 오십에도 육십에도 죽는 날까지 유효하다.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것이 진정한 를 만나는 길이며 생각성찰의 길에 자주 오갈수록 충만한 삶의 결을 보여준다. 삶의 한 지점에서, 어쩌면 자주 질문하는 것은 우리가 살면서 자주 넘어지기 때문이다. 폴 발레리의 말처럼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생각하며 살지 않을때 타인의 말에, 사회적 욕망에 휘둘려 '나'를 잃게 된다. 시작이 반인 것처럼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은 늦어도 늦지 않은 법이다.     

 

p.s  일수의 탄생은 동화다. 초등 저학년부터 읽을 수 있다. 또한 일수의 탄생은 정체성을 찾아가는 21세기 한 청년의 성장기다. 어른들과 함께 나누고픈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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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미티의 은밀한 생활
제임스 써버 지음, 김지연 옮김 / TENDEDERO(뗀데데로)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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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쪽의 작은 책. 한 편의 자서전과 짧은 소설. 무려 저자가 서른아홉의 나이에 쓴 자서전제임스 써버의 고단한 삶16쪽 단편월터 미티의 은밀한 생활. 모르긴해도 독자의 반응은 ~’, ‘’,‘.......’ 이 정도로 분류되겠다. 제임스 써버(1894~1961)는 미국 중고등 교과서에 실리는 작가이며뉴스위크는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와 함께 국민 작가라 평했다. 대표적인 유머 작가인 그는 7살에 형제들과 놀다 한 쪽 눈을 잃었고 다른 한 눈은 평생에 걸쳐 시력이 저하되어 50대 이후 거의 실명 상태로 글과 그림을 그렸다. 그의 이력을 모른 채 읽는다면 그저 밝고 명랑한 사람일 것이라 여겨질 수도 있겠으니 마크 트웨인의 알고 보면 유머는 기쁨이 아니라 슬픔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천국은 유머가 없는 셈이다의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시력 때문에 또래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글쓰기와 공상에 빠져들고 대학 학위도 받지 못한 제임스 써버는 자신의 예민함과 불안을 작품으로 훌륭히 활용하였다. “재담가는 타인을 희화화하고 풍자가는 사회를 희화화하며, 유머 작가는 자신을 희화화한다.” 그의 말이다. 단편 작가들은 명랑하고 근심 걱정이 없는 줄 알고들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실제로 그들은 흠칫 놀라고 불안해하기 일쑤다. (중략).......그러한 유형의 글쓰기는 유쾌한 자기표현이 될 수 없다. 평범한 일상 가운데 불쑥 찾아오는 거대한 불안을 드러내는 것 뿐이다.’고 말한다.

그의 글쓰기에 대한 소회는 소시민의 불안한 느낌과 다를 바 없다. ‘나라가 위태로워도 잠들 수 있지만, 새벽 세 시에 식료품 저장실에서 이상한 소리라도 나면 위장까지 공포에 질린다. 전쟁의 위협은 잘 알지도 못하고 걱정하지도 않지만, 어둑해진 거리를 걸을 때면 작달막한 키에 눈이 크고 턱수염을 기른 남자들이 일렬종대로 소리 없이 뒤따라올까 봐 계속 뒤를 돌아본다. 단편 작가는 국가가 별로 선하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고, 지표면이 놀랄 만큼 줄어들고 있으며 우주가 꾸준히 냉각되고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 세 가지 문제 중 어느 하나도 자신이 겪는 문제의 절반만큼도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세계 제1차 대전, 대공황, 실명 등의 삶의 무거움과 우울을 짐짓 모른 척, 냉소어린 쉽고 짧은 문장으로 드러낸다. ‘단편 작가들의 시간이 그리 읽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독자들은 그저 작가 개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게 될 뿐이다. 그러면서 독자들은 나는 그래도 합리적이고 평화로운 삶을 살았구나!‘하는 안도감을 느낄 테니, 그게 바로 이런 글의 장점이 아닐까 싶다’. 이를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월터 미티의 은밀한 생활이다. ‘월터 미티의 사전적 정의가 평범한 삶을 살면서 터무니없는 공상을 하는 사람일 정도로 고단한 삶을 공상으로 연명하는 인물이다. 자동차 속도를 줄이라는 아내의 잔소리에 월터 미티는 해군 중령이 되어 속도전으로 밀어붙인다. 세계 1차 대전과 대공황 시기 중년 남성들의 불안과 위기를 웃음 너머 애처러움으로 표현하였다는 이 작품은 70여 년이 흐른 2013, 벤 스틸러의 영화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로 다시 태어났다. 같은 직장의 여성에게 말 한마디 못 붙이는 월터는 해본 것 없고 가본 곳 없고 특별한 일도 없다. 자신의 분야에는 전문가지만 일상에서는 멍때리며 딴 생각하는별 볼일 없는 사람일 뿐이다. 제임스 써버의 월터 미티가 공상과 냉소 사이에서 현실을 버티고 있다면 벤 스틸러의 월터 미티는 여행을 통해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해간다. 어느 쪽이든 고마운 일이다. 작가들의 상상력이 빚은 (그녀)’들 덕분에 우리는 현실을 견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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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툭
미샤 다미안 지음, 최권행 옮김 / 한마당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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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심리학자 가와이 하야오는 어린이 문학은 가장 단순한 형태로 삶의 본질을 꿰뚫고 있어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즐길 수 있다고 하였다. ‘어린이가 삶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예술작품인 그림책은 아름다운 그림과 글로 우리의 심장을 두드린다.

 

그림책, 아툭은 무자비한 상실 앞에서 슬픔과 분노, 증오와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한 소년의 복수와 용서, 화해와 사랑의 성장기이다. 아툭의 다섯 살 생일날, 아버지는 갈색 강아지-타룩과 예쁜 썰매를 선물한다. 누구보다 좋은 친구가 된 아툭과 타룩. 훌륭한 썰매개가 되라고 아버지의 여행길에 함께 보내지만 타룩은 돌아오지 못한다.

 

어린 아툭은 꼬마 자작나무보다 작아서 친구를 죽인 푸른 늑대와 맞설 수 없다. 고통 속에서 늑대와 맞서기 위해 어린 아툭은 창과 활, 썰매와 카약 타는 법을 익힌다. 마침내 마을에서 가장 훌륭한, 젊은 사냥꾼이 된 아툭. 시간이 흘러도 친구를 잃은 상실감을 잊을 수 없는 그는 마을에서 가장 뛰어난, 외로운 사냥꾼일 뿐이다.

 

오랜 시간 슬픔과 분노, 증오와 외로움을 오가던 아툭은 드디어 푸른 늑대를 죽이지만 여전히 슬프고, 외롭다. 여름 꽃이 흐드러진 툰드라, 거칠고 무서운 사냥꾼인 그가 연약한 한송이 꽃을 보게 된다. 꽃이 말을 건넨다. “동무가 하나 있으면 좋겠어. 세상이 온통 눈으로 덮여 내가 아주 오래 땅 속에서 지내야할 때, 나를 기다려 줄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어.” 꽃의 말에 아툭은 창을 자기도 모르게 스르르 놓아버리게 된다. 오랜 시간 슬픔과 분노, 외로움 속에 잠겨 있던 그가 마음을 여는 순간이다.

 

1995년에 처음 소개된 이 책을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눈물을 흘린 순간을 잊을 수 없다. 25쪽의 짧은 책이지만 어린 아툭 앞에 닥친 무자비한 이별, 긴 시간 그의 삶에 새겨진 슬픔, 분노, 고통과 외로운 시간들. 친구를 위해 최선을 다한 단련의 시간을 보낸 아툭은 슬픔과 분노, 증오와 외로움 속에서 훌륭한 사냥꾼이 되고 늑대를 죽였을 때, 세상에서 가장 약한 한송이 꽃과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표지는 슬픔에 찬 아툭이 주먹을 꼭 쥐고 꼬마 자작나무 앞에 서 있는 모습이다. 작고 약한 아툭은 친구의 죽음이란 상실을 겪으며 (몸도 마음도) 단단하게 성장하고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를 기다리고 지켜줄 수 있는 청년이 되었다. 우리네 삶은 고비와 장애의 연속이다. 돌부리에 채이고 넘어지고 일어날 수 없다고 느끼지만 세상을 함께걸어가기 위해 가장 약한 존재부터 챙기는 힘. 그 마음의 힘은 슬픔과 분노, 증오와 외로움 속을 잘 견뎌 오고, 견뎌갈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두 개 출판사에서 출간된 이 책은 표지 그림이 다르다. 한 곳은 어린 아툭과 꼬마자작나무이고 다른 한 곳은 젊은 사냥꾼과 꽃이다. 개인적으로 꼬마 자작나무와 어린 아툭에 더 눈이 간다. 어리고 무기력하지만 꼭 쥔 작은 주먹으로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결의에 찬 모습. 그 모습이 지금 우리 모습만 같다. 큰 재난에 나라 전체가 큰 슬품에 잠겨있다. 무언가 해야 하는데 상실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지금보다 앞으로의 시간이 더 힘들 듯하다. 오래 견뎌야 할 슬픔과 분노, 외로움을 누군가와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조금은 더 나아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이 책을 다시 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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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으로 충분하다 - 정신과의사 정혜신의 6주간의 힐링톡
정혜신 지음 / 푸른숲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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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지인이 전화했다. 일하면서 겪은 억울한 일(?!)이 잊혀지지 않아 아침마다 괴롭단다. 남편과 이야기하면 좀 나아지나 싶다가도 분하고 억울한 생각이 새록새록 솟는단다. 지인에게 사건이 문제가 아니라 사십대의 성장통(?)이 아니냐 물었다.

 

환경은 변한 것이 없는데 자신이 무기력하고 쓸모없다는 느낌이 떨쳐지질 않는다. 지인이 느끼는 무기력감이 사십대가 치르는 호된 성장통으로 느껴지는 것은 몸이 예전 같지 않은 지금 젊은 시절 삶의 방식을 고수하다가는 ‘과로사’ 에 직면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오기 때문이다.

 

몸이 자신에게 보내는 경고, ‘더 이상 이렇게 살지 마’.

 

경고에 지혜로운 반응은 나이에 어울리는 리액션을 새롭게 배우는 것일게다. 목표라는 이름으로 내달리게 만들었던 욕망의 방향을 조금씩 바꿔 사십대 이후의 삶을 건강하게 가꿔가는 것이다. 그래서 정혜신의 ‘당신으로 충분하다’라는 제목은 가슴을 아릿하게 만든다. 더 할 무엇도, 바꿔야 할 것도 없는 이것으로 충분한 나. 부족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좌충우돌 살아낸, 최선을 다한 이 존재로 충분함을 가슴으로 받아들인다면 중년의 훈훈한 일상을 꾸려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충분함은 어디서 올까? 누군가 줄 수 있는거라면, 구입 가능한 품목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깝게도 ‘충분함’은 삶에 박힌 응어리를 풀어내면서 시작되고 그 과정에서 더한 번민과 괴로움을 대면할 수도 있다. 대신할 이 없이 혼자 겪어야 하는 과정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당신으로 충분하다’는 24년간 1만 2천여 명의 사람들과 만나 상담한 정혜신 박사와 4명의 6주간 의 집단 상담 기록물이다. 우리 삶의 은밀한 부분을 과연 낯 선 이들과 공유할 수 있을까 싶지만 ‘이야기’의 힘은 크다. 고인 물은 썩을 수밖에 없듯 어딘가에 고여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이야기도 풀어내야만 한다. 일대일 상담과 달리 집단 상담이 의미가 남다른 이유는 서로에게 ‘상처 입은 치유가(wounded healer)'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같은 상처가 아니라 하더라도 당사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공감‘하는 것은 전문 치유사들의 몫이기도 하지만 당대의 삶을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의 공감도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몇 년 전 자기계발의 열기가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다 그것의 피로반응인 듯 도처에 ’힐링‘이 넘쳐나고 있다. 넘쳐나는 ’힐링‘으로 치유 메시지가 진부해졌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넘쳐나는 ’힐링‘은 우리 사회에 상처 입은 이들이 많음을 방증하기도 한다.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이, 누군가를 밟지 않으면 밟힌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사회가 입히는 내상은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크다. 혹자는 먹고 살기 바쁘면 그런 생각할 겨를도 없을 것이라 하지만 우리 삶은 이미 ’먹고사니즘‘을 해결하는 것만으로 채워질 수 없다. OECD회원국으로 세계 13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우리 사회는 커진 외피에 비해 내면의 풍족함을 채우는데 인색하다. 그 인색함의 결과가 ’힐링‘이란 단어로 가득 찬 우리 사회일 것이다. 존재 그 자체로 , 더할 나위없이 충분한, 충분할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한다. 아놀드 토인비의 말에 따르면, 인류의 미래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 내면의 깊이를 발견하고 그 내면에서부터 타인을 도울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얼마나 끌어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한다. 당신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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