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않을 이야기 - 팬데믹 테마 소설집 아르테 S 7
조수경 외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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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잘 쓰여진 글이라 더 처참하다. ‘재난’을 주제로 하는 4개의 단편 소설이고, 전염병과 성폭력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포함되어 있다. 읽는 내내 울화가 치밀고 어지럽고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현재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이고, 해결되지도 않은 상황이고, 해결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마음아프고 짜증이 난다.

특히 두 번째 이야기인 김유담 작가의 <특별재난지역>은 정말 읽으면서 엉엉 울고 싶었다. 진짜 총체적 난국이라는 말이 완벽하게 들어맞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화자인 일남은 직접적으로는 사건의 대상이 되지는 않지만. 일남의 아버지, 남편, 자식들 그리고 손녀까지 모두 끔직한 사건의 피해자들이다. 그 가운데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일남의 모습이 절절하다. 이 이야기는 ‘힘내라!’라고 쓰여진 카드가 팔랑팔랑 떨어지는 장면으로 마무리가 된다. 이미 피해자들이 입은 상처는 회복이 불가능한 정도인데, 어떠한 이해도 없이 가볍게 ‘힘내라’고 하는 건 또 얼마나 폭력적이고 깊이없는 처사인지.

그렇지만, 이렇게 끔찍하고 진저리나는 이야기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최대한 많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단순히 “그런 일이 있었대”하고 끝나는 정도가 아니라, 바로 옆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끝없는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확인하길 바란다.

+ 사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업무가 미성년/청소년 혹은 지적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성범죄에 대한 일인데, 정말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에 대한 혐오만 쌓이는 것 같다. 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범죄는 인간으로 남기 위한 마지막 기회를 저버리는 일이다. 그러데 심지어 N번방처럼 인간이기를 포기한 생명체(욕을 쓰고 싶었으나 참습니다. 숨은 쉴테니 아직 생명체는 맞겠죠 뭐)들의 사건도 이렇게 해결이 안되는데, 내가 보고 있는 사건들처럼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조차 받지 못하는 무수한 일들에는 무슨 희망이 있나 싶다.

[ 책수집가 활동을 통해 출판사 아르테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솔직한 서평입니다. ]

최근에 깨달은 나의 가장 큰 장점은 질기다는 거였다. 강하기보다는 질긴 것. 어쩌면 강한 것과 질긴 것 중 살아가는 데 더 필요한 건 질긴 것인지도 몰랐다. - P20

"엄마, 아들한테는 이런 거 대놓고 해달라고 못하죠? 왜 마스크 구해 드리는 건 딸이니 며느리여야 해요?"
"상진이 갸는 지금 바쁘다 아이가, 당장 시험이 코 앞인데."
상희가 쿄웃음을 쳤다. - P64

휴대전화를 쥔 일남의 손이 덜덜 떨렸다 .보이스피싱으로 돈 보내달라 카는 사기꾼들 이야기는 들어 봤어도, 열 살짜리 가스나 알몸 사진이 와 필요하다 카노, 이거는 듣도 보도 못한 기라. 숭악한 놈들, 고얀 놈들. - P88

"근데 엄마가요. 이 사진 우리끼리 비밀이라고 했는데, 엄마 말 안 들으면 학교 친구들한테도 사진 다 보이줄 꺼라고. 우리 학교 홈페이지에 올린다고 했어요. 우리 집 주소도 다 알고 있다 했는데." - P88

아니, 일남은 처절하게 버려지고 고립된 기분이었다. 일남은 한 팔로 무릎 위에 올려진 부친의 유골함을 세게 끌어안았고, 나머지 팔로는 곤하게 잠든 가영의 어깨를 감쌌다. - P100

"예진이는...... 그런 일 겪으면 안 돼."
신 선생님도 그런 일 겪어선 안 되는 거였어요.
예진이는 안 되지만 신 선생님은 겪어도 괜찮은, 그런 일이 아니었다고요. - P143

(해설) 확진자 동선이 공개되며 개인 정보가 공개되고 그로 인해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의 인권이 무책임하고 무차별적인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전염 사회를 지나며 우리가 보았던, 기억해야 할 폭력이 아니었던가. 집단 방역을 위해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더라도 공통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안전을 위협받아도 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파운데이션으로 잠시 덮어둔 슬픈 침묵을 기억해야 한다. - P198

(해설) 바이러스에 가장 취약한 대상인 노인과 디지털 성착취에 가장 취약한 대상인 미성년 여아들을 함께 배치하는 작가의 의도를 우리는 피할 길이 없다. 일남의 아버지가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의 ‘죽음’고 비교할 때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의 고통은 조금도 가볍지 않다. 그 역시 죽음이라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바이러스의 빠른 확산세와 함께 운명을 달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목격되던 그때, 특정되지 않은 디지털 재난 공간에서 수많은 여학생들의 인격도 죽어갔다. 코로나19와 함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폭력이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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