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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김열규 지음 / 궁리 / 200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서평을 적는 본인은 죽음에 대한 비관론자가 아니다.죽음!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 본 테마일것이다.저자는 서구의 학자들의 죽음에 대한 사유를 탐색하여 한국인의 죽음에 대한 가치관을 말하고 있는 작품이다.이책으로 나는 또다시 죽음에 대한 몰입적 사고를 가지게 하였다.죽음이 이렇게 엄연한 현실이며, 인간의 최대의 관심거리이며, 모든 철학과 삶과 문학과 예술의 가장 깊은 신비적 대상이면서도 현대인들은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려하지 않으며 죽음을 터부시 한다.
그동안 현대 문명사회, 특히 서구 문명사회에서는 죽음에 대하여서는 가급적 말을 않으려고 했다. 죽음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터부시하고 침묵을 지켜왔다고 말 할수 있을 것이다.서구사회에서 장례식은 지극히 제한된 식구나 친지의 일부가 모여 성직자의 종교의식에 따라 진행할 뿐이다. 아시아의 문화처럼 죽음의 장례가 삶의 커다란 통과의례가 되지 못하는 감이 있다.
그러나, 서구사회도 근대 이전 까지는 죽음이 삶과 긴말한 관계 속에서 운위되어 왔다. 그런대, 현세적 삶에 인간의 거의 모든 관심을 기울이게된 근세 계몽주의 시대 이후, 죽음의 문제는 삶의 변두리문제로 몰려나게 되었다. 인간이 죽음을 그의 전체 삶에서 도외시하고 소외시키면, 삶 그 자체도 비인간화되고 소외된다. 죽음은 본래적인 큰 삶의 일부분이며, 인간사회를 보다 인간다운 얼굴을 지닌 사회로 조성하는 인간의 근본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땅 위에서 가지고 살던 혈과 육으로 구성된 생물학적인 유기체로서의 몸이 그대로 지속하는것은 아니라고 난 생각한다.하늘에 속한 몸과 땅에 속한 몸의 영광이 다르다고 말하고 있으니,요사이 표현으로 하면 그 생명체의 존재방식과 구성원리와 구성체의 소재가 다르다는 말이다. 다시 간단하게 정리해서 말하자면,소크라테스나 사도바울이나, 영혼이 불멸한다 는 명제적 신념은 동일하지만, 그 불명성의 근거와 몸에 대한 신념이 다른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서는 인간 영혼자체가 지닌 불멸적 속성 때문에 불사하여 영존한다는 철학적 신념이지만, 바울은 모든 생명의 근원자이시며 지탱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영적 생명체를 선물처럼 벌거벗는 무와 같은 인간영혼에 덧입혀주시기 때문에 불멸적 영생의 생명을 지속한다는 이스라엘 전통의 신앙이 나는 문득 떠올랐다.
죽음을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이야기하는 책속의 학자들보다는 소박하게 살면서도 죽음의 두려움을 훌쩍 뛰어넘고 위대하게 살고가는 수많은 보통사람들을 난 보게 된다. 자기의 죽음뒤 시신을 화장시키지 못하게하고, 평소빚지고 살았던 산속의 생물들에게 먹이가 되도록 공양하는 선승(禪僧)들의 초연한 자세, 의학발전을 위해 해부학자료로 시신을 기증하라고 유언을 남기는 사람들, 장기이식자들은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다. 그에 비하여 수많은 독재자들과 그 추종자들이 시신을 방부제로 처리하여 기념관 속에서 항구보존하려는 작태는 자연의 순리에도 어긋날 뿐아니라, 매우 역겹고 추해보인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삶에 대한 집착과 긴밀한 관련이 있고 따라서 죽기 전에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현세의 삶의 방식을 왜곡하고 각종의 부조리를 낳을 수 있다. 또 지나친 사후 세계의 존재에 대한 신념은 우리 자신의 현재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 뿐이다. 우리는 현재의 삶을 보다 충실하고 아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죽음을 직시해야 한다. 죽음이란 호흡이 정지하고 심장 박동이 느려지며 마침내 세상과의 단절을 꾀하게 되는 그런 단순한 과정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평소에 이런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하고 서로 대화하는 과정을 가짐으로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완화하고 얼마든지 평화롭게 삶을 마감할 수 있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이라고 해도 친구나 선생님, 부모님의 조언을 많이 얻고 충분히 준비함으로 해서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죽음도 이와 마찬가지다. 지나치게 죽음을 두려워하고 현세의 삶에 집착하며 죽음에 대해 쉬쉬하는 것은 오히려 죽음에 대한 더 큰 두려움을 가져올 뿐이다.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죽음과 보다 친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