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단장 죽이기 2 - 전이하는 메타포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루키는 그림이나 사람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무언가, 혹은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통해 사물은 존재가치를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나'는 본래 타인의 본연의 모습을 찾아 보여주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초상화와 그림이란 사진이나 거울과는 달리 단지 반사나 껍데기를 담아 놓는 게 아닌 그 사람의 인간 자체의 생명의 온기가 들어있다. 그는 초상화를 통해 타인을 그리고 타인을 찾아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신을 잃어버리고 선택하지 않은 자신만이 있게 되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물리적인 반사지만 그가 그리는 그림은 진짜 사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가 선택하지 않고 바라지 않는 그림들이 나오게 됨으로 인하여 혼돈을 겪는다.

'나'는 자신만의 작품을 하고 싶은 사람이었지만 뜻밖에도 그의 재능은 타인의 얼굴을 일정한 방식으로 찍어내는 기술적인 초상화의 영역에 재능을 가졌다. 그는 그림에 대한 열정이나 특수성을 잃어버린 채 이미 같은 얼굴을 가져 얼굴이 없는 초상화를 복사하는 생활에 물들었다. 사실 그는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 바다보다 매 순간 새로운 모습을 보이는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그는 새로움과 사물의 변혁, 특수성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나 초상화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특징을 잃어버렸다. 그는 사람의 인생을 요약하여 초상화를 그리며 그의 언어 습관조차도 상대방의 말을 요약하여 정리하는 버릇이다. 그는 무언가를 새로이 만들기보다 정리하고 그대로 요약하며 반복한다. 변함없이 반복되고 특징이 없는 그에 질린 그의 아내는 그를 견디지 못해 이혼하고 다시 재혼한 9개월의 기간 동안 찾은 산장에서 그는 물리적 일정함과 기준이 흐트러지는 체험을 한다.

아마다 도모히코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의 한 장면 '기사단장 죽이기'를 일본의 화풍으로 번역해 그려놓았다. 번역이란 해당 작품의 복제가 아니다. 번역은 다른 문화, 다른 기술로 만들어 놓은 작품을 해당 언어와 문화에 어울리게 해석하여 새로운 작품으로 존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새롭게 해석한 예술품, 또는 작품은 그 자신으로 가치를 지니며 존재의 필요가 된다. 거울이나 사진의 물리적인 반사가 아닌, 새로운 그림과 작품이 된다. 초상화도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얼굴과 본연을 끄집어 내어 새로운 독립적인 작품으로 만들어 놓는 창조적인 작업인 것이다. '나'는 상대방의 내면을 파악해 그리는 재주를 가지고 있는 만큼,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기계적인 반복에 의한 그림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인간을 통한 독립적인 창조물이다.

일본화는 특정한 도구를 사용하며 일본화의 정신성을 중요시하지만 서양화의 난입에 의해 생활물품에서 예술품으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탓에 고정된 틀이 없이 자유롭다. 초상화는 상대방의 영혼을 깎아 그림에 집어넣어 영속을 만드는 과정이다. 그러자면 그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결정적인 정신세계가 그림에 표현되어야 한다. 내면을 찾아 넣는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자신도 모르는 것을 그리는 것을 말한다. 그가 그동안 해온 프로 초상화 작가로서의, 상대방이 원하는 무언가를 그리는 게 아니라, 멘시키의 여러 모습을 작가의 내면에서 찾아 그대로 표현하게 되었다. 즉, 진정한 상대의 정신적 세계를 발견하는 건 상대방이 아는 것, 그리고 알지 못하는 것을 상대와의 관계속에서 알아내고 땅속 방울의 울림처럼 내면에서 듣고 찾아내어 자신의 내면세계 속 무의식 속에 특수한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일본화에서 중요한 건 여백이다. 여백이 그림을 결정하고 사용하지 않은 공간에 따라 변화한다. 돌고래는 좌우의 뇌를 번갈아가며 사용하며 여백을 주고, '나'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다. 여백이 없는 멘시키와 같은 삶은 포석을 두며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며 머리와 사물을 총동원해 여지와 여유를 없앤다. 때문에 그는 다른 것과 사람을 때로는 부러워하고 숨기고 자아를 시종일관 움직여 자신에 대한 불안을 없앤다. 자아가 고정되기 위해서는 오히려 공간이 필요하다.

현실과 비현실은 미묘한 경계선에 존재한다. 이카루스의 날개가 녹아떨어지는 것고 태양을 향해 얼마나 날아가느냐에 있으며 삶과 죽음에 대한 공포도 마찬가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을 때도 어둠이 주는 공포에 먹히면 공포가 되고, 먹히지 않는다면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자기만을 위한 방이 된다. 양면이 주는 경계선이란 땅에 산 채로 묻어질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죽지 않은 채로 죽음에 가까워지기만 할 때의 공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때로는 모르는 게 나은 진실이 존재한다. 알게 됨으로 흔들리지 않는 진실에 받는 충격보다, 모르기 때문에 흔들리며 불안정함이 더 필요한 상황이 있다. 그리고 그 사물의 본질은 꼭 언어화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비유화 그림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게 바람직하며, 은유와 암호조차도 보이는 그대로 이해하는 게 좋다. 구덩이에 들어간 멘시키를 가두어두려는 의도가 조금이라도 생기지 않는 그는 누군가를 이기려 하거나 부러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그는 힘들어하기는 하지만 나름의 돌파 방법을 가지고 있고 타인의 진정한 내면을 바라보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이는 얻고 싶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나'가 가진 그림이나 사물의 내면을 바라보는 법,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것 등 그는 타인에게 주어지지 않고, 원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는 상대방을 읽고 타인도 알지 못하는 자신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타인에 의해 자신이 표현된다는 건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알고 싶지 않은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지만 모르는 게 나은 진실이 존재하고, 마찬가지로 모르는 게 더 좋은 자신의 모습이 있기도 하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데아는 시공을 초월한 인간의 의식을 뛰어넘는 정신적인 형태의 완성형이다. 이데아는 인식 저편에 보이지 않지만 보여야 하는 무언가를 담고 있으며 하루키는 그를 인간 각자의 주관에 따라 인과의 흐름에 맞추어 귀결되는 정신세계라고 표현한다. 인간은 유물론적인 물질과 관계없이 이데아로서의 정신세계가 들어 있으며, 주인공은 그 이데아의 모습을 보고, 거울 저편에 있는 그 사람의 진실된 모습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이다. 유물론적 세계관의 끝에 있는 사람은 멘시키이고, 그는 그런 '나'를 마음 한켠으로 부러워한다.

작가인 아마다 도모히코의 세계 속에서 2차 세계대전과 난징 대학살을 겪으며 애인과 동생을 잃고 고문을 당한다. 그에 따라 도모히코는 자신의 생명을 담아 일본화된 '기사단장 죽이기'를 그린다. 마찬가지로 그림을 그리고 동생을 잃어버린 '나'는 인과에 이끌려 도모히코의 집에 들어와 '기사단장 죽이기'와 '이데아'를 꺼내버린다. 그 과정에서 그린 멘시키의 초상화와 여동생을 떠올리게 하는 마리에와의 만남 또한 인과에 의해 발생되었으며 기사단장을 칼로 찌르고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를 만나는 것 또한 그 과정에서 마주해야 할 '나'의 또 다른 정신세계다. 

'나'에게 필요한 건 자신의 독특성에 대한 깨달음과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일이었고, 아마다 마사히코의 '기사단장 죽이기'와의 만남은 그에게 특수한 경험과 의미를 주었지만, 오히려 그가 알게 된 건 현실과 증명할 수 있는 현상, 아내인 유즈에 대한 애정, 그리고 자신의 초상화에 현실의 의미를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마리에에게도 마찬가지다. 난징대학살의 고통을 담은 마시히코의 그림은 생령을 불러올 만큼 거대한 담론이 되고 진실은 여전히 꺼내지지 않지만 시공을 뛰어넘은 이데아의 세계에서 인과에 따라 의미를 가진다. 감추어져 있지만 표현되고 싶은 사실이 있고, 표시되어 있지만 감추고 싶은 사실도 있다. 또한 감추어져 있는 걸 꺼내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 이데아의 근원이 타인의 의식에 존재하는 것처럼 자신의 또 다른 이면과 진실, 감추어진 사실도 인식과 함께 존재한다. 누군가가 무언가를 읽고 인식된다면 그걸 사라지게 만들거나 없던 일로 하는 건 상당히 어렵다. 때문에 중요한 건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과 드러내야 할 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알아야 하는 것과,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보는 것, 그리고 진실이 드러날 때를 알아보는 것 말이다. 사실을 아는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만큼의 위험부담이 따른다.

'나'는 부담과 이데아, 메타포의 상황에 시달리다 다시 현실로 들어가지만 그 현실은 사건 발생 전의 과거와는 다르다. 그는 사물과 사람의 내면을 바라보는 자신을 깨닫고 있고, 덮어둔 그림도 언젠가는 다시 꺼내서 그릴 것이다. 인지된 사실은 결코 인지가 되지 않았던 것과 똑같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이 정반대로 뒤바뀌는 일은 어지간해서는 벌어지지 않지만 개인이 멈추지 않는다면 인과에 따라 세상은 어느덧 모습을 바꾼다. 그럼에도 역시 인생도, 인간도 어디까지나 완성되는 일은 없지만 말이다. 현상을 덮어 놓아도 그 안에 진실된 이데아는 제 모습을 한 채 숨어 눈을 뜨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 방울 소리를 들려준다. 그래서 중요한 건 내면을 바라보고 표현하려는 개인의 노력과 필요할 때 필요한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바라봄이다. 그를 알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전과 조금은 바뀐 채로 새롭게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렇게 기사단장은 현실과 비현실 사이 어딘가에 존재해 어느 땐가 모습을 드러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