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카토르는 이렇게 말했다
마야 유타카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이상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J라고 하겠다. 지금은 연락도 안 하는. 우연히 마주쳐도 인사를 나누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인사 나눌 일은 없을 것 같은 친구. 내가 J에게 학을 떼게 된 사건은 이러하다. J와 나를 포함해 총 6명의 스무살 청춘들이 호프집에서 맥주를 나눠마시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도 아니고 서로의 집도 뻔질나게 드나들어 뭐 특별할 것도 없는 친구들이다.  

 

"어, 핸드폰 어디갔지?"

"나한테 있는데?" J가 말했다.

"왜 네가 가지고 있냐. 내놔."

"잠깐만, 나 문자보냈어."

"잉? 누구한테? 니 폰으로 보내지 왜 내 폰으로 보내?"

"니 친구한테 보냈으니까. M이 누구냐?"

"M? 너 지금 M한테 문자 보낸 거야?"

"응. 나 일산인데 뭐하냐고, 밥 사달라고."

 

M은 대학교를 같이 다니는 친구인데, 그때 막 사이가 소원해진 참이었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밥 사달라고 할 사이가 아니었다. 곤란했다. 핸드폰을 뺏으려고 했지만 그 친구는 180이 넘는 거구에다 힘도 무척 센 바람에 난 버둥거리는 꼴이 되었다. 놀리 듯이 이죽거리던 그 입술이 지금도 생각난다. 실실 웃으며 나에게 핸드폰을 주었다. 보낸 문자함을 살펴보니 6.25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더라. 고등학교 1학년 때 동아리 들었다가 바로 뛰쳐나왔는데, 그 동아리 선배, 우리 과 선배언니, 얼굴도 못 본 친구의 친구 등등. 너무 화가났다. 나에 대한 배려는 눈꼽만큼도 없는 이 J라는 친구한테.

 

J의 말이 더 가관이었다.

"너 핸드폰에 누구 번호 저장해놓는데?"

"아는 사람들. 필요한 사람들."

"그렇지? 다 너가 생각하기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 저장해놓은 거 아냐. 그러면 문자 하나 보내도 되는 거 아냐? 문자도 못 보낼 사람들 번호를 왜 저장해놔? 나중에 연락하려고? 왜 나중에 연락해? 지금 연락해! 밥 사달라는 이런 간단한 문자도 못 보낼 사람들을 저장해놓으면 안 되는 거 아냐?"

"난 지금 이 사람들한테 밥 얻어먹을 생각이 없고, 만나고 싶지도 않아. 왜 내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이렇게 무례하게, 네 멋대로 행동하는데?"

"이상하네, 만나기 싫으면 번호 지우면 되는 거 아냐? 왜 번호를 이렇게 저장해놓는 건데? 300명도 넘게 왜 저장해놨냐고. 간단하게 밥 먹자고도 못 할 사람들을 말이야."

"그럼 네 핸드폰에는 다 언제든지 연락해도 될 사람들밖에 없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내 핸드폰이고 내가 저장해놓고 싶은 사람 저장해놓는 건데 왜 행패야. 사과해."

"네가 사과해야지 나한테. 너가 괜히 주변에 사람 많은 척하느라 핸드폰에 필요하지도 않은 사람들 저장해놨잖아. 내 핸드폰엔 언제든지 만날 친구밖에 없어. 난 당연히 너도 그럴 줄 알았지. 근데 친구들 앞에서 이렇게까지 소리를 질러야 했냐?"

 

할말이 없었다. 말을 더 해봤자 안 통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속에서 천불이 일어나고 그때 말문이 턱 막혀버려서 너무 아쉽다. 난 핸드폰을 그애 손에서 뺏고 가방을 챙겨들고 나왔다. 나머지 친구들한테 인사도 안하고 그냥 뛰쳐나왔다. 손에 든 전화기에서 전화와 문자가 쉴 새 없이 울렸다.

 

'누구세요?'

'어이가 없다 너.'

 

정 없는 문자들. 내가 반말로 찍 날린 문자를 보고 당황한 선배가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어보려 걸려온 전화. 나는 간단하게 해명을 하고 공원에 앉아 열을 식힌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 여름날 밤은 정말 더웠다.

 

그때 느꼈던 답답함을 난 책을 끝까지 마저 읽고 또 느끼게 되었다. 말문을 턱 막아버린 궤변. 뭔가 이 사람만의 논리에 나마저 휩쓸릴 것 같은 혼란스러움. 사설이 너무 길었지만 이건 책을 읽고 난 후기다...

 

 

 

 

사실 난 모든 범죄에는 범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증거가 있는 살인일 경우에는. 그래서 <메르카토르는 이렇게 말했다>에 실린 첫번째 단편을 읽자마자 혼란스러웠고 장난하나 싶었다. 예쁜 표지와 고급스런 싸바리에서 얻은 그 너그러운 감정은 첫번째 단편을 읽자마자 사그라들었고 두번째 단편을 읽을 때에는 '어디 뭐라고 하는지 끝까지 들어나보자'라는 마음이었다. 그래, 메르카토르. 끝까지 이런 식이냐. 두고보자.

 

메르카토르는 예명일까. 윤곽이 또렷한 얼굴의 혼혈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띄며 말했다.

"당신은 행운아군요. 내가 왔으니 사건은 해결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엄청난 자신감이다. 입이 딱 벌어졌다.

 

두번째 단편에선 뭐 이런 잔망스러운 탐정이 다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다니는 동료, 아 나는 동료라고 생각했는데 메르카토르는 동료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 같긴 하지만, 그 동료를 완전히 물먹이는 이야기였다. 첫번째 이야기보다 훨씬 타당했고 훨씬 긴장감 있었으며 훨씬 논리적이었다. 이것이 바로 추리소설이지! 하며 무릎을 탁 쳤다. 여태껏 그려왔던 그림을 뒤엎는 마지막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흠, 너도 퍼즐을 해?"

"여러 조각이 단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는 과정은 재미있지만, 논리 없이 인내심만으로 아무나 할 수 있는 작업은 사양이야."

메르카토르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휘말려버린 것이다. 두고보자던 사람 하나도 안 무섭다더니 내가 꼭 그 꼴이었다. 정신차리고 다시 읽어보자. 그렇게 읽은 세번째 단편에서도 난 수긍해버렸고, 그 뒤에 이어진 작품들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덮었다. 내가 귀 얇은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로 팔랑귀일 줄은 전혀 몰랐는데..... 어느새 메르카토르의 궤변에 놀아났고, 설득당했다. 보통 책을 읽으면 주인공한테 감정이입을 하게 되기 마련인데, 나는 메르카토르 옆에 있는 미나기에 이입이 되어버렸다. 메르카토르 욕을 하지만 그래도 감싸안게 된 것이다. 어떻게 반감과 불쾌함을 이렇게 호감으로 바꾸어버렸는지 모르겠다. 내가 좀더 똑똑하고 좀더 추리력이 있다면, 메르카토르의 말문을 막아버릴 뛰어난 추리를 내보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은 메르카토르는 나에게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냥 메르카토르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이런 것이다. 수긍할 수밖에 없다.

 

메르카토르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씩 웃었다. 뱃속에 능구렁이가 백 마리, 아니, 천 마리는 들어앉아 있는 듯 능글맞은 미소였다.

메르카토르는 이렇게 말했다. 내 말이 곧 답이다.

 

난 7년전 다시 그 여름날 밤으로 돌아가도 더이상 아무말 하지 않을 것이다. 말 해도 소용 없으니까. 메르카토르 말이 곧 정답이듯이, 그 J라는 친구에겐 그의 말이 정답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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