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만화로 읽는 세계문학' 시리즈 같은 책으로 『호밀밭의 파수꾼』을 비롯해서 『데미안』『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수레바퀴 아래서』 같은 고전을 많이 읽었다. 머리가 크고 나서 다시 꺼내들었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얼마나 놀랬는지. 초등학교 때는 전혀 깨닫지 못했던 다양한 메시지들이 담긴 걸작 중에 걸작이었다. 『데미안』도, 『수레바퀴 아래서』도 진지한 작품이었다! 이런 걸 만화로 읽고 읽었다고 말하고 다녔다니... 얼굴이 붉어진다.



이번에 읽은 『프래니와 주이』는 사실, 처음 들어본 작품이었다. 『호밀밭의 파수꾼』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작품인 거 같았는데,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호밀밭의 파수꾼』이 샐린저의 가장 유명한 책일지는 몰라도 『프래니와 주이』를 그의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꼽고 싶다'고 극찬을 한 작품이다. 전체적인 주제는 『호밀밭의 파수꾼』과 비슷하다.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 내면에서 치고 올라오는 삶에 대한 의문과 제대로 살고 싶은 스무살 젊은이의 고민. 그리고 기성세대에 대한 날선 비판과 은근히 묻어나오는 샐린저식 유머까지. 왜 <가디언>이 극찬을 하는 작품인지 알 수 있었다. 『호밀밭의 파수꾼』보다 진지하고 깊다.



프래니와 주이는 글래스 가문 일곱 남매 중 여섯째와 막내다. 막내인 프래니는 남자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신경증에 걸린 사람처럼 행동한다. 자기 입이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자기 머리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 연극을 전공하는 그녀는 갑자기 연극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에고이스트' 같다며 무차별적으로 비판을 해댄다. 프래니의 남자친구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데이트를 엉망으로 마친 다음날, 프래니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울고만 있다. 오빠인 주이는 그런 프래니가 걱정된다. 주이는 엄마인 글래스 부인과의 길고 긴 대화 끝에, 프래니에게 자신이 겪어왔던 삶이란 것을 이야기 해준다. 오빠 주이 역시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주연을 맡은 연기자이기 때문에 프래니가 하는 고민들을 똑같이 해왔기 때문이다. 조금은 신랄하게, 하지만 걱정이 담뿍 담긴 조언을 해주고 프래니는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님을, 자기가 자기일을 열심히 할 때 그 의미도 찾을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남매는 각자 삶의 의미를 찾게 되고 무사히 잠에 들 수 있게 된다.

 

 

"나는 경쟁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야. 모르겠어? 난 내가 경쟁을 하려 할까봐 두려워. 그게 바로 내가 겁내는 거라고. 그래서 내가 연극 전공을 그만둔 거야. 내가 다른 모두의 가치를 받아들이도록 끔찍하게 길들여졌다고 해서, 내가 갈채를 보내고 나를 극찬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게 옳은 것이 되는 건 아니야. 난 그게 부끄러워. 신물이 나.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용기를 갖지 못한 것이 신물이 난다고. 화려한 평판 같은 것을 바라는 나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에게 신물이 나.”


“너는 왜 그렇게 허물어져버린 건데? 그렇게 힘껏 허물어져버릴 수 있다면 왜 그 힘을 자신을 제대로 열심히 지탱하는 데 쓰지 못하는 거냐고!”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적인 일은, 연기야. 원한다면, 신을 위해 연기하고, 원한다면 신의 배우가 되어봐.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게 또 있겠어? 원한다면, 적어도 노력은 해봐. 노력하는 건 괜찮잖아.”

 

 

 

 

엄마가 끓여주는 닭고기 수프



까칠한 여섯째와, 울고만 있는 일곱째를 둔 엄마 글래스 부인의 심정은 어떨까. 글래스 부인은 아들이 자기한테 제발 좀 나가달라고 애원하는 소리도 무시하고 걱정어린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그리고 방에 틀어박혀 있는 딸에게 계속해서 말을 건다. 그리고 끓여놓은 '닭고기 수프'를 먹으라며 끊임없이 권한다. 처음에 주이와 글래스 부인이 툭탁툭탁 대화를 할 때는 답답했었다. 아니, 왜 저 아줌마는 아들 목욕하는 욕실에 들어와서 저렇게 끝도 없는 잔소리를 늘어놓는 걸까, 수프 안 먹는다면 안 먹는 건데 왜 자꾸 권할까, 하는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주이가 "너는 누군가 네게 축성한 닭고기 수프 한 그릇을 가져다주었을 때 그것을 먹을 만한 지각조차 없어. 그 수프는 베시가 이 미친 집구석에서 누구에게나 가져다주는 유일한 수프인데 말이지. ...... 네가 세상 밖으로 나가 온 세상을 다 뒤져 스승을, 그 예수기도문을 제대로 외우는 법을 말해줄 어떤 지도자, 어떤 성인을 찾았다고 한들 그게 네게 무슨 소용이겠냐? 코앞에 있는 축성받은 닭고기 수프도 알아보지 못하면서 자격 있는 성인이 눈앞에 있다 한들 대체 어떻게 알아보겠느냐고!" 하는 소리를 듣고나서야 나도 깨달았다. 소중한 건 바로 우리 주변에 있는 거라고. 주이가 프래니에게 '뚱뚱한 부인'을 위해 이것저것 했는데, '뚱뚱한 부인'이 아닌 사람은 없었다며, 연기를 열심히하라고 얘기했을 때 나도 아차 싶었다. 내가 찾던 삶의 의미는 지금 내 일에서도, 내 주변 누군가에게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이었구나.

 

 

 

꾸준히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묵직한 펀치를 날려줄 작품이다. 부조리한 현실, 허세에 찌든 인간상, 실망스러운 기성세대를 보며 청년들은 실망할 것이다. 이런 세상과 타협을 해야 할까, 아님 등을 돌려버릴까. 이런 세상에서 내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봐야 무슨 의미가 있나. 그냥 기성세대들이 물려준 부조리한 사회를 인정하고 이 속에서 그냥저냥 살아갈까. 고민이 많은 지금의 20대. 인간관계, 연애, 결혼, 출산. 내집 마련, 여기에 꿈과 희망마저 포기해버린 '칠포세대'에게 나를 지키는 방법은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는 용기에 있다고 말하는 작품이다. 27살, 많은 걸 포기한 내게 이 작품은 터닝포인트를 제시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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