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고 긴 이야기에 어떤 반응을 해야할까.

<도둑 신부>로 마거릿 애트우드에 매료되어 그 다음은 <시녀 이야기>를, 그리고 이 작품 <눈 먼 암살자>를 읽었다.

읽기 어려웠다. 내용이 어렵다기 보다는 여러 개인적인 이유로.
우선, 나는 sf를 정말 싫어한다.
특히 외계 종족이 등장하고 그들이 전투를 벌인다면 더더욱.
그런데 소설 속 소설 속 소설이 그러한 sf다 보니 읽기가 싫었다.
그 부분만 뛰어넘을 순 없었다,
그 sf이야기가 단순한 흥미거리가 아니라
(나의 호불호와는 별개로, 모든 sf가 그러하듯)
세계에 대한 은유였으며 그들의 현실 관계와 가치관에 대한
암시였으므로.

또 다른 이유. 나는 너무 일찌감치 ‘비밀’을 눈치챘다.
아이리스였다는 것, 로라가 당한 일들...
그 모든 것은 초반에 암시되어있는데, 내겐 너무 명확해 보였다.
이 책이 내 추측대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다른 어떤 것이 있기를 바라며 책을 읽어야 했다.
그리고 책은 정확히 그렇게 끝나버렸다.

그러나 줄거리가, 반전이 중요한 책이 아니다.
위의 이유들로 힘겹게 읽어야 했지만
이상하게 자꾸만 나를 부른 책이었다.
아이가 아파 정신이 없었던 지난 주,
잠시의 틈만 나면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솔직히 로라와 아이리스가 리니와 함께 보낸 어린시절 말고
성인이 된 후의 그들의 이야기는 매력적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슬프고 아름다웠다.

우리의 삶이 그러하지 않나.

어릴적에 엄마가 사준 ‘이티’ 오디오테잎이 있었다.
노란새 라벨이 붙어있던 그 테잎을 틀면
이티 내용을 성우들이 실감나는 연기로 낭독해주었고,
마지막엔 한글 주제가가 흘렀다.
“식빵 같이 생긴 이티의 머리,
하하하하 우습다~”

나는 이 테잎을 너무나 좋아해서
족히 백번은 더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내 귀엔 너무나 우스웠던 그 노랠
또 깔깔거리며 들었던 거다.

커가면서, 그리고 이렇게나 큰 지금에도

한번씩 그 노란 카세트테잎이,
웃음소리 가득한 그 노래가,
은근하던 성우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리고 매번 그 기억을 떠올릴 때면
이상하게 가슴이 조여오는 것이다.
왜그런지 눈물이 나려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미 잃어버린 시절이기 때문에.
그때 어린애였던 나와 그 아이의 무수한 잠재적인 시간들이
그 이후 실제로 흘러왔던 시간들과 판이했음을
자꾸만 떠올리게 되기에.


그러니까 이 소설엔 그런 힘이 있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해 느끼는 가슴 아픈 아름다움.
우울질의 바이올런스 선생이었다면
아, 아름다워,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을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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