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우 없는 세계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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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우 없는 세계를 읽는 동안, 나는 이들과 함께 가출 청소년이 되었다. 흡입력 있는 문장과 상황들이 내가 이 상황 속에 같이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였고, 가출 청소년의 모습들을 보면서 많은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다.

 주인공 인수는 어렸을 때 가출을 하고, 어른이 된 이후에 자신이 어렸을 때 겪었던 것과 같은 상황을 겪게 된다. 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은 ‘이호’라는 인물이다. 인수가 가출 청소년일 때 만나게 되는 성연과 경우, A라는 인물, 지민과 정희까지 가출을 한 후 많은 인물들을 만나게 되고, 사건에 연루(?)되기도 한다.


 제목이 경우 없는 세계인데 이 경우는 이런 경우가 다 있어? 할 때의 경우와 등장인물 경우를 다 포함하는 말 같다. 등장인물로 나오는 경우는 가출 청소년이지만, 구김살이 없고 예의가 바르고 꾸준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다른 친구들을 챙기고 청소하는 것을 좋아하고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 경우에게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도 나오는데. 인수는 경우를 만나기 전까지 성연이라는 아이와 함께 지냈다. 성연은 경우와는 다르게 물건을 훔치거나 다른 가출 청소년들을 많이 알고 지내고, 싸움도 잘 하는 일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전혀 다른 둘과 지내는 인수의 이야기이다.


25P

 특히 나 같은 애는 웬만해서는 안 믿어주거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 상대방이 납득할 만큼 내가 아파줘야겠지? 그쪽에서 의심할 수도 없고 반박할 수도 없게 내가 망가져야 되는 거야. 제대로 부러지고 제대로 찢기면 사람들은 ‘내가 사고를 냈구나’ 겁먹고 내가 해달라는 대로 해주거든. 그래서 솔직히 나는 죄책감 같은 거 별로 안 들어. 나는 사람 속이려고 아픈 척 연기하지 않거든. 그 순간에 나는 진짜로 아파. 존나 아파서 죽을 것 같아.


 가출 청소년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여러 매체에서 봐왔듯이 사기를 친다든지, 훔친다든지, 싸우고 돈을 뺏는다든지 하는 방법들이다. 그런데 이 아이(25P에 나오는 아이는 이호다)는 사기를 치고 다닌다. 그것도 교통사고 사기. 이호의 범행현장을 보게 되는 인수는 자신의 어렸을 때를 생각한다. 같은 경험을 했던 인수는 이호가 신경 쓰이기 시작하고, 사건현장에 나서기도 한다.


32P

 처음에는 가출을 하고서도 내가 한 게 가출이라는 생각을 못했다. 그저 아버지와 부딪치지 않기 위해 자리를 피하는 것,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깃든 경멸과 혐오를 참지 못해서 잠시 24시 카페나 패스트푸드점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에 불과했다. 가출이라는 단어에는 투쟁심이나 반항심 같은, 결연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하는 것은 회피나 은신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아이들은 각자 다른 이유로 가출을 한다. 여기서 인수는 자신이 한 걸 가출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왜냐, 바로 인수의 부모가 인수한테 한 짓 때문이다. 이 아이가 왜 가출이라고 생각 안 하고 회피나 은신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고 했는지는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가출을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인수의 부모가 한 짓을 옹호하지도 않는다. 각자의 사정, 각자의 이야기가 있으니까. 그것들이 불협화음을 만들어낸 것이다.


78~79P

 오늘은 어떻게 끼니를 때울지, 어떤 편의점이나 마트가 경계가 느슨한지, 누구를 속이고 얼마를 뜯어낼지만 궁리했다. 일을 실행할 순발력과 실행력이 부족해 아이들이 물건을 훔치는 동안 직원에게 질문을 해서 주의를 끄는 역할만 주로 담당했던 내가 어느 날 대범하게 옷 속에 콘돔과 즉석복권을 숨겨 나오자 아이들은 즐거워했고 한껏 치켜세웠다. 성연과 함께 있을 때는 굳이 나까지 나서서 할 필요가 없었던 일들을 시도하면서 무리에서 인정받는 느낌이 들었다. 죄를 나눠 가질수록 끈끈해진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아동, 청소년기에는 주변 환경의 영향이 크다. 그런데 인수는 현재 가출을 했고, 성연을 만나게 됐다. 성연은 가출을 여러 번, 그것도 오랫동안 해온 아이다. 성연이 길에서 만난 다른 가출 청소년들 또한 성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인공인 인수는 이 안에서 가출 청소년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106P

 내가 선택해서 집 밖에 나와 있는 거라고 믿었는데 어쩌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일찍이 내쫓긴 것을 나만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피어올랐다. 거실에 우뚝 서서 이상한 기분으로 그 순간을 마음에 새겼다. 거실 통유리로 한껏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 먼지와 함께 부유하는 고양이 털, 거실 벽에 걸린 아버지의 독사진, 발바닥에 느껴지는 온기.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 순간을 곱씹어보면 섬뜩한 감정을 느꼈다. 집에서 부모를 마주쳤다면 내가 악한 마음을 먹고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더 깊은 속마음으로는 네가 그래봤자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기나 하겠지, 뭘 할 수 있겠어, 하고 나 자신을 비웃었다.


 인수는 가출 후에 집에 한 번 찾아간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돈일 테지만, 막상 집에 가보니 자신이 살고 있을 때와는 다른 풍경을 보게 된다. 인수의 부모가 하려고 했던 일, 인수의 가출 이유, 가출 후에 돌아가 본 인수의 집은 인수가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사건이 되었다.


183P

 소름 돋는 한기가 척추를 타고 배 속에 내리꽂히는 느낌에 나는 몸을 옹송그렸다. 마치 저기 엉망이 된 모습으로 0에 담긴 것이 나고, 내 몸은 다른 낯선 이의 차지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공간에는 분명 성연, 경우, 영철, 세준, 지민, 정희, 나 이렇게 일곱 명이 있고 A까지 합치면 여덟 명이 있는데 분명 그 여덟 말고도 다른 존재들이 발 디딜 틈 없이 우글거리며 지켜보고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압사를 당할 것만 같은 불가능한 밀도로 내가 모르는 존재들이 ‘우리집’에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다른 존재를 감지하게 된 것은 분명 이 순간부터였다.


 어른이 된 인수는 여름에도 두꺼운 옷을 입고, 한겨울인 것처럼 덜덜 떨었다. 어른이 되기 전부터지만. 그게 이 사건에 의해서일 거다. 인수가 연루되게 된 하나의 큰 사건. 이 사건 이후 인수는 다른 사람이 된다. 그 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으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전체적으로 수집하고 싶은 좋은 문장들도 많았고, 몰입도와 흡입력도 높은 소설이었다. 마치 내가 이 안에서 같이 일에 연루되고, 인수가 된 것처럼. 읽고 좋은 부분들을 표시하다 보니 책이 아코디언처럼 됐다. 좋은 문장과 사건들, 생각들이 담겨있는 만큼. 경우 없는 세계가 더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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