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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소멸 - 우리는 오늘 어떤 세계에 살고 있나 ㅣ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2년 9월
평점 :

의아한 제목이다. 사물이 소멸되었다니. 지금이야말로 매분 매초 생산되고 소비되는 (그리고 그만큼 버려지는) 사물들이 넘쳐나는 ‘사물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시대가 아니던가. 오늘날을 ‘사물과의 관계를 상실한 시대’로 정의하는 철학자의 진의는 과연 무엇일까. 이 책을 읽는 과정은 내 의아함을 해소하기 위해 함께 질문하고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오늘의 자유를 위해 오늘을 사유하는 철학자의 지로(指路)를 따르며.
사물의 본질과 사용가치 또는 사물에 깃든 고유한 기억이 아닌, 외부에서 결정되고 제작되어 주입된 사물의 ‘정보’만이 사물의 실재를 대표하는 정보 자본주의 사회. 그 안에서 무수한 사물들이 죽은 채로 태어나고 이내 사라진다.
인간은 오로지 ‘정보’를 중심으로 세계를 지각한다. 실재와의 긴밀한 ‘접촉’보다 정보로의 긴박한 ‘접속’을 개별의 삶과 전체의 사회를 지속가능케하는 진리로 여긴다. 자신의 처분 불가능한 제약과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통제・예측 가능한 것만을 갈망하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먼저, 더 쉽게, 더 많이, 더 빨리 취할 수 있는 ‘정보’들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인간은 하염없이 머무르는 방법을 잊고 살아간다. 가만히 멈추고 고요히 듣고 주의 깊게 바라보며 결속된 관계를 맺기보다는, 우연과 일시성에 기반하는 흥분과 자극을 끊임없이 쫒으며 조종 가능한 가상의 세계 속에 살아가기를 선호한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화면 속 세계를 자신의 욕구에 종속시키며 자기 자신을 강화함과 동시에, 자신과 다른 모습과 다른 생각의 생각의 타자를 자신의 땅 위에서 점차 사라지게 만든다. 그러나 손으로 움켜쥘 수 없는 정보들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는 과정에서,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정보 위에 표류하는 과정에서 사라지는 것은 타자와 사물의 실재뿐만이 아니다. 결국 자기 자신까지 소멸되고 만다.
쉼 없이 어딘가에 접속할 뿐, 누군가나 무언가와 접촉하길 점점 꺼려하는 오늘날의 ‘호모 루덴스’ 또는 ‘포노 사피엔스’에게 철학자는 단호히 말한다. 무상한 인간의 삶에 안정성과 연속성을 부여하는 것은 지금의 우리가 쉼 없이 매달리고 추종하는 ‘정보’가 아니라고. 사물이 아닌 정보와 소통, 생산과 성과에만 집착하는 자기 자신을 구하고, 사라진 타자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이 땅(earth)을 구원하기 위한 방법은 결국 서로 연결된다고. 간결한 글을 통해 나눈 철학자의 깨달음이 자발적으로 스마트폰 안에 갇혀 ‘좋아요의 감옥’, ‘같음의 지옥’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구하는 빛줄기처럼 느껴진다. 각자의 두 발을 딛고 사는 이 땅 위에서 누구도 사라지지 않도록 이끌고 비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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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내린 두 가지 다짐은 다음과 같다. 무위와 고요, 바라봄과 경청을 위해 애쓰는 일상을 지향하자고. 그리고 빠른 시일 내에 ⌜어린 왕자⌟책을 다시 읽자고. 오래된 고전을 통해 ‘접속’과 ‘접촉’의 차이를 더 깊이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내 손에 쥐어준 철학자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하고 싶다.
*이 글은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우리는 홍분을, 놀람을 목적으로 실재를 지각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정보 사냥꾼으로서 우리는 고요하고 수수한 사물들을, 곧 평범한 것들, 부수적인 것들, 혹은 통상적인 것들을 못 보게 된다. 자극성이 없지만 우리를 존재에 정박하는 것들을. - P9
심지어 사물을 소비할 때도 우리는 이제 체험을 기대한다. 사물에서 사용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보 내용, 예컨대 상표의 이미지다. 사물을 지각할 때 우리는 주로 사물에 저장된 정보를 얻기 위해 지각한다. 사물을 사들일 때 우리는 감정을 구매하고 소비한다. 제품은 스토리텔링을 통해 감정을 충전 받는다. 가지 창출의 결정적 요소는 제품을 차별화하는 정보들, 소비자에게 특별한 체험을 넘어 특별함의 체험을을 약속하는 정보들이다. 상품에서 정보는 사물적 측면보다 점점 더 중요해진다. - P26
정보는 맞닿음을 줄인다. 지각은 깊이와 집약성을, 몸과 부피를 잃는다. 지각은 실재의 여기 있음 층에 진입하여 깊어지지 못한다. 지각은 단지 실재의 정보 표면만 스친다. - P86
반복 불가능한 감정, 흥분, 체험의 시대에 삶은 형태와 리듬을 상실한다. 삶은 철저하게 덧없어진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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