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없이 흔들며 흔들리는 현실 속에서 유연하고 의연하게 살고 싶은 이들에게 찾아온 이 여름의, 이 지구의 선물과도 같은 책. 지구의 모든 존재를 향한 선한 믿음과 시선이 담긴 작가님의 글은 그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다. 누군가의 마음과 눈길이 충분히 닿음으로 소외되지 않는 ‘객체’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더불어 나 또한 지구인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는 ‘주체’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작가님의 글 쓰기와 삶 쓰기에 계속해서 동행하고 싶다. 잊지 않아야 할 것들을 함께 기억하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함께 거부하며, 지향해야 할 가치를 함께 추구하면서.
이런 글을 쓰는 이들, 이런 글을 아끼는 이들, 이런 글을 읽고 실천과 행동으로 애써 옮기는 이들이 만들어갈 세상은 바로 ‘혐오가 선의를 이기지 못 하는 세상’일 것이다. 혐오를 이길 빛을 빚어내는 선의.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 다정한 마음을 품은 이들이 빚어낸 빛에 서로 빚지도록, 그리하여 더 환한 빛을 함께 빚어내도록 돕는 선의. 답도 출구도 없어보이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헬Hell’ 같은 현실을 버틸 수 있고 바꿀 수 있도록 돕는 다수의 선의를 계속 해서 믿고 싶다. 믿어야 한다. 믿는다.
📚p.254 세상이 망가지는 속도가 무서워도, 고치려는 사람들 역시 쉬지 않는다는 걸 잊지 않으려 한다. 절망이 언제나 가장 쉬운 감정인 듯싶어, 책임감 있는 성인에게 어울리진 않는다고 판단했다. 작은 부분에서 시작된 변화가 확산되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패턴이기 때문에 시선을 멀리 던진다. 합리성과 이타성, 전환과 전복을 믿고 있다. 우리는 하던 대로 하고 살던 대로 사는 종이 아니니까.
———
수많은 플래그와 울림이 남은 이 책을 앞에 두고서 다정한 지구인들과 도란도란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래서 이 책과 함께할 북클럽 시간이 몹시 기대가 된다!) 책의 초반과 후반에서 나를 강하게 울린 작가님의 말, 그리고 이를 통해 내가 얻은 위로와 깨달음을 적으며 이 글의 지나친 길어짐을 막고자 한다. (네 이미 충분히 길다는 것,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p.13 첫 회사에서 한 시인의 인터뷰 자리에 갔던 적이 있는데 나와 같은 소아 뇌전증을 앓으셨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셔서 듣고 있다가 놀라움과 해방감을 느꼈다. 말해도 되는구나. 왜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 약한 부분을 햇볕 아래 드러내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그때 알게 되었다.
📚p.317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항상 건강함을 연기하고 있지 않은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건강한 몸과 마음을 일방적, 획일적으로 강요하는 사회에서 그 강요에 자주 굴복당하며 ‘패배자’의 감정에 괴로워했던 과거의 나를 떠올려본다. 많이 아팠고 자주 아팠던, 그리하여 생의 여러 분기점에서 ‘포기’나 ‘내려놓음’과 같은 슬픈 선택들을 내릴 수 밖에 없던, 혼자 웅크려 나의 약한 몸뚱이만을 원망하며 눈물 흘렸던 지난 날의 나를 한껏 위로해주고 싶다. 숱한 약함 속에서 작은 강함으로 지금껏 잘 버텨온 (나를 비롯한 모든 약한) 존재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약한 몸과 약한 체력을 가진 이의 인생까지 ‘약한 인생’인 건 절대 아니라고.
———
여기까지 말하니 이 책이 정말 여행에세이가 맞나 싶지만, 이쯤에서 이 책을 통해 누릴 수 있는 큰 기쁨을 말하자면, (당연하게도) 작가님이 여행자로서 느꼈던 감정과 생각의 흐름이 책장을 넘기며 자연스럽게 내 안에 스며든다는 것이다. 더불어 마스크에 갇힌 코와 입을 구해낼 날이 요원해보이는 오늘날, 한동안 가지 못 했고 또 한동안 갈 수 없을 여행지에서의 풍경과 심경을 막연하게 그리워하는 마음 또한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다. 조금 다른 방향으로.
그리운 곳들을, 아끼는 곳들을, 사랑하는 모든 것을 훗날 (보상심리든 일탈이든 그 어떤 이유를 내세워서라도) 모두 누리려 욕심내지 않길 다짐하셨던 작가님의 애정 어린 마음. 덕분에 본래의 모습을 망치지 않기 위해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사랑하는 마음을 품는 것은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과의)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알게 되었어요. 고맙습니다, 작가님. 길고 깊게 사랑하는 법을 앞으로도 작가님의 글을 통해 계속해서 배우고 싶어요.
📚p.193 다시 간다고 해도 2012년, 그 때의 내가 느낄 수 있었던 많은 것들은 재경험할 수 없을 테고 말이다. 운이 좋게 간직할 수 있게 된 마음 속 이미지들을 품고 아끼며 살아가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너무 욕심내지는 않으려고 마음먹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