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을 만나러 갑니다 - 함께 우는 존재 여섯 빛깔 무당 이야기
홍칼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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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평 : 오래 전부터 이어져온 해체와 연대를 우리 시대의 말로 쓰다.

요즘 나는 운명론에 부쩍 관심이 많다. 어떻게든 될 줄 알았던 인생이 어떻게 되지 않은 채로 점차 나를 책임져야하는 어른으로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전에 없이 시험을 쳐놓고 한 달 정도를 소화불량에 시달리기도 하고, 지금까지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잘 안 되는 거라면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도 고민한다.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다 포기했을 때 무언가 온다지?하는 옅은 기대를 내려놓지 못하는 내가 답답하고 막막해서 사주와 타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내일이 없는 사람에게 매일 아침은 조금씩 등떠밀려 한 발 재겨디딜 곳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길로 일단 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제목부터 조금 설렜다. 무지개색 하트들이 그랬고, 부럽지만 부럽지 않지만 부러운 미래를 보는 사람들의 이야기일까 싶어서 더 그랬다. 신점 한 번 보러 가고 싶다고 늘 생각했는데, 한 번도 못 가본 사람이라서 더 그랬다. 이상하게 내게 신점은 정신과만큼이나 문턱이 높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은 생뚱맞게도 '무당도 직업'이라는 것이다. 물론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지만, 반대로 말해서 오롯이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타고난 기질과 가정환경과 받을 수 있는 지원과 관심과 사랑과 등등의 많은 것을이 모여서 한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가 나아갈 길이 그가 사는 세계의 흐름에 휘말리기도 하면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결정해가는 것이라면, 결국은 미래에 대한 예측이라는 건 통계학과 사회학의 콜라보레이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어쩌다보니' '이렇게' 살고 있다. 꼭 무당만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게 운명이 아닐까. 나도 최근에 하도 답답해서 나는 이 직업을 하지 않게 태어났는데 자꾸 내가 이 길을 가려고 하니까 저 높은 곳의 존재가 시그널을 주는 것이 아닐까 하고 궁금해서 사주도 보고 타로도 본 적이 있다. 그때마다 나의 기질은 늘 현업 그 자체였다. 요즘 와서는 왜 나는 이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데, 그게 운명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무당을 제외하고도 꽤 많은 사람들을 그 직업이나 역할과 분리하지 못한다. 엄마를, 아빠를, 선생님을, 부장님을, 그리고 무당을. 물론 역할과 직업은 그 사람의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그 일부의 정체성과 그 사람 전체를 자꾸만 동일시해버리기 때문에, 그도 사람이고 내가 생각하는 그의 모습은 역할과 직업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아야할 때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특히 무속인에게 씌워진 직업과 역할과 사람의 동일시를 내려놓게 되었다.

그래서 직업 무당이 그간 사회 속에서 해온 역할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예전부터 무속은 앞을 내다보는 일을 통해서 눈을 가리운 채 불안함에 떨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이끌어주는, 상담사 내지는 길라잡이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왔었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라 무속이 공동체 안의 모순으로부터 생기는 억울함과 한을 풀어주고 더 나아가 기존의 틀을 해체함으로써 소외된 사람들에게까지 연대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핏 들으면 연대와 해체는 정 반대의 말 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보성과 배타성이 같은 말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해체와 연대 또한 유의미하게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공동체를 이루려는 속성이 있다. 그런데 빈틈없는 공동체는 누군가를 끼워주면 무너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반드시 배타성을 지닌다. 또한 인간의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한다. 그 희생을 당연하게 만들기 위해 기성의 언어로 룰을 정하고 이를 강요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가슴속에는 한이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에는 틈이 필요하고 균열이 필요하다. 헐겁지만 서로를 놓지 않는 공동체에는 타인을 수용할 수 있는 여유가 있고, 희생을 강요하지 않으며 제도를 개선할 여지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에는 해체와 연대의 교두보가 필요한데 그 역할을 아주 오래 전부터 무속신앙이 해오지 않았을까 싶어졌다. 기존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일이 기존의 언어로는 속박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는 필요했을 것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여성에게 열려있었던 몇 안 되는 전문직종이자 개인의 억울함과 막연함을 들어주고, 집단의 고민을 위해 다른 세계와의 연결을 시도하는 존재, 그럼으로 인해서 자신이 걸쳐있는 두 집단 모두의 안녕을 빌고 상생을 도모하는 존재가 무속인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서는 수고를 하는 바람에 크게 대접받지 못하는 삶을 살지만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홀대한 공동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기꺼이 신의 이름으로 함께해주는 저항과 해체와 포용의 아이콘이었겠구나 싶다. 서양에서도 약초를 통해서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던 사람들이 마녀로 몰렸던 것처럼,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가 바람둥이였던 이유는 사실 수많은 고아들에게 너는 신의 자녀라는 이름을 주기 위해 그랬던 것처럼. 소외된 사람들을 살려내는 연대의 손길이 오히려 공동체의 폐쇄성에 막혀 박해당할 때에도 그 가능성을 놓지 않고 끝없이 저항과 해체를 통한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열어나갔던 것처럼.

인터뷰이 중에 공감의 무당 무무님의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연루되어있으니까요." 라는 말이 책을 덮고도 머릿속에 계속 맴돌아서 자꾸만 그 말을 만지작거리게 된다. 우리가 연루된 세상을 각자의 방법으로 책임지는 일 중 하나를 짊어진 무당들은 단순히 편견대로 미래를 예측하고 굿을 하는 일에만 머무르지 않고, 기존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안내해주는 존재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변화하는 사회에서도 끊임없이 연대의 가능성을 놓지 않는 것. 별볼일 없이 불안하고 작아진 개인들을 이끌어 집단의 헐거운 틈에 끼워넣어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일을 도모하는 저항을 계속해나가는 그들의 가치를 비로소 알게 해주었으며, 공동체의 양면성에 대해서, 그 안에서 내가 해야할 역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볼 계기를 마련해준 이 책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읽어보고 헐겁지만 서로를 놓지 않는 연대에 동참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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