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래를 꿈꾸는 이주민입니다 - 더 나은 ‘함께’로 나아가는 한국 사회 이주민 24명의 이야기
이란주 지음, 순심(이나경) 그림 / 한겨레출판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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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평 : 백 명이 있다면 백 가지 삶이 있다. '우리'와 '우리가 아닌 사람'을 나누어 차별할 일괄적인 기준이란 없지 않을까. 혐오할 자격은 더욱 더. 그러라고 있는 '우리'가 아니다.

세상은 느리게라도 진보하고 있다고 한다. 또 그 말을 믿고 싶다. 그런데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아도 그런 면이 있는가 하면 아닌 면도 있고 그렇지 못한 면도 있다. 삶이 개별화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로 묶였던 모더니즘적 사고관이 해체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가 왔다. 사람들은 개별화 되어서 서로의 삶을 점차 침해하지 않게 되고 다양한 삶의 모습을 인정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외로움을 느끼고 '우리'의 모습을 찾으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적당한 거리두기에 실패한 사람들은 가끔 '우리'의 이름으로 폭력을 저지르거나, '우리'의 가치관을 타인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억지로 조성하기 위해 애쓰면서 혐오를 자행한다. 우리이고 싶지만 나이고 싶은 마음. 그리고 좀 더 가치로운 삶을 잘 살고 싶은 마음. 그것은 어떤 사람이나 가지고 있는 로망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주민들은 그런 로망을 실천하기 위한 마음으로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이다. 책을 읽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들은 일단 나보다는 뛰어난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진로에 대한 부침을 겪으면서도, 혹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면서도 직업이나 거주지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안주를 택해온 나와 달리 그들은 자기 삶의 개척자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타국에서, 존재를 인정받기조차 어려운 경우가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우리'의 장벽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평소에 그렇게 '우리'에 대한 인식을 갖고 살지도 않으면서, 우리는 '우리'라는 말을 타자를 배척하는 결속력을 다져야할 때 자꾸만 철옹성처럼 여기고 사용해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라는 말은 상보적일 때 아름답지만, 배타적일 때 끔찍한 말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우리였는가. 과연 우리다운 삶을 살아오기는 했는가.

'지구촌시대'라는 낯간지러운 말을 가지고 생각해봐도 그렇다. 벌써 몇 십년 전부터 국가간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가고, 그러기 위한 국가간 협력체계를 구축해오고 있으며 우리도 재ㅇ 교포라는 이름으로 외국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차별과 편견을 이기고 살아온 것에 대해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 눈물 흘린다. 그러나 그대로 '우리'의 마음으로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이주민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선긋기를 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것이 바로 외국에서 살아남았던, 우리가 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겪어왔던 아픔이 아닐까.

사실 우리는 모두 개개인의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는 주변인이다. 주변인들의 느슨한 연대가 마을을 만들고, 마을의 느슨한 연대는 다시 국가를 만들고 국가의 연대는 지구를 하나로 잇는다. 그 안에서 더 나은 개인도, 더 못한 개인도 없다. 우리도 언제건 주변인이 될 수 있고, 우리에 속하지 못할 수 있다. 사실 나도 그렇다. 나는 직업 특성상 안정되지 못한 상황에 속한다. 그래서 겨울마다 옮길 직장을 찾는 여정을 거쳐왔다. 그래서 '우리'에 속하지 못하는 기분이 무엇인지를 종종 느껴왔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근무하는 10년동안에도 동일 노동 동일 대우를 받지 못하는 처우에 대해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보다 개선을 촉구하는 움직임과, 이에 공감하는 많은 '우리'들의 지지로 인해 많은 처우가 개선되었고 좀 더 '우리'에 가까워졌다. 반드시 이주노동자가 아니라도 '우리'는 우리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주노동자라고 해서 '우리'가 아니어야할 이유가 있을까? #나는옐로에화이트에약간블루 처럼, 우리도 사실 아주 자연스럽게 섞여들어 살고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미국 주식을 영주권자들만 할 수 있다는 공표가 갑자기 나온다면? 우리 나라의 많은 투자자들은 갈 곳을 잃을 것이다. 사실 미국 장에서는 우리 나라 사람들도 '외국인' 개미에 불과하니까.

'우리'가 배타적인 용어이기보다 상보적인 말, 연대의 말이기를 바란다. '우리'가 차별과 혐오를 위한 구분짓기가 아니라, 따뜻한 손과 품으로 서로를 안아줄 수 있는 말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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