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 - 잃어버린 도시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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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 #원청 #푸른숲 #중국소설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도서제공

한 줄 평 : 위화적인 순간들 그 자체.

내게 위화는 <인생>이다. 대학교 교양수업시간에 중국영화 다섯 편과 그 원작들을 읽었었는데, #붉은수수밭 #국두 #인생 #패왕별희 #홍등 이렇게 다섯 편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남았던 작품은 #홍등 과 #인생 이었다. 당시에 소설 제목은 #살아간다는것 으로 번역되었었는데 지금은 #인생 으로 출판되고 있다고 한다. 당시 그 수업은 내게는 손에 꼽도록 인상 깊은 수업이었다. 이후에 교사생활을 하면서도 영감을 많이 받았던 수업을 생각하면 단연 1순위에 꼽힐 수업이었기 때문이다. 내게 당시 영화 "인생"과 소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충격의 연속이었다. 푸구이의 인생이 마치 신약한 #사주가 둥둥 떠다니듯이 역사에 이리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인생사 새옹지마를 반복해서 보여주는 이야기. 그렇다고해서 대단한 반전이 있는 것은 아닌 것이 더 반전인 소설.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짠내' 속에서 길어올리는 것. 그러면서도 끝내 희망 한 조각을 여운으로 남겨두는 것. 내게는 그것이 "위화스러움"이었다.

맛으로 치면 마라맛이라든지 하는 자극적인 맛이 아닌 슴슴한 배추전병맛과 같은 맛. 슴슴하고 예상할 수 있는 맛이지만 자꾸만 술술 넘어가는 맛. 그러면서도 와 맛있다를 반복해서 말하게 하는 맛. 그런 맛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위화스러움이라면 위에서 말했듯이 #그럼에도불구하고 #짠내 속에서 #희망 한 조각을 무심한 듯 건져올리는 것, 그럼으로 인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삶은 지속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나지않음 은 위화 소설의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끝난 뒤에도 한참동안 뒤를 더듬게 된다. 그 뒤는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에. 지금도 이어지고 있을 것만 같은 주인공과 그 후예들의 삶을 그려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소설은 우리의 인생 그 자체를 일부분 들어 옮긴 것 같다. 생의 어떤 에피소드에도 사실 명확한 종결이라는 것은 없으며 잊을만 할 때쯤 놀랍게도 다른 무언가와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엮여있기 때문이다.

<인생>과 <원청>의 주인공인 푸구이와 린샹푸는 본성이 유들유들했던 부유했던 사내들이다. 그들이 몰락해가면서도 강하고 질기게 삶을 지탱해가는 것,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 위화 소설에서 느껴지는 슴슴하지마나 웅장한 맛의 정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인생>에서는 얇고 길게, 스스로가 그 희망을 이어가는 끝을 보았다면, <원청>에서는 린샹푸를 너무 일찍 보내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소설의 이중 구조를 보니 아 역시 위화는 다 뜻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푸구이가 인생을 가늘고 길게 살면서 조금 사람이 되어간다(?)면 린샹푸는 그저 드센 팔자(?)로 인해 조실부모하고 몇 번의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지만 그 선택을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끈질기게 지켜낸 멋진 남자라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랄까.

또 하나, 지독한 사랑과 사람들의 따뜻한 연대감은 이 소설의 중요한 줄기다. 지독한 사랑은 여러 사람의 운명을 엇갈리게 했고, 어떤 것은 너무 지독한 나머지 끝끝내 전해지지 않았으며, 너무도 먼 길을 돌아서도 함께 있지만 알아채지 못하고 찰나의 순간을 스쳐가는 데 그치는 것이었다. 또한 비록 선택에서는 지독하게 팔자가 드센 사람이었지만, 인복은 후했던 남자 린샹푸를 생각하면 천융량과 린샹푸와 구이민의 인연은 난세에도 살아있는 인간미와 희망을 보여주기도 한다. 덧붙여 천융량이 결국 린샹푸와 구이민의 한을 풀어낸 것이라든지 린바이자가 오입쟁이 구퉁녠과 결혼하지 못하게 된 것, 린샹푸가 생을 걸고 지켜낸 린바이자가 아버지가 떠난 세상에서도 여전히 안전한 곳에 남은 희망인 것 또한 참으로 위화스럽게 남긴 희망의 불씨가 아닐까 생각했다. 세상에는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일이 많고,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는 것이 많다는 것. 지극한 인생의 진리를 이런 식으로 풀어낼 수 있다니.


작중에 557p. 원청은 린샹푸와 딸의 끝없는 유랑과 방황을 의미했다라는 말이 있다. 그제서야 서문에 있던 누구에게나 '원청'이 있다라는 말을 이해했다. 우리는 누구나, 삶에서 끊임없는 선택을 하고 끝없는 유랑과 방황을 한다. 가슴에 품은 열정과 목표와 사랑으로 갓난 아이를 안고 나선 린샹푸처럼. 그리고 끝끝내 그 목표를 만나지 못하기도 하고, 지키기 위해 평생을 다 바친 존재와 먼 곳에서 스러져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만난 삶은 원했던 길과 조금 다르더라도 그런 대로의 의미가 있는 삶이다. 어쩌면 원청이 그렇듯이, 우리에게 이상적인 목적지라는 것은 정체가 불분명한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애타게 갈망하고, 찾아 헤매며 그 과정에서 생각지 못한 것을 발견하고 일구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원청의 진정한 의미라면, 제각기의 원청을 찾아 방황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이 소설은 인생의 진리와 같은 것이 아닐까.

자꾸 말이 길어지면 소설 이야기를 더 해버리게 될까봐 줄여야겠다. 자꾸만 여운을 더듬게 될 것만 같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많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작가가 위화다. 정말로 위화스러우면서도 꽤 두꺼운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가는, 심지어 두 관점의 이야기가 함께 있어서 두 번 위화스러운 이야기다. 망설일 이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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