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 - 남방의 포로감시원, 5년의 기록
최영우.최양현 지음 / 효형출판 / 2022년 3월
평점 :
#서평단 #도서협찬 #효형출판 #최종미션
이 역사는 라면으로 때워낸 한 끼와 같다. 스테이크를 썰거나 고급 식당에서 촛불을 밝히며 기념한 어느 멋진 날을 주로 기억하는 우리는 사실 그렇게 바쁜 어느 날에 급히 먹은 라면과 혹은 간식들과 아주 평범하게 지나간 크게 기억나지 않는 숱한 끼니들이 연명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리 멋지게 기억나는 날들을 맞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의 어떤 글자도 점 없이 이루어질 수 없듯이, 그렇게 숱한 점과 같이 머리를 디밀고 이름 없이 획을 이룬 그런 역사.
게다가 더 극적인 것은 주인공이 너무나도 무미건조할 만큼이나 평범하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 사는 것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데, 우리가 보아온 역사는 늘 너무나도 특별하고 남달랐다. 요즘 내가 미쳐있는 아무개들의 이야기 #미스터션샤인 속의 인물 하나하나도 사실은 너무나 아무개스럽지만 아무개스럽지 않다. 물론 지금의 내가 나약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아무개들은 정말로 비장하고 특별하다. 주인공인 고애신은 정말 반가의 정한 여식 그 자체이며 근본부터 평범치 않다. 심지어 거기에 바른길로 가는 피까지 이어받아서 여염집의 '여성'을 뛰어넘기는 하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흑역사라곤 없이 올곧기 그지없다. 그것은 거의 혈통으로 암시되는 것으로 보면 오히려 아무개보다는 영웅 서사에 가깝다. 노비 출신이었던 유진초이도, 혹은 그 혈통 서사를 부정한 김희성과 쿠도히나도, 자신의 상처에 몸부림치지만 결국 운명에 휘말리는 장포수와 구동매도. 사실은 누구도 평범치 않은 아무개다. 그런데 이 책의 주인공 최영우는 그렇지 않다. 결정적인 순간에 남다른 멋있음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태생부터 남다른 사람도 아니다. 그저 아주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좀쑤셔하고 새로운 것에 설레는, 자신의 삶을 조금 더 낫게 만드려고 아등바등하는, 닥쳐온 비극 앞에서 흔들리는 촛불처럼 고뇌하지만 처하게 된 상황에서 오히려 좋아를 외칠 수 있는. 그런 아주 평범한 20살 청년. 그때의 20살은 지금의 20살과 좀 다르다고 해도, 나는 내가 가르쳤던 10대 후반 20대 초중바나 남학생들이 생각난다. 단순하지만 복잡한, 어른인 척하지만 한없이 아이 같은, 맛잇는 것과 흥미로운 것을 좋아하지만 힘든 것을 싫어하는, 군대를 생각하면 끔찍해하는 그런 아이들. 지금 한창 군복무를 하고 있는 아이들도 문득문득 생각난다. 그 아이들이 딱 이렇게 평범하지만 통통 튀는 아이들이었는데. 그런 아이들이 휘말린 운명의 소용돌이에 대한 이야기가, 우리가 아는 이름이 아니라, 혹은 단 몇 글자로 적히거나 혹은 아예 빈칸으로 띄워진 자리에 숨죽여 자리잡은 이야기가 사실은 여백까지 빽빽하게 채워진 역사라는 그림 을 이루는 한톨의 픽셀로서 다가온다는 것이 문득 새로운 것은 참 새삼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의병장 혼자는 의병의 역사를 이뤄낼 수 없었다. 대통령 후보 혼자서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 출렁이는 주식장은 개미들의 희로애락으로 채워진다. 우리가 자꾸만 희미하게 잊어가는 김용균과 변희수와 이예람과 그리고 그 아래 숱하게 지워져가는 A씨 B씨들과 그마저 되지 못해 획 속의 숱한 픽셀들과 혹은 빈칸을 채우는 흰 점들로 남은 사람들이 아니면 역사는 존재할 수가 없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그 삶들이 버텨온 라면 한 끼 같은 모양들이 문득 묵직하게 다가오도록 해주는 책 #1923년생조선인최영우 .
#역사의쓸모 에서 #최태성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어떤 비극 앞에서도 그저 포기하고 굴하지 않고 지금 이 시련이 역사에서 어떻게 판단될지, 어떻게 읽힐지를 더 멀리 바라보고 아픔을 글로 풀어내 기록과 글의 힘을 보여 주신 최영우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그 재능을 물려받아 그 이야기를 이렇게 멋지게 복원하기 위해 10년이나 집념있게 재구성해주신, 그러면서도 그것을 미화하거나 아름답게 만드려는 욕심보다는 온전하게 재구성하려고 애써주신 #최양현감독 님께도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아마도 대체로의 아무개일 우리들이 저마다 처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는 것과 같은 이 이야기는,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다. 단지 역사 속의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인물의 과거를 통해 나의 현재와 미래를 되짚어보고 내가 일궈나갈 역사의 지향점에 대해서 아무개 1인으로서 조망해보고 지향점을 설정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시기를 추천해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