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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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되어 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p.250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라고 설파한 것은 명저 『팡세』를 남긴 파스칼이고,
사랑을 가리켜 ‘분별력 없는 광기’라고 한 것은 셰익스피어다.
사랑은 사회적 그릇이나 시간의 눈금 안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본래 미친 감정이다. 당신들의 그것도 알고 보면 미친, 변태적인 운명을 타고났다고 말하고 싶지만, 뭐 상관없다. 
  

당신들의 사랑은 당신들의 것일 뿐이니까.' p.12
 

2003년_ 대학교의 첫발을 내딛었을 때, 나는 진정한 어른이 되었다고 자신했다.
'전설의 고3' 고난과 역경을 견뎌냈으니 말이다. 부푼 기대와 한껏 들뜬 첫 수업, 첫 강의 교수님께서 <죽어도 좋아>라는 영화를 보고 감상평을 내라는 과제를 주셨다.

그 당시, 영화를 보고 받게 된 충격은 어떠한 말로 표현 할 수 없었다. 죽음의 꽃이라고 불리는 검버섯이 온 몸에 피어난 ‘노인네들’ 에게 ‘사랑’이 존재한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죽음을 앞둔 그들이 품은 욕망은,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인격을 ‘욕되게’ 하는 ‘변태적 취향’이라고 생각했다. 두 노인의 사랑은 아름답기는커녕, 역겨웠고 추악해 보였다.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써내려간 감상평은 감독을 성장애자로 만들었고, 제도와 관념 유교사상을 운운하며 포악스러운 비판을 했던 기억이 난다.

7년이 지난 깊은 밤, 나는 일흔의 이적요 시인과 열일곱의 한은교, 그리고 서른일곱의 서지우를 만났다. 관능적인 이야기이다.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외롭고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깊은 소용돌이 속 고독으로 빨려 들어간 느낌이다.
 

'눈이 내리고, 그러고 또 바람이 부는가. 소나무 숲그늘이 성에가 낀 창유리를 더듬고 있다. 관능적이다. 'p.13

고요하고 쓸쓸한 인생을 살아온 이적요 시인의 삶에 작은 돌풍을 일으킨 창槍을 품은 소녀, 한은교.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적요 선생님과 함께라면, 어떤 일이든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우직한 서지우에게 깊고 날카로운 욕망을 심어준 소녀, 한은교.

“할아부지와 선생님, 서로가 너무 많이 사랑했다는 거예요. 절 사랑한 게 아니에요.
두 분하고 함께 있을 때마다 버림받은 기분은 제가 가져야 했다구요. 진짜로요. 끼어들 틈도 없었는걸요.” 라고 말하는 은교.

일흔 살 노인에게 열일곱 소녀는 존재 자체만으로 세상에 부러울 게 없는 빛이었다.
서른일곱 서지우에게 열일곱 소녀는 가지고 싶은 욕망이자 뺏길 수 없는 '그만의 것'이어야했다.
시인에게 유일한 ‘내 새끼’였던 ‘서지우’는 주차장에서 은교를 탐하던 그 때부터 경계와 질투심의 대상이 되었다. 불신과 노여움이 몰아친 노인의 마음 속 불씨는 활활 타올라 불안과 경계로 가득 찼다. 서로를 너무나 사랑한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 그리고 은교. 깊어만 가는 그들의 이야기가 깊은 밤_ 나를 잠 못 이루게 한다.

은교를 향한 광적인 집착과 욕망,

사실 자신이 원하는 문학적 욕구를 분출하지 못하는 허망한 남자 서지우와 고요하고 적막한 남자 이적요가 서로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아닐까.

서지우의 젊음과 이적요 시인의 문학적 천재성,
가질 수 없고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에 그들의 탐욕은 소녀, ‘은교’를 통해 적나라하게
그리고 관능적으로 분출되었다.

7년 전, 내가 이 소설을 만났더라면 ‘롤리타’를 지향하는 한국 남성들의 변태적 성의식을 비판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은교를 만난 나는, 그들이 열렬히 그립고 또 눈물겹다.

그것은 분명 <사랑>이다. 햇살처럼 고요하게 다가오든, 탐스러운 욕망으로 다가오든, 그 모든 것은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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