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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새 ㅣ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15
마르턴 타르트 지음, 안미란 옮김 / 들녘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이거 도대체 뭐지?'로 시작된 독서가 끊김 없이, 감탄 속에 마무리되었다. 이 중견작가의 다른 책도 읽고 싶은 마음 간절하나, 상황을 받아들이련다. 한국에서 네덜란드 작가의 소설을 꾸준히 읽기는 어려운 일이다(단 하나, '세스 노터봄'이란 예외는 있으나 그는 기행문이며 미술비평 등 활동 영역이 넓어 출간된 소설은 몇 편 안 된다). 그나마 이 책도 독일어 중역이지 않은가(발트해/북해 연안 국가들 책은 독일어 중역인 예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그렇다면 방법은 타 언어로 읽는 것밖에 없는데, 조사를 좀 해 보니 내가 접근 가능한 언어를 쓰는 국가에서 작가 마르턴 타르트에게 갖는 관심은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뒤늦게 독일어든 네덜란드어든 공부할 수는 없는 일이고... 뭐, 공부야 해 볼 수 있겠지만, 소설을 읽는다는 건 차원이 다른 언어적 접근이지 않은가.
전반적으로 괜찮은 완성도를 보여 주는 번역 및 post-번역 작업이지만, 거슬리는 부분이 없진 않았다. 인물들이 인용하는 작가/철학자와 그 저작물 제목 표기가,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게 한국어화 돼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마르턴 타르트보다 조금 윗 세대이며, 아마 네덜란드 사람 가운데 모르는 이가 없을, 작가 '얀 볼커스'의 <솜사탕>. 추측건대 <Turkish Delight(원제: Turks Fruit)>를 이렇게 옮긴 듯한데, 검색 한 번이면 보다 실체에 가까운 제목을 얻을 수 있었을 게 '솜사탕'(나름 터키쉬 딜라이트의 성정을 품은 단어란 볼 수도 있겠으나) 선에서 마무리된 게 못내 아쉬웠다. 이 소설은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의 폴 버호벤(그렇다, <원초적 본능>의 그 '폴 버호벤' 감독이다)이 역시 미국이 원하기 전의 루트거 하우어를 주인공으로 영화로 만들었단 말이다!
다른 하나는 니체(이 소설을 관통하는 심리 작용 중추라 할 만한)의 <아침놀>. 니체를 제대로 읽은 적이 없는 나도 '서광' 내지는 '여명'으로 알고 있는 그 책이지 싶은데, 괜히 한자어를 써서 '있어 보이려'(?) 했던 구시대 관습에 반기를 들려는 의도인지 뭔지는 몰라도, 대중 일반이 알아챌(그것도 한국어 출판물이 있는 책이라면) 수 있는 방향으로 틀어 주는 게 보다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었을지, 진심으로 묻고 싶다.
하아... 꽤나 멋진 소설인데, 참으로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