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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고원 - 자본주의와 분열증 2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지음, 김재인 옮김 / 새물결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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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개의 고원- 4장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

1923년 11월 20일 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데 무슨 날을 말하는 지 알 수가 없다. 구글링을 해 보니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디플레이션이 심해진 날자라는 것 외에는 알 수가 없다. 147쪽에서 213쪽이니 얇은 책이 한 권이다. 네 개의 질문으로 각 부분을 나누어 기술했는데 3장 보다는 덜 어렵다. 하지만 매우 어렵다. 그냥 읽어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마인드맵으로 그려가면서 읽고 있지만 이해하기 어렵다.

전체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을 퉁쳐서 본다면 언어는 언어외적인 것과 구분하여 이해할 수 없다는 것 같다. 언어의 기본은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명령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직접화법이 아니라 간접화법이라는 것이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행동을 수반하는데 그것은 언어학적으로만 규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여기에서 주류를 이루는 다수의 언어와 소수의 언어가 대립하는데 소수의 언어는 말더듬 또는 반음계와 같이 주류의 언어를 탈영토화시킨다. 3장에 이어 표현과 내용의 관계를 언급하며 각각 독립적이지만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한다. 표현의 분석은 음소와 같은 것이고 내용의 분석은 사물의 분석과 비슷하다. 명령은 비물질적 변형을 만드는데 판사의 선고가 피고에서 죄수로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효력이 발생하는 시간이 항상 따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리좀, 다양체, 고르판이라는 개념이 자주 언급된다. 어떤 정형적이지 않은 (초선형적인?)변화가 항상 있고 그것은 복잡하다는 뜻이며 무엇인가 '되어감'과 같은 것 일게다.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풀어서 쓰기가 어려워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겠지만 예시도 친절하지 않고 워낙 좌충우돌하고 있다. 더구나 선형적이라는 말과 초선형적이라는 말, 비선형적이란는 말들의 차이도 이해할 수 없다.

그래 언어는 복잡하다, 세상은 복잡하다. 아주 미세한 것들은 확정할 수 없이 움직이고 인간이 그것을 제대로 아는 것 역시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근대 이전의 지식은 실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미세변수를 제거하고 주요하게 사용되는 변수만을 동원하여 법칙을 밝혀낸다. (중력 가속도를 계산할 때 공기의 저항을 제외한다) 현대의 세계는 뉴턴의 세계에서 아인슈타인의 세계로 나아왔고 아인슈타인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던 양자적 세계로 들어서 버렸다. 양자물리학자들은 더 많은 변수의 작은 움직임도 고려한다. 그들은 인류의 어떤 측정보다도 오차가 적은 양을 계산해 내지만 이 책처럼 범인들은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책은 인문학계의 양자역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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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 - 제3판 나남신서 410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 나남출판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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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성의 역사1

읽어도 잘 모르는 책을 읽기는 괴로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놓지 못한는 것은 일상에 드러나지 않은 것들을 들추어내는 시선으로 우리의 삶을 알고자 하는 욕망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푸코의 저작 중에는 그런대로 읽을 만하다. (두께 마저 얇다!) 17세기 부터 세기를 넘나드는 잘 모르는 예들을 참으며 읽다보면 뒤통수를 한 대 얻어 맞는 느낌이 드는 책이다. 우리가 이런 것 때문에 성에 관해 관심이 많은 거였어? 그런게 다 권력의 장치 안에 있었단 말이야?

우리의 술자리 안주로 행해지는 성에 관한 담론의 대부분은 해방의 담론이다. 일부일처제를 해체해서 자유로운 성을 보장해야 한다거나 자신의 정력의 감퇴가 삶의 에너지의 감소로 이어지는 불안이나 내면적인 결핍의 문제를 성적 대상을 찾아 해결할 수 있다는 것들이다. 요컨대 욕망은 열여야 하고 삶은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푸코는 이런 것들에 찬물을 끼얻는 것 같다. "막대한 생산과 파괴의 도구를 발전시키는데 그토록 열중한 문명이 시간을 들이고 한없는 참을성을 발휘해서 작금의 성에 관해 그토록 자문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느냐고 우리를 도발한다.

푸코는 17 C 부터 진행된 억압의 가설을 뒤집고 성에 대해 시시콜콜히 알고자 하는 욕망이 또 다른 무엇에 사로 잡혀 있다고 말한다. 현대의 (권력에 의해) 용인된 성생활 장치는 성이라는 상상적 개념을 만들고, 성을 사랑하고 성에 대한 지식을 끌어내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부추켜 졌다는 것이다.

푸코는 권력의 속성이 '죽이거나 내버려 두는 권리'에서 '살게하거나 죽음 속으로 몰아가는 권리'로의 변했다고 한다. 전자는 군주의 '생살여탈권'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칼'로 상징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권력은 물건, 시간, 육체에서 생명을 탈취하는 것에서 절정을 이룬다. 고전주의 시대 이후로는 권력은 복종하는 세력을 만들고 늘리고 정리하는 경향을 띠게 된다. 죽음의 권리는 생명을 관리하는 경향으로 변하게 되어 후자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처음 예는 19세기의 참혹한 전쟁 이다. 이제 전쟁은 군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 전체의 생명을 담보로 한 살육이다. 권력이 생명, 종, 대규모적인 인구현상의 차원에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두번째 예는 사형의 감소이다. 이 이유는 인도주의적 감정 출현이 아니라 권력의 성격과 논리의 변화 때문이다. 권력이 생명의 보장, 유지, 강화, 증대, 조직화로 변했기 때문에 극악무도하고 교정불가능한 범죄자와 사회보호를 명분으로서만 행사될 수 있었다.
다음은 죽음의 개념의 변화를 말하고 있다. 죽음은 다른 세상으로 이행하는 것에서 생명에서 벗어나는 사적인 지점이 된다는 것이다. 권력의 책무로 생명의 관리가 대두된 사회에서 자살은 사적인 죽을 권리가 출현한 지점으로 경악할 만한 현상 중 하나였다.
생명에 대한 권력은 17세기에 형성된 육체의 조절과 18세기 중엽부터 형성된 인구의 조절이라는 두 가지 극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세기에 최고의 권력을 상징하던 죽음의 오랜 지배력을 생명의 타산적 관리로 은밀하게 옮겨가서 생체-권력의 시대가 열린다. 이것은 자본주의 발전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육체를 통제하고 인구를 조절하고 생명일반을 최대로 활용하고 예속화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권력 기관들이 생산관계의 유지를 보장하고 19세기에 고안된 생체-권력기술은 경제과정의 각 세력의 층위에 작용하면서 사회적 차별화와 위계화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 과정에서 금욕주의적 도덕을 넘어 인간이라는 종의 생명현상이 지식과 권력의 영역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살아가는 행위는 더 이상 죽음의 우연과 숙명성 속에서 때때로 떠오를 뿐인 그 접근 불가능한 기반이 아니라, 지식의 통제와 권력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영역으로 일정 부분 넘어가는 것이 된다. 권력은 이제 살해의 위협을 통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떠 맡음으로 육체에 미치게 된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해한 존재, 정치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동물이었으나, 근대인은 이제 정치에 생명을 거는 동물이다. 이 변화로 해서 정치 기술은 육체, 건강, 영양섭취 및 거주의 방식, 생활조건, 삶의 공간 전체를 둘러싸게 된다.

생체- 권력의 확대로 사법제도의 규범화된다. 권력은 생명을 떠맡게 됨으로서 검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조절하고 교정하는 메커니즘을 필요하게 된다. 갈수록 법이 규범처럼 작동하고 조절기능을 갖는 기관(의료, 행정 등)의 연속체에 갈수록 통합된다는 것이다.
19세기에 등장한 이 권력에 저항하는 세력도 권력이 생명과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발판으로 삼았다. 19세기 이후로 권력제도를 문제 삼는 투쟁은 정의의 회복이나 유토피아가 아니라 기본적인 욕구와 인간, 생명을 목적으로 한다. 생명, 육체, 건강, 행복에 대한 권리, 모든 탄압이나 소외를 넘어 누구나 자신의 현재의 모습과 가능한 모습을 발견할 권리이다.

성은 성생활의 장치에서 상상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성은 감춰진 요소인 동시에 의미를 낳는 근원이고 상징적으로 육체의 전체이고 충동의 힘에 연결함으로 자신을 이해하려면 알아야하는 고정된 상상적 지점이다. 성은 수세기를 거쳐서 영혼보다 중요해졌고 사랑을 대체 했고 죽음을 무릅쓸만큼 강한 마력을 행사한다.
그리하여 20 C 에는 기독교 금욕주의라는 가혹한 억압에서 해방되었다는 자랑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성을 사랑하고 성에 관해 이야기되는 것을 모두 귀중하게 여기고 너무나 오랫동안 성을 무시했다고 해서 죄의식을 갖게 만들게까지 되었다고 한다. 푸코는 이 모든 것이 술책이라며 인간이 성의 군주제에 스스로 종속되게 된 과정을 간파해내겠다고 한다.

푸코는 우리에게 열여진 성에 관한 담론과 지식을 추구하는 경향이 권력에 의해 조정된 어떤 장치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 '칼'의 권력에서 '생명을 관리'하는 권력으로 변한 것이 권력의 필요와 음모속에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권력은 생명을 감싸고 돈다는 것이다.
그러면 권력의 이런 필요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 단지 새로운 생산체제나 동원체제를 위해서인가? 왜 노예제 사회는 계속 유지 될 수 없었고, 봉건사회는 농노를 유지할 수 없었는가? 프랑스혁명은 왜 발생했고 노동조합의 권리와 보통선거는 왜 필요하게 되었을까? 마르크스의 주장대로 계급투쟁이 없고 생산관계의 변화가 없었다면 권력의 형태의 새로운 신급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권력의 새로운 신급 자체가 역사의 진보이고 새로운 담론의 출현을 말해 주는 것이다.
또, 그의 말대로 저항 세력의 요구가 권력이 감싸고 있는 생명에 관한 것이라면 혁명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모순 또한 나타나지 않거나 권력의 관리와 조정 내에서 해결될 것이다. 과연 그럴까? 결국 사회구성체는 사회적 생산물의 소유방식의 모순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으로 인한 불평등의 심화는 생명 그 자체를 위협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생명의 재생산을 포기하고 있지 않은가? 생명을 유지하고 삶을 고양시킬 수 있는 일자리를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노후의 안락한 삶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권력의 기술은 더 교묘해졌고 우리의 모든 것을 관리한다. 그들은 나의 지출 내역, 병력, 학력, 재산 내역을 상세히 알고 있고 나의 행적과 생각을 알고 있다. 푸코의 말대로 내가 추구하는 지식들이 그들이 설정한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것이라면 섬뜩한 것이다. 우리를 해방하려면 성과 사랑과 생명을 풍성히 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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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 꽃잎보다 붉던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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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만에 소설을 읽었다. (좋은 사람과 같이 사는 덕이다. )
숙제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깔끔하고 정성스럽게 차려진 음식같은 문장에 빠져들었다. 칠십이 넘은 작가의 신작인데 젊은 날의 작품보다 더 섬세했고 아픔을 끌어안는 마음이 깊었다.
기억은 지속되며 현재에 의해서 변하기도 한다. 또 희미해지거나 사라질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가장 오랫동안 삶에서 깊이 각인되는 것들은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이 우주에서 소멸해가는 걸까?
이 소설은 이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노부부의 이야기이지만 청매의 가슴 시림과 홍매의 그리움이 있다.
이 소설을 읽고나면 매화가 필 때가 몹시 기다려 질 것이다.

"왜 사랑하는 것을 가까이 하는 게 때로 해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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