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의 약속 매그레 시리즈 8
조르주 심농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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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들 만이 아는 세상이란 것이 간혹 있다. 작은 사회, 닫힌 사회 같은 지역적인 특성과 비슷할 수도 있지만 어떠한 경험을 통해 공유되는 환경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극한의 환경 속에서 버텨온 이들만이 가지게 되는 의리. 또는 그들만의 세계에서 돌고 돌며 함구하는 꺼림직한 무언가. 지역사회라면 그 지역의 분위기만 파악하면 그만이지만, 환경은 정해진 그 순간 밖에 느낄 수 없는 정취다. 그래서 이미 사라지고 없는 흐릿한 잔상 만을 단서로 추정해야 되기 때문에 어려울 수밖에 없다.

부인과 함께 여름 휴가를 가려던 매그레 반장은 지인이 보낸 편지를 받고 휴가지를 변경해 페캉으로 떠나게 된다. 페캉에 정박한 대구잡이 저인망 어선인 오세앙 호에서 선장 살해 사건이 발생했고, 용의자로 검거된 전신 기사이자 지인의 제자인 피에르 르 클랭슈의 결백을 밝혀 달라 했기 때문이다. 수감되어 있던 클랭슈가 노란 구두를 신은 누군가가 선장을 공격하는 순간을 목격했다는 증언을 해서 사건은 순조롭게 풀릴 것 같았다. 그런데 조작된 흔적이 전혀 없는 선장의 유서가 발견되면서 모두가 당황하고 마는데...

뱃사람들 만의 세계를 다루는 내용이다 보니 복잡한 면이 꽤 보인다. 사건 자체의 난해함이라기 보다는 속내를 알기 어려운 사건 관계자들의 모습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을 쓸 때 없이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는 인상도 있다. 동료 의식을 통해 나오는 의리나 도리 같은 건 아니다. 조직이 있으면 늘 대두되는 침묵의 규율이라 하는 오메르타에 가깝다. 하지만 하나 같이 신경질 적이고 불길한 인상만 가득한 분위기를 보다 보면 점차 알게 된다. 그들 역시 제대로 파악이 안 되는 대혼란이라는 걸 말이다.

겉으로 볼 때는 굉장히 사소한 사건처럼 보여도 장소가 장소다 보니 심각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고 봐야 한다. 자연스러운 일상이 있던 육지가 아니라 출항을 떠나 바다 한가운데 있던 배라는 특수한 상황이라 그렇다. 거친 바다 위의 생활은 사소한 실수에도 목숨이 왔다갔다 하기에 늘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긴장감과 함께 한다고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이래서 규칙에 엄격할 수밖에 없다고. 그런데 이러한 분위기를 흩뜨리는 일이 생긴다면 어떨까. 언제나 한결 같은 규칙이 깨지고 질서가 망가지니 남은 건 이거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 계속되는 비정상적인 긴장감과 극한의 환경이 만들어낸 뒤틀린 감정들 뿐이다.

사람의 감정은 주변 환경에 따라 쉽게 휩쓸릴 수도 있다는 걸 여러 사례를 통해 알긴 안다. 그럼에도 멀쩡하던 사람이 이렇게 까지 분별력 없고 극단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만도 하다. 한순간의 충동으로 이성을 잃었다고 보기에는 바다와 육지에서의 모습이 너무 달라서 그럴 것이다. 이건 양심이 없어서 그렇기 보다는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크게 느끼기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방어기제이자 돌발 행동이라고 봐야 한다. 차라리 뻔뻔하게 모르쇠로 일관할 수 있었으면 모를까, 바다 위에서 잃어버린 이성이 육지에서는 다시 돌아오니 그만한 비극은 또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정직하고 평판이 나쁘게 살아오지 않은 이들이라 더 그렇다.

결국 환경이라는 안개를 걷어내고 밝혀낸 진상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나 다름 없다. 어느 누구를 탓하기도 어렵다. 의미를 잃어버린 선원의 약속 앞에서 모두가 미쳐 있었고, 모두가 피해자였으며,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었던 부조리 그 자체였으니까. 매그레 반장에게는 더 큰 파국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바다에서 일어난 일이 망령처럼 계속 남아 연이은 비극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이대로 끝내야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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