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주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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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나는 물

미시마야에서 열리는 괴담대회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어느 가게의 대행수 후사고로와 어린 견습 점원 소메마츠. 후사고로의 말에 따르면 소메마츠가 있으면 물이란 물은 전부 달아나서 바싹 말라 버린다고 한다. 이걸 소메마츠의 장난으로 여기고 매우 화가 난 상황인데, 정작 소메마츠는 자신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살던 마을에 있던 신이 들러 붙어서 저지른 것이라 주장한다. 실제로 소메마츠가 흑백의 방에 있던 사이에 주전자와 화병의 물이 순식간에 말라버리는 일이 발생하는데...

옛날에는 지금처럼 상수도 같은 것이 거의 없었기에 물이 귀해서 이와 관련된 일이라면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물이란 것이 과해도 문제긴 하지만, 없어도 문제가 생기는 점에서 자연과 미신에 의지하면서도 동시에 경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기에 작중의 이야기 주인공인 소메마츠는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다. 가끔 무섭거나 기묘한 이야기에 나오는 신기한 일을 몰고 다니는 아이 취급을 넘어, 민폐 그 자체로 여겨 지니까.

필요와 불필요의 문제가 작중 핵심이다. 이게 물건이 아닌 존재로서의 가치를 따지는 거라 더욱 복잡하다. 사람도 그렇지만 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보면 이런 경우가 있다. 필요할 때 불러 놓고, 나중에 필요 없어지니까 소홀히 대하는 상황.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이거다. 왜 필요가 없다고 무조건 쓸모 없는 취급만 하는 걸까. 세상에 쓸모 없는 것이란 없다. 어딘가 쓰이는 일이 있고, 필요로 하는 곳이 있기 마련이다. 이걸 못 알아보는 이들이 나쁜 거나 마찬가지다. 필요로 하는 곳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 멀쩡히 도움이 될 존재를 망가뜨리고 있으니 말이다.

다소 기괴한 면이 있으나 소메마츠와 함께 하는 신이 생각보다 귀엽게 묘사된 편이라 대체로 유쾌한 내용이다. 아무래도 필요에 대해 다루다 보니 사람이든 신령이든 외부의 편견과는 다르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무작정 무서운 면만 돋보이지 않게 했다고 본다. 이해심 많고 좋은 사람들에게 유쾌함을. 이해심이 전혀 없는 고약한 사람들에게 벌을. 이렇게 정리가 되겠다.

덤불 속의 바늘 천 개

나막신 가게인 에치고야의 오타카와 세이타로와 함께 꽃놀이에 따라나선 오치카와 견습직원 신타. 도중에 미시마야 옆집에 있는 바늘가게인 스미요시야의 안주인 부부와 외동딸 오우메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스미요시야 가족들과 거리를 두며 따라 다닌 얼굴을 가린 여자의 존재를 목격하면서 오치카는 신경이 쓰이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해 오치카의 숙모인 오타미는 무언가를 알고 있으면서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곧 있을 오우메의 혼례가 끝나고 흑백의 방에서 스미요시야 안주인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자녀에 대한 문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아무 탈 없게 잘 자라기 만을 바랄 뿐이지만, 언제 어떻게 위험에 처할지 모를 일이다. 옛날에는 이런 부분에서 더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치료가 힘든 질병 같이 현실적인 것도 그렇고, 말도 안 되는 미신이나 설명하기 어려운 괴이한 일 같은 것도 있었으니. 여러 방면에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신으로 인해 벌어진 가족 문제이자 저주에 가까운 일이라 여러모로 복잡하다는 인상이다. 이 저주라는 것이 오컬트에 나오는 괴이한 것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근간을 따라가면 결국에는 사람이 원인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나타낸 것이라고 보면 쉽다. 하지만 대부분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결국은 사람 아닌 존재의 짓으로 여기는 일이 많다. 살아 있는 누군가의 악의라 믿고 싶지 않아서 일까, 우연의 우연이 겹쳐서 그렇게 보이는 걸까. 아니면 의심 가는 사람이 있더라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책임을 떠넘기는 걸까.

가까운 사람 간의 질투가 더 무섭다고 하던가. 겉으로는 잘 지내다가 어떤 식으로든 폭발하면 매우 무섭게 돌변한다고 하니까. 참으면 병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건 이런 뜻일 테다. 서로 조심한다고 하면서 무작정 참기만 하니까 이상한 형태로 표출되고 마는 것이다. 원인을 알 수 없이 어디가 갑자기 아픈 것부터, 생각지도 못한 음습한 짓을 벌인다던가 하는 일이 일어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어디까지나 표현의 문제나 다름 없다. 표현을 하지 않으니 어떤 생각인지 알 수가 없고, 표현을 하지 않으니 마음에 쌓아두게 되고, 표현을 하지 않으니 마음의 병이 된다. 무엇보다 가까운 사이던 아니던 간에 모든 걸 아는 듯이 여기는 것부터가 큰실수다. 사람은 겉만 봐서는 알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속을 터 놓고 솔직하게 말을 해야 가까워지지, 숨기는 것이 많으면 가식만 늘어 멀어질 뿐이다.

안주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미시마야의 견습직원 신타가 습자소에 갔다가 심하게 다쳐서 돌아왔다. 신타는 누구와 싸운 건 아니며 나오타로라는 아이가 관련된 일이지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주장한다. 나오타로는 고용살이를 하던 아버지가 화재 사고로 돌아가신 이후, 어쩔 수 없이 사촌 집이자 비싼 값에 팔아서 악평이 많은 채소 가게인 야오노에 양자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급격한 환경의 변화 때문인지 나오는 이따금 엄청 사소한 일로도 갑자기 화가 나면 짐승처럼 날뛴다고 한다...

환경의 변화는 어른이라도 잘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경우도 많은데 어린 아이라면 오죽할까. 안 그래도 아직 의사 표현이 서툰 시기인데 이래저래 요구 사항만 늘어나니 돌발 행동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을 만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최선일지 고민해 봐야 한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해피엔딩 같은 것이라면 좋겠지만 현실은 언제나 냉혹한 타협의 연속이다.

작중에서 나온 안주라 지칭된 존재는 일종의 어린 아이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 싶다. 사람의 나이나 성장 정도에 따른 어리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어떤 만물에 있을 법한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면 말이다. 어쩌면 요괴 같은 존재들은 어린 아이에 가까운 존재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면 그저 성가시다 못해 때로는 무섭다는 인상이 생긴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악의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서로가 서로에게 서툴다 보니 발생하는 오해라고 본다.

자연의 이치로 인해 가까워질 수 없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든다. 어른에게도 어른만의 생각할 시간과 설명이 필요하듯이, 아이에게도 똑같이 필요하다고. 그냥 어린 애라서 이해하지 못할 게 뻔하니 받아들이라고 강요하거나, 그렇다고 일방적인 요구 사항을 들어주는 건 잘못됐다. 필요한 건 어떻게 해야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스스로 깨닫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언제나 똑같을 수 만은 없다. 하지만 똑같지 않다고 모든 게 사라지는 건 아니다. 마음 깊이 남는 인연이 있다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혼자가 아니라고.

비록 아이의 관점에서 다루긴 했지만, 이건 어른에게도 해당되는 문제다. 아이는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지 않기에 이해를 못하는 일이 생긴다. 반면 어른은 오히려 설명을 해줘도 무작정 단정 지은 결론 때문에 이해를 못하는 경우다. 이걸 보면 설명을 해줘도 못 알아 듣는 건 아이가 아니라 오히려 어른 쪽이지 않을까 싶다. 나이가 들어서도 사람이 바뀔 수도 있지만 쉽지 않다는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무작정 꽉 막힌 사람이 아니라면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 해내는 법이다.

으르렁거리는 부처

최근 들어 흑백의 방에 시답지 않은 사람만 드나들어 뒤숭숭한 상황에서 오치카는 나오타로의 친구들이 알고 있던 가짜 스님 교넨보를 다음 손님으로 결정한다. 예상보다 사나운 인상의 교넨보는 이제는 정직하게 살고 있다면서, 가짜 스님 행색을 하던 시절에 겪은 일을 들려준다. 어느 산간 지방을 지나다가 발이 미끄러져 사고를 당했다가 근처 마을 사람들에게 구조됐다. 그 마을은 외관과 다르게 풍요로운 곳이었고, 가쿠넨이라는 스님이 사실상 마을을 대표하고 있었다. 그런데 교넨보의 몸 상태가 많이 좋아졌을 무렵에 우연히 마을의 비밀을 알게 되고 마는데...

외부와 고립되어 숨겨져 있던 마을의 비밀. 무서운 이야기나 영화에서 은근 자주 나오던 소재라 이제는 익숙하다. 하지만 이 작품의 경우는 처음부터 비정상적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광신적인 요소가 나오긴 나와도 끔찍함을 돋보이는 요소가 아니라 사람의 어리석음에 대해 다루는 교훈적인 부분에 가깝다. 어떻게 보면 불교 설화 같다는 느낌도 있다.

단순히 집단 이기주의와 개인에 대한 사적제재 문제로 인한 인과응보를 다룬 내용으로 보일 수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가짜 스님 행세를 하던 사람이고, 끊임없이 부처님의 존재에 대한 논쟁이 나오다 보니 종교에 대한 내용으로 생각될 수도 있고. 하지만 실제로 말하고자 하는 건 이거라고 본다.

자비.

남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며 도와주는 마음.

부처님이 곧 자비이기에 일종의 비유로 쓸 수도 있겠다. 그렇기에 작중에서 말하는 부처님이란 곧 자비에 대한 문제다. 부처가 없다는 건 자비가 없다는 뜻이고. 부처가 두렵지 않다는 건 자비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결국 자비 하나 없는 곳에 남은 건 무엇인가. 원망과 저주를 담은 냉소 뿐이다.

이 책의 작품 중에서 가장 무섭다는 인상이면서도 큰 의미를 주기에 마지막 에필로그까지 깊은 인상을 남기게 한다. 자비가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부처님은 멀리 있다고 느껴지면서도 사실은 가까이에 있다고. 단지 그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아무렇지 않게, 또는 다소 매정하게 흘려 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를 통해 사람과 사람이 인연으로 이어진 세상이 마냥 어둡지 않으며 밝은 곳을 찾을 수 있다고 느낀다. 미시마야에서 만들어진 인연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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