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매켄 단편선 1 아서 매켄 단편선 1
아서 매켄 지음, 이미경 옮김, 정보라 해설 / 와이드마우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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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신, 판

레이먼드 박사의 집에 초대를 받은 클라크. 용건은 회백질을 건드는 시술을 통해 세상의 이면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한 실험을 같이 지켜 봐달라는 것. 실험 대상자인 메리는 시술 직후 백치가 되어버리지만, 레이먼드 박사는 그녀가 세상의 이면에서 나타난 자연의 신, 판을 봤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클라크는 레이먼드 박사의 실험이 터무니 없다 생각하면서도, 판의 흔적을 찾다가 헬렌이라는 여자와 뭔가 관련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데...

세상의 다른 이면이라는 점만 보면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인 <저 너머에서>와 유사하게 보인다. 초자연적인 영역을 과학을 통해 증명하려는 면에서는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차이점이라면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은 눈으로 보이는 현상 그 자체를 다루고, 이 소설은 그 세계가 있다는 증거인 어떠한 존재에 대한 증명이 강조된다. 이 중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이 나중에 나왔기 때문에 아서 매켄의 소설이 어느 정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 나타나는 자연에 대한 묘사는 뭔가 기묘한 느낌이다. 분명 묘사 자체는 아름다운데 어딘가 불길하고 음침한 인상을 준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넘어서서, 아주 오래전부터 지구 상에 존재해온 자연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공포. 그나마 현실에서 비교해 볼 수 있는 거라면 숲 속에서 조난 당한 상황에서 느껴지는 주변 모습 정도라고 본다. 이게 인적이 드문 외진 곳에서만 느껴지는 것이라면 모를까, 아무도 모르게 도심을 활보하면서 야생의 공포를 뿌리고 다니니 파급력이 엄청나게 나타난다.

왜 하필이면 작중에서 다루는 공포의 존재가 판인지 처음 봤을 때 살짝 이해하기 어렵기도 했다. 단순히 그리스 신화에서 나온 자연의 신이라 자연의 공포를 반영하기 그럴싸 했을 것이라는 정도 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판에 대해 여기저기 찾아보니 공포로 나타내기 꽤 적절할 만했다. 일단 판의 외형부터가 인간의 상반신과 얼굴을 가진 산양 혹은 염소인데, 흔히 악마의 이미지 하면 떠올리는 것에는 염소와 산양이 있다. 악마의 이미지에 염소와 산양이 있는 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티로스라는 정령에서 유래된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사티로스의 외형이 염소가 된 건 판과 엮이면서 생긴 것이라 한다. 또한 판은 사람을 갑작스러운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 행동을 즐기는 특성이 있고, 이런 점 때문에 영어 단어인 패닉(Panic)의 어원이 판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이렇게 정리해 보니 작중의 판이 어떤 이미지였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사람이 인식해서는 안 될 자연의 공포 그 자체. 신인지 악마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는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존재. 돌아다닌 곳마다 죽음과 혼란을 일으키는 공포의 화신. 여기에 판의 기원과 실체에 대한 반전까지. 제목에 붙은 그대로 위대한 신, 판이 맞다. 다만 이런 부분을 작중에서 친절하게 나타내지 않고 오로지 독자의 해석에 맡기듯이 애매모호한 서술이라 쉽게 읽을 만한 내용은 아니긴 하다. 책 마지막에 작품 해설이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이라고 본다.

내면의 빛

런던의 유명 레스토랑에 방문했다가 오랜 친구인 다이슨을 만나게 된 찰스 솔즈베리. 다이슨은 궁핍하게 살다가 돌아가신 삼촌의 유산을 물려 받으며 생활이 편해졌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원하던 연구를 할 수 있게 됐다면서 최근 런던의 교외 지역인 할레즈던에 살았던 어떤 의사에게 발생한 사건을 들려주는데...

스토리 구조만 보면 <위대한 신, 판>과 유사한 점이 있는 편이다. 세상의 이면에 대한 미지의 실험을 했다가 재앙과 마주해버린 연구자라던가. 합리성을 추구하면서도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궁금증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깊숙이 빠져드는 주연 인물이라던가. 다만 세상에 유해한 영향력을 끼치고 주연 인물들이 어떤 식으로든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던 <위대한 신, 판>에 비해, 이 소설은 제목처럼 개인의 내면에만 영향을 끼치는 정도로 작게 나타나고 사건과 주연 인물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부분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다. 사소하게 보이지만 제법 큰 차이점이다.

이 작품에서도 작중에서 벌어진 사건의 진실과 원인에 대해 애매모로 하게 나타내다 보니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위대한 신, 판>과 비교해 보면 작가가 어떤 의도로 나타낸 것인지는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위대한 신, 판>의 판이 실존의 문제라면, 여기서 나오는 미지의 무언가는 관념적인 문제로 보인다. 더 쉽게 설명하자면 눈앞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공포와 심리적인 공포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여기서 말하는 심리적인 공포란 단순한 미지의 공포가 아니다. 종교와 오컬트 같은 신비의 영역이 아니라 의학과 과학에 해당되는 현실적인 부분이다. 작중 묘사만 보면 오컬트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게 주술이나 종교적인 것이라고 확실한 언급은 없다. 그저 하나의 발견, 즉 과학적인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발견으로 인해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두려움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이 새로운 물질이나 균의 발견으로 인해 신체에 발생할 영향, 대표적인 것으로 각종 질병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이런 걸 보면 미지의 공포란 무조건 비현실적인 것이라 할 수는 없어 보인다. 또한 이게 작가가 살았던 19세기는 물론이고 지금 현재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공포라는 점에서 과학적 발견의 공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붉은 손

선사시대 낚시 바늘로 추정되는 유물에 대해 논쟁을 벌이던 다이슨과 필립스. 필립스는 분명히 진품이라 하고, 다이슨은 위조품이라 주장하는 상황에서 둘은 가벼운 산책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점차 빈민가로 들어간 그들은 우연히 살인사건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거기서 붉은 손 형태의 상징물이 그려진 걸 발견한 다이슨은 범인이 현대에 남아 있는 원시인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데...

얼핏 보면 추리소설처럼 보이는 구성이지만(사실 앞의 <위대한 신, 판>과 <내면의 빛> 역시 추리 소설 같은 분위기가 있긴 있다.), 신비로운 분위기와 오컬트가 강조된다는 점에서 고딕소설에 가깝다.

암호문에 대한 해석 같이 그럴싸한 부분이 있어서 하나의 미스터리라 할 수는 있겠지만, 아무래도 결론만 보면 근간은 다르기에 추리소설이라 하기 어렵다. 특히 작중에서 나온 불가능성의 원칙이라는 조사 방식은 이름만 거창할 뿐, 그저 우연에 모든 것을 맡기는 식이라는 것만 봐도 추리와 고딕이 얼마나 다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단순한 고딕소설이 아니라 추리소설처럼 보이게 진행되다 보니 뭔가 현실성을 부여해서 결말에서 나타날 공포가 더욱 부각된다고 본다.

원시적인 것에 대해 다루는 부분이 많은데, 이게 사람의 퇴행적인 면을 비유한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한다. 제 아무리 많이 배운 사람이나 현대적인 생활에 익숙한 보통 사람이라 할지라도 원시인처럼 야만적인 행동을 보일지 모른다고 말이다. 이 야만적인 부분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여러 사유로 눈이 멀어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하지 않는 무뢰배를 말한다. 재미있는 건 이런 퇴행적인 면이 나타나게 된 원인이 원시적인 오컬트와 관련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이 원시적인 것은 단순 비유와 현실 사건으로서의 완결성에서 끝나지 않고 실존하는 공포까지 연결성을 가지게 된다. 이게 바로 앞에서 언급한 현실성을 부여해서 공포를 부각 시키는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의 마지막에 있는 작품 해설은 반드시 읽어보기를 바란다. 아서 매켄의 작품에서 대체로 어떤 면이 강조됐고 어떠한 특징이 보이는지 상세히 알려줘서 어렵게 느껴졌던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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