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 설자은 시리즈 1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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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미스터리, 남장여자

이 세 가지 키워드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이유는 충분했다. 역사 좋아하고, 미스터리도 좋아하고, 남장여자는 (로맨스 위주면 별로지만) 그 속성 자체가 미스터리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다만, 시리즈물이라 해서 시작해, 말아 고민하다가 어느 날 도서관에 갔는데 반납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이 책을 보고 덥석 집어왔다.

일단 국내 역사 미스터리 소설은 정말 오랜만이다. 많이 읽지도 않은 국내 역사 미스터리 중 통일신라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또, 보통 묵직한 역사 미스터리와 달리 전반적으로 밝고 명랑한 분위기라 느낌이 새롭다.

이 책을 읽다보면 국사 시간에 들었던 단어들이 나온다. 당 유학생, 6두품, 화랑, 금입택, 보덕국, 상대등, 길쌈 등등. 어렴풋한 기억 한 켠에 남아있는 단어들을 볼 때마다 '와, 진짜 통일신라네(?)' 하며 설렘을 느꼈다.

보통 시리즈물은 각 편 또는 전 시리즈에 걸쳐 하나의 큰 줄기가 되는 사건이 있고, 그와 관련된 소소한 사건들이 터지는 반면 이 작품은 옴니버스식으로 4가지 사건이 일어나고, 각 사건은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다 보니 사건 그 자체보다는 이야기 전개에 더 집중하게 된다.

첫 번째 사건은 설자은과 목인곤의 만남, 두 번째 사건은 설자은의 오빠의 정인이었던 산아(그리고 원치 않았지만 그녀의 남편)와의 연결고리가 된다. 세 번째 사건은 설자은의 가족인 호은과 도은에 대해 좀 더 알게 되고, 설자은, 도은, 인곤이 좀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된다. 또 설자은이 왕족과 관계를 맺는 사건이기도 하다. 마지막 네 번째 사건은 본격적인 시리즈의 시작의 발판이 된다. 앞선 사건들에서 설자은의 이름을 듣고, 마지막 사건에서는 그녀의 활약을 직접 목격한 왕이 설자은을 자신의 검으로 발탁한다.

캐릭터 설정도 흥미롭다. 진골에서 6두품으로 강등된 가문 출신인 설자은은 여자(원래 이름도 미은)지만 타고난 머리가 좋아 가문을 일으켜야 한다는 중책을 맡고 병사한 오빠의 이름과 신분으로 당 유학을 갔다 온갖 고생 후에 돌아왔다. 본인이 원해 선택한 길이 아니었던만큼 돌아와서도 적당한 벼슬을 얻어 자기 앞가림하며 누구에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살길 원한다.

자은을 남장여자로 살기 한 장본인인 자은의 오빠 설호은은 겉보기엔 멀쩡하지만 어딘가 정상이 아닌 것 같은 인물이다. 아무리 가문을 위해서라지만 여동생을 남자로 살게 한 것만 봐도 범상치 않다. 거기에 결혼할 여자들에게도 현대인 시각에서 봐도 정신 나간 소리를 해 대차게 차인다. 자은의 여동생 도은은 산학과 길쌈에 탁월하고, 가문의 안주인 역할을 야무지게 해내는 당차고 활발한 아가씨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신선한 설정이었던 인물은 목인곤. 백제 유민이자 장인이다. 흔히 망국의 사람이라면 보통 나라 잃은 설움이나 울분에 차 있을 것 같은데, 목인곤은 딱히 그렇지 않다. 나라가 망하고 시간이 좀 지나서 그런가? 다만 장인으로서 백제의 장식기술에 대한 자부심은 엄청나다. 그는 특유의 능글맞은 성격과 씩씩함으로 설씨 가문의 식객으로 들어와 자은과 함께 여러 사건들을 해결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주인공인 설자은이 작품 내에서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설자은의 오빠인 호은이나 동생 도은, 목인곤의 캐릭터성이 더 돋보이고, 사건 해결에 있어서도 설자은보다는 목인곤의 역할이 더 크게 느껴진다. 마지막에 가서야 설자은이 사건 해결에 주도적으로 나서는 정도?

하지만 시리즈물의 첫 작품은 보통 주인공의 배경이나 설정을 설명하며 복선을 까는 역할이 더 크니까, 앞으로의 작품에서 설자은의 역할이 커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왕의 흰 매가 된 설자은이 앞으로 어떤 활약을 펼치게 될지, 그 과정에서 목인곤은 무슨 역할을 할지 기대된다. 마지막에 등장한 악역이자, 자은과 같은 집사부 소속이 된 진오룡과는 어떤 관계를 형성할지 궁금하다. 당시 6두품과 진골간의 차별과 갈등이 어떻게 그려질까? 호은과 도은 남매의 앞날에도 관심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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