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평점 :
판매중지


한 번 보기 시작하면 절대로 놓을 수 없는 마성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 정유정의 신작..이라고 하기에는 나온 지 꽤 된 작품이지만 어쨌든 신간이 나왔다길래 봐야지 봐야지 하다가 드디어 봤다! 7년의 밤, 내 심장을 쏴라, 28년에 이어 이 작품까지 봤으니, 작가님의 장편은 모두 다 봤다. 흐흐흐.


작가님의 다른 작품도 그렇듯 워낙 이야기가 조밀하게 흘러간다. 등장인물이라고는 주인공 유진과 어머니, 이모, 이복형제 해진, 죽은 형과 아버지, 22층 사는 강아지 헬로와 헬로 견주, 그 외로는 꼭 필요할 때만 등장하는 용이네 호떡집 사장님과 형사 (경찰인가?) 두 명이 다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장소도 집을 거의 벗어나지 않고, 나가봐야 집 근처가 전부다. (건장한 성인 남자가 뛰어서 1시간 반 안에 도달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인) 무대가 좁아서 그런가 더 긴장을 놓을 수 없다. 영화로 만들어도 재미있겠다 싶다.


주인공 유진은 올해 이십 대 중반의 남자다. 이제 막 로스쿨을 합격했다. 간질을 앓고 있다. 그래서 그 좋아하던 수영을 그만뒀다. 평생 약을 먹으며 관리해야 하고, 혹시 물속에서 발작이라도 일으키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진은 하루라도 약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시합을 앞둔 어느 날, 우연히 약을 걸렀다가 몸이 가뿐해지고 기운이 펄펄 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시합에서도 기존의 기록보다 확연히 단축되는 결과가 나왔다. 이를 계기로 의사의 말을 듣지 않고 멋대로 약을 먹다 안 먹다 한다.



참 이상하다. 약을 먹지 않으면 자꾸 밖으로 나가 배회하고 싶은 '개병'이 도진다. 그러면 발작을 하고 기절을 하는지, 약을 안 먹은 날 몸에 넘치는 기운을 감당하지 못 해 밖으로 기어코 기어 나간 날은 필름이 끊기듯 기억이 끊겨있다. 이 증상이 바로 엄마가 수영을 그만두게 한 이유다. 게다가 유진과 유진의 엄마는 아빠와 형을 바다에서 잃었다. 가족여행을 갔다가.



엄마는 필사적으로 유진의 수영을 말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십 중반의 다 큰 아들을 통금시간까지 정해가며 관리한다. 유진의 말에 따르면, 유진의 인생은 남이 깔고 앉은 방석이다. 자신의 뜻대로 했던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날 새벽, 그놈의 개병이 도져 밖에 나가 헤매다 들어와 잠든 유진은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 눈을 뜨게 된다. 그리고는 몰랐던 자신의 정체를 알아가게 된다.


작가님의 작품은 요샛말로 참 '쫄깃'하다. 빈틈도 쉴 새도 없다. 아주 섬세하고, 의료용 장비처럼 날카롭고 번뜩이는 듯도 하다. 작품 속 악인은 나쁜 놈보다는 못된 놈에 가까운 느낌이다. 좀, '덜 된 인간' 느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은 다 타고난다고. 사실 어릴 땐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하며 살다 보니 이 말을 철석같이 믿게 되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나쁜 놈들도 타고 나는 건데, 후천적 노력으로 변화를 주기 힘들뿐더러 평범한 인간의 논리로는 설득도 불가능하다. 똑같이 극한 상황에 처한다 해도, 자기 눈 찌르는 사람이 있고 남의 눈 찌르는 사람이 있다. 타고난 미친놈의 시선에서 쓴 이야기라 미친놈의 입장을 대변하는 느낌도 들었지만, 미친 짓을 하면서 변명 따위를 하다니 더욱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님의 소설은 언제나 재미있다. 이런 팽팽한 이야기를 작가님이 아니면 누가 쓰겠냐 말이다. 다만 두 번은 못 보겠다. 신경줄이 끊어질 것만 같아서.


참, 크레마로 책 보는 건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5
어렵사리 차지한 형의 짝꿍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내주어야 했다. 고지가 코앞인데, 까다로운 관문들을 형과 동급으로 통과한 마당에, 고작 편도염 따위로.

11
내 인생은 두 여자가 깔고 앉은 방석이나 다를 바 없었다.

58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단둘이 있을 때의 해진은 나와 가장 친한 것 같았다. 단둘이 있을 때 어머니 역시 그랬다. 오로지 나만 바라보면서 사는 것 같았다. 세 사람이 함께 있으면 나는 늘 차순으로 밀려나는 기분이었다. 그런 분위기가 아주 자연스럽게 형성된다는 점에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런 내가 쪼잔한 놈처럼 느껴져서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126
물속은 어머니가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온전히 나의 세상이었다. 그 안에서 무엇이든 해날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뭐든.

130
운명은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한쪽 눈을 감아줄 때도 있겠지만 그건 한 번 정도일 것이다. (...) 올 것은 오고, 벌어질 일은 끝내 벌어진다. 불시에 형을 집행하듯, 운명이 내게 자객을 보낸 것이었다. 그것도 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196
망각은 궁극의 거짓말이다.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완벽한 거짓이다.

354
어머니가 옳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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