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구두당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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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작가의 작품은 <위저드 베이커리>와 <아가미>를 본 것이 전부였지만, 환상적인 소재를 통해 따뜻한 시선을 그려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동화를 빌어 또 다른 이야기를 창조해냈다는 것이 신선해 '아묻따' 구입한 책.


 

 

<작가의 말>에서처럼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 봤을 법도 하지만 그것의 출처가 정확히 누구의 어디였는지는 살짝 가물가물한 여러 개의 원본 화소들이 혼재해 있다.' 하나의 이야기가 꼭 하나의 동화만을 가지고 그려낸 이야기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동화'라는, 시대도 배경도 모호한 공간에서 초현실적인 일들을 겪으며 인간 세계를 거꾸로 뒤집어 보여주는데, 이런 점에서 차라리 다큐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꾸며주는 말이 많은 영어식 문장과 다소 냉소적인 어투로 그려내는 이야기 속에는 재미있게도 곳곳에 한국식 문화가 숨어있다. 그래서 더 '동화'라는 몽환적인 주제를 더 잘 살려준다. 장치는 비현실적이나, 인간을 내밀하게 이해한 작가의 힘 있는 필력 덕에 자꾸만 책 속의 긴긴 문장을 곱씹게 만든다. 전작들을 읽을 때에는 알지 못 했던 차가운 문체도 좋다.


 

 

옛날이야기, 동화, 설화, 민담 등등에는 계속해서 들춰보게 되는 무언가가 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래오래 살아남은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이야기를 원하는 인간의 본능을 가장 원초적으로 자극하는 것들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가벼운 듯 쉬운 듯, 하지만 읽고 난 후 그냥 넘길 수 없는 구병모식 환상동화. 다 필요 없고, 정말 재미있다.

45
실은 그까짓 거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며 코웃음 치실까 두려워 숨기고 있었답니다. 정말 두려웠던 것은 그 코웃음마저 감사히 여길 나 자신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95
그들 인생의 가장자리에 불과한 내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99
생활을 위해, 그것을 뒷받침하는 노동을 위해 스스로의 실루엣을 기꺼이 지우거나 돌출부를 깎아 냄으로써 한없이 둥그스름해지고, 그러므로 언젠가는 평평해지며 밋밋해지는 일이 당연한 삶.

122
시간은 꺾이지도 역류하지도 않고 앞으로만 나아간다. 도모해야 할 것은 등 뒤가 아닌 눈앞에 있다.

145
우리의 대화는 긴박하고 차갑고 예의 발랐으나 그 모습은 언제 끊어내도 무방한 절취선을 서로에게 긋고 있음을 뜻했고, 서로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230
나가는 문을 찾지 못 할 만큼 나는 이곳에서 오랜 시간 길들여진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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