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 소설 전집 - 전5권 김승옥 소설전집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2015.06.27

나는 단편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단편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한정된 배경안에 한정된 이야기가 들어가 있어서 좀 어수선하고 집중이 잘 안된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드는 작가의 책을 만나면 그 작가의 작품을 쭉 따라서 읽어보는 편이라 여태까지 단편을 나름대로 읽어보았는데, 딱히 인상 깊은 작품은 없었다. 그러다가 김승옥님의 단편들을 읽어보고 이게 바로 단편의 맛이구나, 알게 되었다.


검색을 해보니 작가님은 1941년에 오사카에서 태어나 순천에서 자랐다고 나온다. 일제 강점기에 이 나라를 지배한 나라에서 태어나 고국에서 자란 작가님이라니. 그것만으로도 이야깃거리가 많을 것 같다. 다른 얘기지만 그런 분과 동시대를 살고 있다니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정말 파란만장 했나보다.


단편 '생명연습'은 작가님의 첫 작품이란다. 이 작품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셨다는데 어떻게 이런 작품이 처녀작일 수 있을까. 말도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식이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뭐랄까 우리나라 단편의 틀을 잡아준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진행된다. 오랜만에 교수님을 만나 상의를 하려던 주인공은 어쩐지 용건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과거의 일을 생각한다. 사람좋고 웃음 많은 교수님도 오늘은 어딘가 평소와 다르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죽음을 생각한다.


'나'는 어린시절 아버지를 전쟁통에 여의고 어머니, 형, 누나와 함께 살았다. 나이 마흔에도 젊은티가 났던 어머니는 아버지와 닮은 사내들을 집으로 들인다. 형은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누나는 어머니에게 연민을 가진다.


37쪽) 형은 종일 다락방에만 박혀 있다가 오후 네시나 되면 인적이 드문 해변으로 나갔다가 두어 시간 후에 돌아와서 다시 다락방으로 올라간다. 밥은 마루방에서 나와 누나와 함께 셋이서 먹는 것이지만 밥만 먹으면 그냥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사닥다리를 삐걱거리며 올라가는 것을 보로 있노라면, 아아 형은 하늘로 가는구나, 라는 말이 저절로 입에서 나왔다.


42쪽) 형이 나와 누나에게 어머니를 죽이자는 말을 처음 끄집어냈을 때도 내 발가락 사이로 초가을 햇살이 히히덕거리며 빠져나가고 있었다.

​교수님은 교수님대로 어딘가 이상하다. 오래 전 일본 유학시절 만났던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교수님은 자신이 슬픈지 어떤지조차 실감하지 못한다.


54쪽) "내가 울까?"

"네?"

"정순의 죽은 얼굴을 보고 내가 울까?"

"물론 안 우시겠죠."

"........"

"........"

"그렇다면 갈 필요가 없을 것 같군"

(중략)

"슬프세요?" 내가 웃으며 물었더니,

"글쎄, 지금 생각중이야."

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할 수 없이 또 한번 웃고 말았다.


그런데 이 작품의 제목은 '생명 연습'이다. 살며 사랑하고 미워하고 용서하고 죽음을 목격하는 것이 삶의 연습이라는 말일까?

김승옥님의 글은 차갑고 날카로운데 어딘지 모르게 맑고, 순수함이 느껴진다. 아주 차가운 소주 같은 느낌? 작품 안의 이 많은 상징과 비유는 아직은 무슨 얘기인지 다 알아보지는 못하겠지만 두고두고 읽어보고 싶은 글이고 볼 때마다 새로울 글이다. 젊은 시절 만화가로도 활동했었고 영화계로 들어가 시나리오도 쓰고 감독까지 하셨던 분이라니 탁월한 이야기꾼은 맞는 것 같다.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절필하셨고 이후에 소설은 안쓰셨다는데 새로운 작품도 써주셨으면 좋겠다. 그때까지는 작가님이 젊은 날 쓰신 작품을, 요즘 세간에 오르내리는 신경숙님 말처럼, 오래오래 아껴가며 봐야겠다. 한국 문학에 보물같은 존재가 있다면 바로 이런 작품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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