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빛의 제국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월
평점 :
판매중지


요즘 김영하 작가가 인기인가 보다. 이 책을 사놓은 지 1년은 된 것 같지만, 사실 작가님은 그때도 <알쓸신잡>으로 유명세를 더할 때였다. 비소설보다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궁금해 소설이 읽고 싶었는데, 크레마에 들어있는 몇 개 안 되는 소설 중 인기 작가의 작품부터 읽어보기로 했다. 김영하 작가의 작품이라고는 <살인자의 기억법>,<퀴즈쇼>를 읽은 게 다다. 팬까지는 아니고 관심 있는 작가다. 일단 김영하 작가의 책은 참 재미있다. 사실적인 표현이 상황을 눈에 그리듯 설명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작품은 남으로 내려온 간첩 가족이 하루 동안 겪는 이야기다. 평양에서 태어난 주인공은 남으로 내려와 김기영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고 그 인물로 살아가라는 명령을 받는다. 북에서 훈련을 받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서울이라는 도시는 낯설었다. 무엇보다 개인에게 여러 가지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게 신기한 개념이었다. 북에서는 그런 게 없었다. 하긴, 남에서 사는 지금도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지라 사정이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없을지 모른다.

이십여 년 전 마지막 명령을 수행한 이후로 부여받은 인격으로 저 위에서 누군지 모를 사람들이 살라고 계획한 인생의 틀 내에서 조용히 잘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북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그의 나이 어느덧 사십 대가 되었고, 힘들었던 젊은 날을 지나 이제는 그날들에 대한 감회를 느낄 수 있는 때도 되었는데, 심한 착각이었을 뿐이었다. 누군가 저 위에서 나를 찾아냈고, 이제는 그만하고 돌아오라 한다. 아니, 어쩌면 나를 두고 치열한 머리싸움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같은 날, 아내는 아내대로 끝장을 본다. 고아에 일가친척 하나 없는 남편은 그녀에게 곁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을 이해한다. 그런 사람이니까. 하지만 마음속 외로움과 상처는 어찌할 수 없다. 그녀는 그 또래의 평범한 사람들이 하기 힘든 방식으로 욕망을 배출하고, 오늘을 마지막으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두 사람의 딸 현미에게도 오늘은 특이한 날이다. 진국이라는 친구네 집에 초대받았고, 그래서 놀러 갔고, 어찌어찌 두 사람은 첫 키스를 하게 된다. 사실 현미는 진국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집에 와서 곰곰이 진국의 말을 생각하던 현미는 진국이가 자기와 같이 산다고 말하던 친구의 존재는 어쩌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이래저래 힘든 하루를 보낸 이 가족에게 새로운 날이 밝았다. 부모님의 분위기가 어째 다른 때와 다르다는 걸 느낀 현미는 둘이 어제 격한 사랑이라도 나눴나, 생각하지만 그뿐이다. 오늘은 어제와 별다르지 않고, 어제가 그랬듯이 오늘도 그냥 그렇게 흘러가게 될 것이다.

김영하 작가의 글은 읽다 보면 마구 빠져들게 된다. 특히나 이 책에서는 등장하는 주변 소품들이 그냥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소나타 자동차','폭스바겐 골프','푸마 스니커즈','배스킨라빈스 매장과 아이스크림'처럼 구체적인 상표까지 명시되어 있어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기영이 코엑스에서 미행을 따돌리고 도망치는 장면은 너무나 생생해서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으니까. 명령을 수행한 지 이십 년 된 간첩이라는 설정도 재미있었다. 정말 그 오랜 시간 본인의 역할을 수행하며 이제는 한국 사람이 다 된 간첩이 있다면 딱 이런 모습일 것 같은 느낌.

그런데 <퀴즈쇼>도 그렇고, 책에서 별여놓은 재미에 비해 결론이 너무 성급하게 나는 듯한 인상이 든다. 뭘 기대하고 읽는 게 소설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도 말끔한 결말을 원하는 건가? 뻔하다고 욕하면서도 권선징악, 해피엔딩, 열린 결말 뭐 이런 것들. 이 중 아무것에도 속하지 않는 김영하 식의 결말도 재미라면 재미겠다.


41

이십 년간 단 한번도 받아본 적 없는 명령, 4번 명령임을 아무래도 부정하기 어려웠다.


56

코흘리개들도 아는 것을 뒤늦게 배우는 것이야 말로 피할 수 없는 이민자의 운명이다.


99

첩자에게 필요한 것은 변장술이나 잠입술이 아니라 섬세한 감수성이다.


178

종로는 처음에도 낯설지 않고 이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익숙해지지 않는 거리였다. 그곳은 서울의 중심이지만 어쩐지 늘 변방 같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서울다웠다.


266

"맞아, 당신은 대학을 다녔었지."

"맞아, 그래서 지금 내가 한정훈이나 당신보다 잘 사는 거지."


430

"살아남기 위해, 오직 살아남기 위해 미친듯이들 사는 것 같아. 왜 나만 그걸 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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