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 (합본) 베스트셀러 한국문학선 26
염상섭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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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 속에 개념으로만 존재하던 것들을 실제로 만나거나 보게되면 참 신기한 생각이 든다. 티브이에서만 보던 연예인을 봤을 때라던가, 하다못해 살까말까 고민하며 찜해두었던 옷을 입은 사람을 우연히 봤을 때라던가. 완전 평면으로 존재하던 것들에게 부피와 양감이 생기면서 갑자기 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그 순간의 생경함이란. 이 책도 중고서점을 하릴없이 돌아다니다 발견한 책이다. 이 <삼대>라는 제목은 분명 고등학교 때 수업시간에 들었겠지. 무슨 다큐멘터리 같은 데서 본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 역사로만 존재하던 이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이야기는 말 그대로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에 걸친 이야기다. 배경은 일제강점기. 할아버지는 돈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 온 양반이다. 아버지는 명색이 교회 목사님이시다. 아들은 부잣집에서 나고 자라 고생 모르고 살아온 곱상한 '책상물림'이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영 못마땅하다. 예수의 말을 전합네 하며 별 일 같지도 않은 일을 하고 다니는 아들에게는 정이 가지 않는다. 서 있는 자세며 입고 있는 옷까지 불만이다. 할아버지에게 유일한 희망은 손자다. 유약하고 그릇 작은 아들보다는 손자가 이 큰 살림을 잘 이끌어 갈 것이라 생각한다.

어찌어찌 하다 보니 할아버지와 서조모(라는 말이 있는 것도 처음 알았으나 사전을 찾아보니 할아버지의 첩이라는 말이란다) 내외는 손자 부부와 함께 살고, 아버지 부부는 따로 산다. 자주 오는 것도 아니건만 아버지는 가끔 문안인사 드리러 오는 그 짧은 순간에도 할아버지에게 늘 타박을 받는다. 아들 덕기는 그런 아버지 보기가 민망스럽다.

일본에서 유학하다 잠깐 들어온 덕기는 길을 가다 우연히 옛 동창이자, 이제는 아버지의 첩이 된 경애를 만난다.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둘 다 예쁜 외모에 재주도 많아 서로 친하게 지내기도 했고, 어른들의 사랑도 많이 받았다. 아버지와 경애는 이제 서로 보지 않는 사이라 덕기는 경애를 어떻게 불러야 할 지 난감하다. 서로 말꼬리만 흘리던 둘은 경애와 아버지 사이에 난 아이를 보러 가기로 한다.

그리고 덕기의 친구 병화가 있다. 덕기와 마찬가지로 '인텔리'인 그는 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혈혈단신으로 가난하게 산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의지할 데라고는 덕기밖에 없지만 구차하게 굴지는 않는다.

중요한 건 배경이 일제 강점기라는 거다. 당시의 시대상이란 나에게는 그냥 교과서에서 배운 개념 같은 거라서 사람들이 사는 모습까지는 잘 몰라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도 많았다. 가령 할아버지에게 문안인사는 매일 가는 것인지, 될 때마다 가는 것인지, 당시 돈 좀 있는 남자들에게 첩 하나 정도 있는 건 당연한 거였는지 뭔지. 나온 지 백년도 안 된 소설 속 인물의 생활상이 이렇게 낯설어서야. 게다가 외국어처럼 보이는 처음보는 낱말도 많아서 난생처음 국어사전을 찾아가며 읽은 책이다.

나름대로는 윗 세대와는 달라야지 하면서 하정작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삼대의 모습이 식민지 시절 유약한 대중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답답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고 이해가 가기도 하고.

여튼 명성에 비해서 재미는 그닥이었으나 끝까지 읽을만큼은 된다. 요즘은 왜 그런지 자꾸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모습이 궁금해서 당시의 소설을 찾게 된다. 아, 있는 거부터 먼저 읽고!! 이렇게 개념으로만 존재하던 소설 체험 하나 완료.

21

부친에게 이꼴을 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부친에게 대하여 이때껏 느껴보지 못 한 반항심이 부쩍 머리를 들어오는 것을 깨달았다.

33

부치닝 그리 잘난 인물은 못 되더라도 인격적으로 아들에게만이라도 숭배를 받았던들 얼마나 자기는 행복하였을까?

45

자던 양복이 아니라 출입벌이고 무어고 단벌이다. 덕기는 먼지가 뿌옇게 앉은 그 양복바지를 비참하다는 눈으로 한참 바라보고 섰다.

"왜 이렇게 얼이 빠져 섰나? 모든 것이 너무 비참한가?"

192

"왜 동정녀 마리아도 아이를 낳는데 나는 혼잣몸이라고 아이 못 낳을까? 둘이 만드는 것보다 혼자 만드는 게 더 용하고 현대적이라우"

334

부친의 일생을 말하자면 이 금고를 지키기에 소모되고 만 것이다.

466

그 아버지의 자식이지마는, 아버지 같다는 것은 듣기 싫었다. 덕기는 자기가 부친같이 계집에 눈이 벌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514

사회 교제라고 첫 출발이 고작 이것인가? 하며 코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525

"이런 세상에서 맑은 정신, 제 정신으로 살자면 그럴 수밖에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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