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 - 하서명작선 29 하서명작선 100
김구 지음 / 하서출판사 / 1995년 5월
평점 :
절판


나에게 요즘 책이란 읽는 물건이 아니라 사는 물건이다. 읽지 않는다고 해서 사지 말란 법 없지 않은가. 게다가 책 구경은 언제나 꿀잼이다. 그중에서도 중고책 구경은 새 책보다 더하면 더 했지 절대 덜하지 않는 법. 그 집에 뭐 단 거라도 발라놨는지 핑계에 핑계를 대며 자꾸 가게 된다. 이 책도 중고서점에 가서 구경하다가 집어왔다. 분명 언젠가 저녁을 아주 많이 먹은 주말 저녁, 소화를 시킨다며 나간 끝에 괜히 들렀을 것이다.

한번씩 이 나라의 역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매년 3월 1일이나 6월 25일 같은 날 방송국에서 으레 해주는 다큐멘터리나, 시대극 등을 보다가 괜히 비장해지곤 한다. 이런 영상물이야 그때를 직접 겪어보지 못 한 우리 후손들이 재구성 한 '창조물'이니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시각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역사를 살아낸 사람은 어떻게 기억할까 궁금했다. 그냥 배불러서 알라딘에 갔다가 사온 건 아니라고.

내가 김구 선생에 대해 아는 거라곤 이름뿐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지금보다 식민사관이 덜 벗겨진 시대의 국사시간에 몇 번 들어봤던 게 전부이다. 그리고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로 풍채 좋은 배우가 꼭 동그란 안경을 쓰고 나오던, 그러나 그 시대를 그린 극에서는 비중이 크건 작건 꼭 만날 수 있던 그 이름 김구. 극에서 많이 봤던 데다 이름이 주는 느낌도 그렇고, 어쩐지 실존 인물이라기보다는 극중 배역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백범 일지가 굉장히 무겁고 비장한 분위기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천만의 말씀. 예상과 다르게 굉장히 재치 있다.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으레 무게 잡고 진지하고 위엄 있을 거라 생각했나 보다. 일본인이면 누구나 '~놈'이라 지칭하는 것도 이상하게 웃겼고 (예: 왜 경관 일곱 놈), 임시정부 시절 본인의 행색을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라느니 '그래도 이만하면 고등 피난민'이라고 표현한 구절도 재미있었다.

선생의 자서전을 보니 생각했던 당시의 분위기와는 상당히 달라서 흥미로웠다. 일제강점기 초반까지만 해도 독립운동이나 독립운동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우호적이었으며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독립운동을 피하는 분위기는 우리의 독립의지가 어떻게 해도 꺾이지 않아 일제의 탄압이 시작되며 생기게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지지하는 이들은 많아서, 임시정부가 이사 다닐 때마다 같이 이동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고, 김구 선생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도움을 받아 생활을 했다는 것도 몰랐던 부분이다. 일반인들이야 당연한 건데, 독립운동가들조차 생활을 직접 해결하며 살았던 생활인이었다는 사실도. 생각해보면 이 나라의 시작인데 말이다. 아니, 야채장수 윤봉길 의사에 공장 노동자 이봉창 의사라니! 생각이나 했겠나 말이다.

백범 일지에서 현실과 무지하게 싸웠던 독립운동가를 만나게 되기라고 누가 알았을까. (하긴 그럼 난 뭘 상상했던 걸까) 역시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법이다. 알고 보면 재미있는 열사들의 생생한 그때 그 시절 이야기, 의외로 재미있다!

15
우리 집이 어떻게나 호젓한지 호랑이가 사람을 물고 우리 문전으로 지나갔다. 산어귀 호랑이 길목에 우리 집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밤이면 한 걸음도 문 밖에는 나가지 못하였다.


29
내 형색으로 말하면 머리는 빗어서 땋아늘이고 옥색 도포에 끈목띠를 띠었다. 때는 내가 열여덟 살이 되던 정초였다.


37
안 진사의 이름은 태훈이니 그의 맏아들 중근은 나중에 이등박문을 죽인 안중근이다.

39
"홍역도 못 한 장군이로군." 하고 웃었다.

61
그런 즉 고 선생은 아버지를 보시고 내가 못생긴 것을 한탄 말라고


69
"이인이 없을 리야 없겠죠마는 아, 저 사람 생긴 꼴을 보세요. 무슨 이인이 저렇겠어요."

83
이로부터 나는 옥중에서 왕이 되었다.

160
나는 난장을 맞을 때 내복 위로 맞으니 덜 아프다 하고 내복을 벗어버리고 맞았다.

186
그래서 나는 집안일에 하나도 내 마음대로 해본 일이 없었고 내외 싸움에 한 번도 이겨본 일이 없었다.

200
죽는 것도 자유가 있는 자라야 할 일이라서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하면 산 것이 아니요 살아져서 산 것이고, 죽으려고 하여도 죽지 못 한 이 몸이 필경 죽어져서 죽게 되었다.

209
있을 것은 다 있어서 공산당 외에 무정부당까지 생겼으니

214
동포의 직업이라 하여 전차 회사의 차표 검사원인 인스펙터가 제일 많은 직업이어서 70명가량 되었다. 나는 이들의 집으로 다니며 아침저녁을 빌어먹는 것이니, 거지 중에는 상거지였다.

224
내게 오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치고 잘 논다는 소문이 났다.

231
상패 일본 영사관에 있는 일인 관리 중에 우리의 손에 매수된 자로부터

234
내가 청년 제군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를 잃지 말란 말이다. (...) 밤낮 저를 잃고 남만 높여서 발뒤꿈치를 따르는 것으로 잘한 체를 말라는 것이다. 제 뇌로, 제정신으로 생각하란 말이다.

243
피난민으로는 고등 피난민이라 할 만하게 살았다.

254
"아! 왜적이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255
그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제 간의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것이었다.


260
늙은 몸을 자동차에 의지하고 서울에 돌아오니 의구한 산천이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272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 댄 삼십 년이 못 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274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279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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