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약국의 딸들 - 나남창작선 29 나남신서 105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나는 한국소설을 좋아한다. 서양의 소설처럼 깊이가 없다느니 유치하다느니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나의 정서를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나의 언어로 그려낸,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다. 깊이가 없을 지언정 이렇게 공감가는 이야기를 또 어디서 만나느냐 말이다.

 

박경리 선생님의 소설은 <토지>말고는 본 것이 없다. 고3 수험생활이 끝나 대학진학이 결정되자 겨울방학은 길었다. 당시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고, 수업시간에 선생님도 강력추천하셨다. 할 일도 없겠다 동네 책방에서 빌려다 읽기 시작한 <토지>는 곧 끝장을 보았다. 이 소설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많고 많겠지만, 다른 것을 다 떠나 정말 재미있었다. 그리고 십년 쯤 흐른 후 다시 봤다. 

 

 

그런데 어쩜 선생님의 다른 소설을 볼 생각은 못했을까. 평소에도 이 핑계 저 핑계 온갖 이유를 만들어 들르곤 하는 알라딘 중고서점에 갔다가 <김약국의 딸들>이 보이길래 냉큼 집어왔다.

 

때는 구한말, 김씨네 사람들은 통영에 산다. 통영은 예로부터 돈이 모이던 곳이었다. 지역 유지로 몇 대째, 먹고 사는데 별 지장은 없는 이들이다. 주인공 성수는 어릴 적 비명에 부모를 잃었다. 어머니는 비상을 먹었고 아버지는 집을 나가 그대로 감감 무소식이다. 집안에 비상 먹고 죽은 자가 있으면 자손이 번성하지 못한다고 했다.

 

성수는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를 꿈꾸지만 실현하지는 못 한다. 큰아버지가 맺어준 여자와 결혼해 첫 아들을 낳지만, 여섯 살 때 죽고 만다. 이후로 딸만 넷을 얻었다. 이제 약국일은 하지 않고 수산 사업을 벌여 돈도 벌만큼 벌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 재미있는 게 없는 사람이다.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 그는 마음을 표현할 줄도, 누군가에게 마음을 줄 줄도 모른다. 부족한 것은 없지만 딱히 만족스럽지도 않다.

 

그런 그의 딸들의 인생이 점차 꼬이기 시작하면서 성수의 아내와 딸들에게 참혹한 일이 생긴다. 그의 가족들은 온갖 일을 겪는데, 정작 주인공 성수노인은 자신 인생에 생긴 일에 가타부타 별 말이 없다. 사업이 망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별 일이 없을 때 찾아가는 기생이 그에게 말한다. "영감은 대체 뭐요? 고동뿌리처럼 도사리고 앉아서 속을 줘야지요."

 

성수노인은 자신의 건강이 심각하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도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성수노인이 죽을 떄쯤, 그 많은 재산은 모두 털어먹고 꼭 빚정리 할 만큼만 남았다. 성수노인은 그렇게 세상을 떠난다. 마지막이 가까워질 때쯤 그는 첫사랑 사촌 누나를 생각한다. 인생은 그렇게 기억되는 걸까? 이제는 기억도 가물한 소년시절 마음에 품었던 연정으로?

 

여튼 파란만장했던 성수노인의 인생도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딸들의 차례다. 세월은 그렇게 가는구나. 세대에서 세대로 사람이 바뀌면서.

 

21
‘"유모, 나도 이자 장가들었네." (...) "한번만 숙정이를 보게 해주게. 다시는, 죽는 날까지 나타나지 않겠네. 쓸개 빠진 놈이라 웃을란가? 그래도 좋네."

23
"집안 망할 놈 같으니..."
봉제는 쓰디쓰게 입맛을 다신다.

51
"후생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까? 누부야!"
"만나고 말고. 못 만나믄 그 한을 어쩔꼬....."

298
‘덜 설어야 눈물이 나지.‘
겹치고 겹치는 불운 속에서 한실댁은 막연하게 중얼거렸다.

332
"허참, 이 집안이 이렇게 망할 줄이야, 재물처럼 허망한 건 없네. 살림이 나가거든 곱게나 나갔으면. 사람 잃고 돈 잃고, 어찌 병이 안 나며 환장 안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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