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셔츠 ㅣ 러시아 현대문학 시리즈 3
예브게니 그리시코베츠 지음, 이보석.서유경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8년 4월
평점 :
소설 셔츠는 러시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인 에브게니 그리시코베츠의 작품으로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오를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시코베츠의 새로운 작품이 나올 떄마다 모든 매체들이 앞다퉈 소개할만큼 흥미로운 작품들을 많이 선보이고 있는 그는 러시아 대중문화를 이끌어 가는 중심이자, 현대문학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현대 러시아 사람들의 정서와 의식을 솔직하게 그려내고 있으며, 특히 심리묘사나 감정 표현이 훌륭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 이 책을 보면서도 내내 변화무쌍한 남자의 심리상태를 잘 표현한 것 같다.
책의 줄거리는 아내와 이혼 후 모스크바로 이주한 평범한 건축가 샤샤는 어느날 자신이 설계한 집의 축하파티에서 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 순간부터 운명처럼 사랑에 빠져들었다. 모스크바는 곧 그녀이고, 그곳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사랑에 빠져 있는 사샤에게 오랜 고향 친구인 막스가 찾아오면서 하루 동안 사랑과 우정 그리고 인생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현실과 꿈을 넘나들면서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는 것이다.
내 휴대전화가 울렸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첫 신호였다. 최근 한달은 벨이 울릴 때마다 그녀가 전화한 건 아닐까 하는 막연한 희망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가 내 번호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지,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내 번호를 안다는 자체가 싫은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내 전화번호를 준 순간부터 나는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녀의 전화번호를 이루는 숫자들은 내 머리에 각인되어 환하게 빛나고, 내 마음속은 온통 그녀에게 전화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p27
내가 처음 전화했을 때 그녀는 기뻐했다. 그녀는 나인 걸 바로 알아채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거의 바로 알아채고는 기뻐했다. 내가 그 삼 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그녀가 나에게 번호를 준 날부터 내가 그녀에게 전화하기까지의 삼 일 말이다. 생각해보니, 이삼 일간 숨을 들이마시기만 하고 내뱉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그녀가 기뻐하자 나는 숨을 내쉬었다. p47
이혼후 모스크바로 이주했을때는 적응하기 힘들고 모든게 낯설었던것 같은데 사랑에 빠지고부터 뭔가 아이처럼 설레는 순수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10년지기 친구인 막스에게도 이 상황을 당장 말하고 싶지만.. 또 막상 말하기는 망설여지는 마음이 느껴졌으며, 처음엔 친구 막스가 그가 있는 모스크바까지 날아온다고 했을땐 그녀만 생각하기에도 바쁘다며 놀러온 타이밍이 안맞다고 궁시렁(?)거렸지만 어느새 막스와 어울리고 마치 막스의 엄마처럼 덥수룩한 수염 좀 깍으라고 닦달하기도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내가 행복한지 아닌지 모르겠어. 기분이 아주 좋을 때조차 그게 행복인지 아닌지 모르겠어. 어쩌면 행복일지도 몰라. 그런데 나는 그게 행복인지 모르겠다고! 아마 그것보다 훨씬 더 기분이 좋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해. 지금 이대로도 좋지만, 행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구체적이야. 그게 행복인걸까? 나는 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고 살아. 아주 기분이 좋을 때도 있었고 심지어 너무너무 좋을 때도 있었어. 그런데 그게 행복이었을까? p216
중간중간 꿈에 잠길땐 전쟁터로 남극기지로 장소가 변하는 탓에 무슨 이야기인가 낯설기도 했지만 삶에 대해 나누는 이야기 속에는 영락없는 우리의 모습같은 고뇌가 있으며 사랑에 빠진 이의 일상이 었었다.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의 일상이 통째로 꿈 인 듯 느껴지는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