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실점
김희재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7년 2월
평점 :

완벽한 외모, 실력, 평판, 그런 그녀와 어울리는 완벽한 남편과의 결혼생활. 어느 것 하나 완벽하지 않은 점이 없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아나운서, 최선우.
교외 외딴 집에서 나체에 목이 꺾인 채 발견된 그녀의 기괴한 죽음은, 그 진실에 다가갈수록 그녀의 본질 혹은 그녀에게서 결코 상상할 수 없는 또 다른 면모를 드러낸다.
강간-살해를 연상시키는 나체의 시신에서 발견된 정액, 최선우가 마조히스트였다는, 그래서 자신과 거친 카섹*와 SM 플레이를 즐겼다는 용의자 서인하의 주장, 남편과 따로 떨어져 지내며 사건의 담당 검사인 강주희가 남편과 전화로 농담처럼 언급하는 폰*스.
이 소설에서 ‘섹*’는 어떤 의미일까? 본인의 침대에서까지 품위를 버리지 못하는, 단정하고 절제되면서도 세련된 아나운서 최선우가 외간남자와 변태적 성향의 섹*를 즐기는 것과 외국에 있는 남편과 두 딸의 아내이자 엄마인 동시에 강력부 여성 검사인 강주희가 남편과 종종 폰*스를 언급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섹*’라는 둘만의 은밀한 행위는 우리의 또 다른 면모를 끄집어내어,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에 놀라기에 충분한 행위이자, 이성의 목소리를 잠시 잊을 수 있을 만큼 강렬한, 어쩌면 진짜 자신의 모습과 맞닥뜨릴 수 있는 행위이다. 하나의 인격을 그 무엇보다 선명한 대비로 비추기에 이보다 더 좋은 거울은 없을 것이다.
또한 보여지는 모습과 감추고 싶은, 감추어진 모습의 분리는 사회 속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간극이다. 사회가 규정한, 그리고 자기 자신이 규정한 모습으로 살아온 최선우가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한 서인하와 그에 대해 끝까지 부정하지 않고 스스로 드러냄으로써, 그 앞에서 만큼은 또 다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이유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쉽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본능적인 선택이 아니었을까?
이야기의 주도권을 놓고 싸우는 검사와 살인자의 치열한 심리전, 해리성 장애를 의심케 하는 서인하의 여러 모습, 최선우의 남편 박무현이 보여주는 그녀의 흔적, 또 다른 연쇄 방화 살인사건과의 연관성 등, 이 모든 주장이 결국 하나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과정이자, 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진실을 말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치밀하다.
중학교 미술 교사인 서인하의 직업, 그의 작품―‘여자’시리즈―과 소설의 제목―소실점―의 의미는 결국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는 작가의 말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매개체이다. 최선우에 대한 서인하의 증언은 그녀의 본질을 묘사하듯 집요하고, 잿빛의 여성 위에 입술, 심장, 음부만을 붉은색으로 표현한 그의 작품은 극단적 대비와 최선우와 서인하만이 알아볼 수 있는 비밀로 가득하다.
또한 모든 그림의 기본이자 가장 중요한, 빛과 빛이 떨어지는 위치에 의해 생겨나는 그림자―어둠―에 대한 부분은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열린 문틈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인해 발견된 사건의 중요한 증거는 최선우와 서인하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동시에 서인하의 의도를 비춘다. 마찬가지로 대학생 시절, 최선우 앞에 선 서인하의 모습을 단 하나의 빛을 향해 서 있는 예술가의 모습으로 비추어 그가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만들기도 하며, 여름의 강렬했던 그들의 첫 섹* 역시 어둠과 잠깐의 빛, 그리고 다시 어둠속에서 이루어진다. 마지막으로 밖에서 들어온 빛은 죽은 최선우의 육체를 비추고, 서인하는 완벽한 소실점을 찾게 된다.
소설의 제목인 ‘소실점’은 그만이 바라볼 수 있었던 그녀, 그녀를 똑바로 보기 위한 그의 진정한 사랑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준다. 다른 사람들은 한 번 찍은 소실점에 그대로 머물며 최선우를 바라보기에 결코 보지 못한 모습을 서인하는 매 순간 새로운 소실점을 찍어 바라보았기에 그녀가 자신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죽은 후 새로 찍은 소실점으로 그는 자신의 사랑을 완성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고, 단지 고맙다는 말은 몇 번, 마지막 순간에는 미안하다는 말만 남긴 그녀에 대한 사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