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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의 만찬
올렌 슈타인하우어 지음, 권도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과거의 연인이자 동료였던 헨리와 셀리아는 6년만에 '약속'레스토랑이라는 장소에서 만나기로 한다.
"아니, 자네들은 더 이상 친구가 아니야. 어떻게 헤어져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뿐이지. 그녀도 나처럼 자네가 무모하다고 말할 거야. 벌써 5년이나 지났고, 그 여자는 결혼도 한 데다 아이도 있어. 자네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약속'레스토랑이라는 이름에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희망을 가지는 헨리는 아직도 셀리아를 그리워하고 그녀와의 재회에 은밀한 기대감을 품는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감과 동시에 헨리에겐 분명한 목적이 있고, 한때 사랑했던ㅡ어쩌면 아직까지도 사랑하고 있을지 모르는 여자에게서 그 목적을 달성해야만 한다.

셀리아. 전CIA 요원이었던 그녀는 과거의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캘리포니아로 오면서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 제2의 인생을 살아간다. 이제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다. 그런 그녀에게 헨리가 찾아온다.
그들은 약속된 장소에서 만찬을 즐기며 서로를 향한 진심과 거짓을 자연스럽게 오가는 심리게임을 펼친다. 그들 앞에 놓인, 과거 120명의 목숨을 앗아간 빈 공항 테러 사건의 진실. 서로를 향한 의심속에 감추어져 있는 그 사건의 진실을 이제는 밝혀야만 한다.
"시작하지그래?"
"시작하다니 뭘?"
"빈 공항 사건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내가 취하기 전에 물어 보는 게 좋을 거야."
나도 모르게 오른손이 지멘스가 들어 있는 주머니 위로 향한다.
헨리는 셀리아의 손짓 한 번에 그녀와 함께 했던 과거로 돌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녀에 대한 감정을 여전히 피부로 느끼고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오직 그녀에게서 테러 사건에 대한 진실을 듣기 위해 능수능란한 거짓말을 하고, 그녀의 목소리를 몰래 녹취하는 등 치밀한 행동도 한다. 인간이 때때로 이성과 감성을 얼마나 쉽게 분리하는지, 그로 인해 감성이란 게 이성에 비해 얼마나 부질없는 건지, 혹은 이성이란 게 감성에 비해 얼마나 하찮은 건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테러 사건의 진실은 이성적 판단이 필요한 시기에 감성에 지배를 받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 분리할 수 없는 두 가지, 이성과 감성으로 인한 비극이었다.

같은 공간에서 두 명의 주인공이 펼치는 심리전에 그들이 겪은 과거의 사건과 서로에게 품은 비밀들은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고 헨리를 위한 셀리아의 비밀, 셀리아를 위한 헨리의 판단이 만들어 낸 비극은 결국 그들에게 주어진 결말로 다가간다.
작가가 그린 결말은 이 책의 모든 부분 중 가장 흥미로웠다.
"완벽해. 거기에 비하면 낭만적인 사랑이라는 건 귀여운 정도지. 열정은 작은 눈속임 같은 거야. 열망 같은 것도 마찬가지지. 그 모든 것이 아이에 대한 사랑 앞에서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으니까."
셀리아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과거는 없고 언제나 미래만 있는 그녀의 인생을 위해, 그녀의 아이들을 위해 처음부터 그녀는 헨리의 음식에 독을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헨리는 셀리아를 처리하길 원하냐는 질문에 그녀가 아이들과 쓰는 말인 "당근이지."라고 대답한 후 죽게 된다. 그녀를 지키기 위한 그의 판단은 과거 테러 사건에서도, 그리고 그녀로 인해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계속된다.
테러 사건과 무슬림 등 무거운 소재들을 사용한 스릴러 소설이기도 하지만 결국 그와 그녀라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어 읽은 나는 사랑이 많은 것들을 파괴하지만,ㅡ설사 그게 누군가의 목숨일지라도ㅡ'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역시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