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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기 위해 사라지는 법
아키코 부시 지음, 이선주 옮김 / 멜라이트 / 2024년 2월
평점 :
"3월 초라기에는 유난히 따뜻하다. 뉴욕 허드슨 밸리에서는 3월 말까지 겨울이 끝나지 않을 때가 많다. … 마지막으로 남은 감탕나무 붉은 열매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하늘이 잘 보이고, 오후의 햇살이 산비탈을 강렬하게 비추고 있다."
아키코 부시의 신간 ≪존재하기 위해 사라지는 법≫ 프롤로그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감성 가득 담긴 문장을 보고 소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요. 이 책은 "보인다는 것이 능동적인 개념이 된 시대"(p.22)에서 "드러내지 않는 삶"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다양한 사례와 함께 고찰한 교양 에세이입니다.
스마트폰으로 위치 정보가 노출되고 신용카드와 CCTV로 개인의 일상이 유출되는 "소셜 미디어"와 "디지털 감시"로 설명되는 시대에서 잘 사라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삶의 진정성을 찾으려는 저자의 새로운 시도를 소개합니다.
아키코 부시는 20년 동안 꾸준히 건축과 디자인, 문화와 자연에 대한 다양한 글을 쓰고 발표하고 있는 에디터이자 작가입니다.
≪존재하기 위해 사라지는 법≫은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탄생한 작품으로, <월스리트 저널> 등 다수의 매체에서 격찬이 끊이지 않습니다. <Notes on Invisibility in a time of Transparency>를 부제로 하는
이 책에서 사라지기는 침묵하거나 숨기가 아니라, 눈에 띄지 않고 들키지 않고 살아가는, 드러내지 않는 삶을 의미하는데요. 투명성(Transparency)의 시대에 사라지기(Invisibility)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해리 포터의 투명 망토처럼 보이지 않는 세계로 데려갈 멋진 안내서가 될 것 같습니다.
"때때로 사라지기를 원하고, 때때로 사라진 것을 후회"(p.196)하는 것이 유동적이고 복잡다단한 페르소나를 지닌 현대인들의 모습일 텐데요. 영국 철학자이자 수필가 윌리엄 해즐릿의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에 대하여≫(1821년)에 나오는, "흥미진진한 일이 벌어지는 현장을 조용히 지켜보는 사람"이 되는 것이 드러내지 않는 삶이 추구하는 가치가 아닐까 합니다.
까꿍놀이와 숨바꼭질에 숨은 힘, 드러내는 삶과 행복의 관계 투명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전하는 지적이고 희망찬 메시지
≪존재하기 위해 사라지는 법≫은 독자들이 피로 사회를 벗어나 잠시라도 홀로 있는 시간을 갖기를, 자신을 충전하고 주변을 좀 더 둘러보고 소확행을 누릴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갖기를 바라는 저자의 다정한 마음이 담긴 피로 회복서입니다. 또한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충만하게 채워 줄 멋진 선물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