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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하난의 우물
장용민 지음 / 재담 / 2021년 8월
평점 :
<부치하난의 우물>이 순수한 남자와 염세적인 여자의 사랑이야기라고 했을 때, 그리고 전설 속 이야기가 현재로 이어지는 이야기라고 했을 때, 내가 푹 빠져서 읽을 소설이 되겠구나 생각했다.
또 호평이 많아서 나의 읽고 싶은 책 목록에도 들어가 있는 미스터리/스릴러 장르의 소설 <궁극의 아이>와 <귀신나방>을 집필한 작가가 쓴 로맨스 소설은 어떠할지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다.
누리는 스무 살이지만 다섯 살 아이의 지능을 가지고 있는 왜소한 청년으로, 어린 자신을 길에서 거두어주었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로 혼자서 공병을 주우며 낙원상가 지하 주차장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한 심성을 가진 누리는 구타를 당하고 있는 노인을 구해주었고, 그 노인이 답례로 봐준 전설점을 통해 자신의 운명이 ‘부치하난의 우물’이라는 전설과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할머니가 그랬어. 좀 모자라도 괜찮다고. 어린 애로 사는 게 더 좋은 거라고. 어린아인 좋은 거만 보니까.......”
p.12
‘부치하난의 우물’ 전설은 먼 사막에서 시작된다.
그곳에 인골로 만든 갑옷과 무기를 들고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죽이며 인육까지 먹는 잔인한 츄위샤이족 최고의 전사 부치하난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열 살 이전의 기억이 없어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는 츄위샤이족이 몽낭족을 습격하던 날, 아픈 어머니가 있어 도망가지 못한 열여섯 소녀 올라를 만났고 그녀와 함께 기억을 찾는 여정을 떠난다.
그리고 부치하난은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올라에게서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의 이야기의 끝은 비극적이었고, 한 우물에 얽힌 전설이 되었다.
‘난 보이지 않는 건 믿지 않았다. 난 만질 수 없는 건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사랑...... 꿈...... 그딴 건 개나 줘버려. 그런데 어느 날 벼락처럼 그 아이가 나타났다. 그리고 말했다. 세상에 중요한 건 보이지 않는다고. 가장 소중한 건 만질 수 없다고. 나의 사랑....... 나의 부치하난.......’
p.9
누리는 자신이 전생에 이 부치하난이었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반쪽 올라를 찾아나섰고, 태경을 만났다.
태경은 스스로 더이상 내려갈 곳 없는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여 죽음도 두렵지 않았다.
양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집에서 나와 또래 아이들이 교복을 입고 떡볶이를 먹을 때 포주에게 잡혀 성매매를 해야만 했던 태경의 고달픈 삶은 그녀의 손목에 짙은 흔적까지 남겼으니 살아있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매춘과 소매치기를 하면서 근근이 삶을 이어가던 태경은 도망쳤던 포주에게 다시 붙잡혀 들어갔다가 무려 90억 가치가 있는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인 ‘여신의 눈물’을 손에 넣었고, ‘여신의 눈물’을 뺏긴 조직은 태경을 가만두지 않겠다며 뒤를 쫓는다.
그때 누리가 태경을 찾아낸 것이었다.
태경은 목숨을 위협 받아도, 그보다 더한 짓을 당할 수 있는 위험이 있어도, 자신을 밑바닥 인생에서 구원해줄, 꿈을 이루어줄 다이아몬드를 팔아서 힘들 때마다 들여다보던 전단지 속 천국의 섬 피지로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다.
태경을 올라라고 부르며 졸졸 따라다니는 누리도 함께 하게 된 여정 중 ‘부치하난의 우물’ 전설이 현실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늘이 무너지면 무너진 대로 살면 돼.”
“뭐.....”
“우리 할머니가 그랬어. 하늘이 무너지면 무너진 대로 살면 된다고...... 그럼 또 다른 하늘이 보인다고. 그니까 울지 마.”
p213
이렇듯 1996년 종로 밑바닥 삶을 사는 누리와 태경이 조직폭력배에게 쫓기는 것이 이야기의 큰 줄기여서 그려지는 구질구질한 모습들이나, 특히 태경이 성폭력과 성매매 피해자이기 때문에 그려지는 소설 속 장면이 불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런 면을 감수할 수 있다면 나처럼 ‘부치하난의 우물’이라는 전설과 현실을 넘나드는 이야기에 몰입하여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넘긴 책장이 왼편에 수북히 쌓인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시 미스터리/스릴러 소설로 호평을 받았던 작가의 필력은 어디 가지 않는지, 나는 책 읽는 속도가 느린 편인데도 이 소설은 내가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유독 빨랐는데, 그렇다고 다 읽고나면 휘발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책을 덮고도 여운이 남는다.
소설 속 애틋한 사랑, 특히 태경이 세상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느꼈던 대가 없는 사랑, 누리의 그 순수한 사랑과 미소는 당분간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