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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헤엄치기
토마시 예드로프스키 지음, 백지민 옮김 / 푸른숲 / 2021년 6월
평점 :
퀴어소설을 몇 권 접하지 않았지만 아무튼 적은 경험이나마 바탕으로 하여 생각해보았을 때 퀴어소설, 정확히는 남성끼리의 사랑을 다룬 소설은 나와는 안 맞나보다 싶었는데, 한 소설이 내 안의 퀴어소설에 대한 이미지를 바꿔놓았다.
간질거리면서도 끈적한 퀴어소설 특유의 감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회주의 체제하의 폴란드라는 특별한 상황이 깊이를 더해주고 두 사람의 관계와 이야기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하는 소설을 만난 것이다.
이 소설의 제목은 <어둠 속에서 헤엄치기>이고, 미국 뉴욕에서 주인공 루드비크(애칭으로는 루지오라 불린다)가 과거를 회상하며 ‘그’라고 부르는 야누시에게 말을 거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또래 남자아이에게 마음이 동했던 루드비크는 공원에서 만난 중년 남자에게서 동성애자의 현실을 보고는 다시는 남자를 이전과 같은 눈으로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게 마음대로 되겠는가, 대학 마지막 학기를 막 마친 여름에 참가한 농촌 활동(대학을 졸업하기 위해서는 농촌 활동에 강제로 복무해야 했다고 한다)에서 야누시를 만나버린다.
처음 보자마자 야누시에게 끌렸던 루드비크의 시선은 훈련소에서 숙박하며 비트를 수확하는 농촌 활동을 하는 내내 야누시를 좇았고, 어느 날 루드비크가 홀로 산책을 하다가 강가에서 수영을 하던 야누시를 만나면서 말을 트고 둘이 가까워지다가, 루드비크가 읽던 <조반니의 방>을 나눠 읽는 것을 계기로 사이가 급 진전되었다.
약혼녀가 있는 데이비드가 파리에 있는 게이 바에서 조반니를 만나면서 겪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다루었다는 <조반니의 방>은 비인가도서(불온서적)로, 루드비크에게 의미가 남다른 책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런 책을 읽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자신의 성적 지향을 짐작할 수 있다는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누시에게 그 책을 빌려주었다는 것은 루드비크에게 야누시가 특별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야누시도 그런 <조반니의 방>을 빌려 읽으면서 루드비크에게 확신이 생기지 않았을까.
나는 어딜 가는 건지 생각도 하지 않고 계속 걸어가다가 딱히 왜인지는 몰라도 멈춰 섰다. 물속에서 뭔가 거대한 게 움직이고 있었다. 누군가 헤엄치고 있었다. (...) 내가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그 형체는 벌써 방향을 틀어 내쪽으로 헤엄쳐 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태양을 등지고 있단 나는 물 위로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형체는 이 길쭉한 응달을 헤엄쳐 지나자마자 멈춰서 고개를 들었다.
(...)
“안녕.” 네가 말하는 투는 내가 누군지 모른다는 듯했다. 너의 상체에서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너의 몸은 늘씬하고도 강인했고, 가슴과 배에는 저만의 중력의 법칙에 따라 선이 그어지고 구획이 나뉘어 있었다.
“안녕.” 나는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너를 바라보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말했다.
너는 눈을 찡그리고 손날을 눈썹 위에 대어 내 등 뒤에서 비추던 햇살을 가렸다. “나랑 같은 작업반에 있는 애 맞지?”
나는 끄덕였다.
“나는 야누시.” 너는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거기 선 너는 거의 무례할 만큼이나 태평스러워 보였다. 발가벗은 기분이 드는 쪽은 나였다.
p.63-64
그렇게 농촌 활동에서 처음 만나 가까워지기 시작한 둘은 농촌 활동 직후 여행을 떠나 숲속 호숫가에서 텐트를 치고 지내며 함께 수영을 하고 사랑을 나누며 온전히 둘이 함께 보내는 시간을 갖지만, 영원히 그렇게 지낼 수는 없는 법, 둘의 관계는 비밀로 부쳐두기로 하고 도시 바르샤바로 돌아온다.
“이렇게 돼서 좋다.” 이렇게 말하자 내 목소리의 울림과 몸속에 퍼지는 그 잔잔한 진동에 기분이 좋았다.
“나도.” 너는 내게 고개를 돌렸고, 그러는 너의 눈빛은 밝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지.” 너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우리가 도착한 첫날 네가 나를 바라보았을 때부터. 너는 읽기 쉽거든.”
p.97
호수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아침에 우리는 짐을 싸고 텐트를 해체했다. (...)
“우리 둘 다 아무한테도 얘기하면 안 되는 거 알지.” 너는 주머니를 조여 닫으며 갑자기 진지한 어투로 내게 말했다.
“뭘?” 나는 물었다. 뭔지 정확히 알았으면서도. 배 속이 수건처럼 비틀려 짜지는 것 같았다. (...)
너는 내게 은밀한 눈길을 던졌다. “이거 말이야.”
나는 괜히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호수 쪽으로 던지고는, 나뭇가지가 날아가다가 허무하게 떨어지며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네. 얘기하면 안 되겠네.”
p.111-112
만약 그저 이런 이야기일 뿐이었다면 조금 간질거리는 퀴어소설 그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소설의 배경은 사회주의 체제하의 폴란드이기 때문에 (주요 시간적 배경은 1980년이다) 소설에 전체적으로 지금과는 다른 당시 폴란드의 분위기가 묻어난다는 점이 다른 퀴어 소설과 차별화 되는 부분인데, 루드비크와 야누시의 사회주의에 대한 시각이 다르다는 점이 더욱이 이 소설을 흥미롭고 특별하게 한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다른, 밖에서는 절대 말해주지 않는 이면의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 되며 절대로 알고 있다고 시인해서는 안 되는 진실을 어렸을 적 건네받은 (루드비크는 이를 독이 든 선물이라고도 했다) 루드비크와 교육을 받을 때에도 아픈 어머니를 돌보는 데에도 당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는 야누시는 사회주의 체제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갈등하는데, 불온서적으로 분류되는 <조반니의 방>을 함께 읽었던 야누시는 그런 책들을 검열하는 언론통제국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사회주의 체제에 편승한다.
그렇다고 루드비크가 강경한, 사회주의 체제의 전복을 부르짖으며 행동하는 영웅적 인물은 아니다.
사회주의 사상에 반하는 인물이라는 낌새가 보이면 잡혀가는 시대였으니 루드비크는 겉으로는 다른 인민들과 마찬가지로 행동하며 눈에 띄지 않게 지냈고, 그런 스스로를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 속 아이처럼 진실을 보았으나 동화 속 아이와는 달리 직언하지 않고 진실을 보지 못한 체했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경멸했다.
또 체포 위기를 몸소 겪고 나니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닫게 되고 몇 위기를 겪고 현실을 맞닥뜨리면서 체제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루드비크의 신념이 흔들리기도 하는데, 이렇게 인물의 입체적인 면이 현실적이어서 실제로 1980년 폴란드 바르샤바에 루드비크나 야누시가 있었을 것만 같았다.
(...) 나는 호수를, 텐트를 자꾸만 돌이키곤 했다 ?아직은 가늠이 되지 않던 무언가가 탄생한 근원이라도 되었다는 듯 강박적으로. 나는 사임과 같은 너의 몸에서 내가 있을 곳을 찾았었다? 너의 허벅지와 유두라는 둔덕 사이에서, 네 겨드랑이라는 동굴 속에서. 그러나 너라는 지형은 갑자기 도시의 그것처럼 명확해져, 피부는 다세대 주택의 벽돌처럼 달궈졌고 몸의 굴곡은 끊긴 데 없는 일직선처럼 바뀌었다. 대로의 일직선, 전차 선로의 일직선, 길바닥에 격자무늬의 그림자를 드리우던 뻣뻣한 철책의 일직선처럼. 일견 견고해 보이지만 체중을 실으면 떠밀릴 수도 있어서 너무 오랫동안 기대고 있으면 삐걱거리던 것이 금방이라도 자동차가 득실한 번잡한 타르 포장도로로 튕겨 나갈 것만 같던 그런 철책의 일직선처럼.
p.113
이 소설의 또다른 특징은 문장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고 표현에 공을 들였음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작가가 힘을 주고 쓴 문장은 때로는 부담스럽거나 추상적이어서 오히려 여러 번 읽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의 문장은 그게 아니라 표현이, 문장이 좋아서 여러 번 읽게 된다.
위 인용문은 야누시와 함께 숲속 호숫가에서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다 둘의 관계를 비밀로 하기로 하고 도시 바르샤바로 돌아왔을 때 루드비크의 심정을 자연의 곡선과 도시의 직선으로 대조하어 표현한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책표지의 이미지에서 짐작할 수 있듯, 강가에서 헤엄치던 야누시와 루드비크와의 만남이나 숲속 호숫가에서 수영하고 사랑을 나누며 둘이 함께 보낸 나날들을 비롯하여 여름을 배경으로 한 장면이 많고, 또 그 이미지가 강렬하기에 <어둠 속에서 헤엄치기>는 여름날과 잘 어울리는 소설이다.
그러니 올여름에는 <어둠 속에서 헤엄치기>와 함께 하는 건 어떨까?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