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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뼈의 아이들
토미 아데예미 지음, 박아람 옮김 / 다섯수레 / 201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판타지를 많이 접한 편은 아니지만, 내가 읽은 판타지 영화와 소설은 대부분 백인 남성이 주인공이었다.
<헝거게임>이나 <판의 미로>같은 몇몇 판타지 이야기에 여성이 등장했지만 흑인 여성이 주인공인 판타지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흑인과 여성이라는 소수와 소수의 결합이니 더 드물 수밖에 없다.
마치 소설계의 <블랙팬서>와 같은 존재이지 않을까?
이 책이 뉴욕타임즈 40주 연속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 계약이 된 데에는 이 부분이 분명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작가는 서아프리카의 신화와 종교, 문화를 공부했다고 하니 소설에도 서아프리카가 잘 녹아 있어 서아프리카에 대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또한 작가의 말과 책소개가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그 현실이 이 책 속에 녹아 있음을 짐작하고 세 권의 책 중 먼저 출간된 첫 번째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한 권의 분량이 650페이지 정도로 적지 않은데 총 세 권이라고 하니 짧은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오리샤'로, 마법이 살아 있었던 나라이다.
마법을 쓸 수 있는 '마자이'는 흰머리카락을 특징으로 하는데, 마법을 쓰지 못하는 '코시단'인 왕 사란이 나라에서 마법을 사라지게 하고 마자이를 모두 죽인다.
그리고 주인공 제일리처럼 흰머리칼을 가지고 있지만 어려서 아직 마법을 쓰지 못했던 '신성자'들은 살아남았지만 핍박받는 존재로 힘겹게 살아간다.
작가는 세 사람의 시점을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코시다나 아버지와 마자이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흰머리카락을 가진 신성자 제일리, 왕 사란의 딸인 코시단 공주 아마리, 그리고 왕 사람의 아들이자 아마리의 오빠인 왕자 이난이다.
제일리의 오빠이지만 코시단인 제인과 신성자 제일리는 왕궁이 있는 라고스에 돛새치를 팔러 갔다가 마법의 두루마리를 가지고 성에서 도망친 아마리 공주를 구해주게 되어 도망자 신세가 된다.
그 두루마리를 만진 신성자는 마법의 힘을 쓸 수 있게 되는데, 영구적으로 이 나라에 마법을 되살리려면 다른 두 개인 성물이 더 필요했다.
제인, 제일리 그리고 아마리는 그 성물들을 찾아 마법을 되살리기 위한 여정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왕에게 세뇌당해온 왕자 이난이 추격하는 것이 주된 이야기다.
그 속에서 인물들의 사연이 드러나면서 관계가 진전된다.

위에서 이 이야기에는 현실의 인종차별이 녹아있다고 했는데, 나는 코시단 왕자인 이난과 신성자 제일리의 대화 속에서 그 부분을 잘 느낄 수 있었다.
인종차별 문제뿐만 아니라 마자이들이 사용했던 요루바어 대신 오리샤어 사용이 강요된 것을 보며 일제시대에 우리말 사용이 금지되고 일본어를 강요했던 것이 떠올라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난은 코시단이자 왕자로 오리샤에서 주류였고, 제일리는 흰머리칼을 가진 신성자로 어릴 때부터 힘겨운 삶을 살아온 것이 대비된다.
"위병을 믿으라고?" 내가 꽥 소리친다. 틀림없이 이 숲에 숨어 있는 투사들이 떨리는 나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우리 엄마 목에 사슬을 감은 사람들을? 우리 아버지를 죽도록 팬 사람들을? 틈만 나면 내 몸을 더듬고 가진 것을 전부 빼앗아 결국 나를 부역창으로 끌고 가려하는 사람들을 믿으라고?"
왕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러나 그는 다시 입을 연다. "내가 아는 위병들은 좋은 사람들이야. 그들은 라고스를 안전하게 지키고......."
"아, 신들이여." 나는 슬금슬금 물러선다. 더는 들을 수가 없다. 우리가 힘을 합칠 수 있다고 생각한 내가 바보다.
제일리, p.390-391
아무리 강해져도, 아무리 강력한 마법을 휘둘러도 소용없다. 이 세상에서 나는 언제까지고 증오의 대상일 것이다.
나는 언제까지고 두려울 것이다.
"제일리......."
"아니." 나는 흐느끼며 속삭인다. "다가오지 마. 넌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몰라. 영원히 모를 거야."
"그럼 네가 도와줘." 왕자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내 옆에 무릎을 꿇는다. "부탁이야. 나도 이해하고 싶어."
"넌 이해할 수 없어. 이 세상은 널 위해, 널 사랑하도록 만들어졌으니까. 길거리에서 누군가에게 욕을 들은 적도, 누군가가 문을 부수고 들어온 적도 없잖아. 어머니의 목을 감아 끌고가서 온 세상이 보는 앞에 매단 적도 없을 테고."
제일리, p.391-392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여서 제일리의 힘든 삶을 이난이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그럴 수 없으니 서로를 이해하는 게 좀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해야 하고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꿔나가야 한다.
이 책의 주인공이 흑인 소녀라서 작가의 말에 흑인이 차별받은 사례만이 적혔겠지만,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는 사례가 정말 많다.
해외여행기를 보면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화장실 옆 테이블을 내주는 것과 같이 작은 차별부터 폭행 같은 끔찍한 일이 아직까지 생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 철없는 사람들이 흑인들을 흑형이라 부르고 오스카 시상식 같은 큰 자리에서 흑인 호스트가 아이사 아이들을 조롱하다니, 차별 받는 사람이 차별하다니! 우스울 따름이다.
그 입장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또한 다양한 사람들에 익숙해지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이 책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흑단, 마호가니, 태양 아래 환하게 빛나던 검은 피부 등의 표현이 새롭게 상상력을 자극했다.
책을 읽으면 그 배경이나 인물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되는데, 나만 해도 처음에는 흑인 주인공과 등장인물이 머릿속에 쉽게 그려지지 않아서 놀랐다.
책에 등장하는 아프리카 옷들은 찾아보니 내가 상상했던 것과 비슷했지만 머릿속에서 등장인물들에게 자연스럽게 그 옷을 입히기도 힘들었다.
상상력이 이렇게 한정되어 있었다니 나 자신이 실망스럽기도 했다.
먼저 나 부터 바뀌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첫걸음이다.
이런 다양한 문화를 바탕으로 한 책은 판타지 세계관을 넓힐 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