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매일매일 - 빵과 책을 굽는 마음
백수린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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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 에이드를 한 잔 준비하고

래밍턴 케이크를 하나씩 집어먹으며 보다 만 영화를 보고 싶은 주말.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위에 다진 아몬드와 과일을 송송 올려 한 입. 오늘 같이 추운 날엔 당신과 함께 보낸 어느 더운 날 오후가 문득 생각나서. 그냥 한 번.


살래요.

살아있어줄래요?

다정한 매일매일을.







사실 따뜻한 글을 외면해왔다.

내가 쓰지 않아도 대신해서 써줄 누군가가 있겠지, 하고.

난 좀 더 뾰족해져야지. 그래서 나를 지켜야지, 하고.

그런데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읽지도 쓰지도 않았던 글이 어느새 내 품 안에 있다. 이 포근함이 낯설지 않다. 오도카니 내버려 두었던 내 마음을 간질이는 문장들. 


별자리 운세처럼, 내가 눈을 두기만 하면 이 책은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에게!








만약 책에 생명이 있다면 이 책에선 분명히 모과나 살구 향이 날 것 같다. 《다정한 매일매일》은 백수린 작가님의 첫 산문집이다. 책과 빵 그리고 글을 쓰는 이의 마음에 관한 짧은 글들이 모여있다. 책을 추천받는 느낌으로 읽다가도 어느새 바움쿠헨이라는 나무 나이테 모양 빵이 먹고 싶어졌다가 독서 일기를 쓰고 싶어지기도 하는 신기하고 편안한 책.



이 책의 교정원고가 도착한 날은 비가 온 날이라 작가님은 부랴부랴 일을 보고 집으로 서둘러 가셨다고 한다. 현관문 앞에 놓여있을 원고가 혹시라도 비에 젖진 않았을까 걱정하면서. 그런데 도착해보니 비를 피하러 온 길고양이 한 마리가 원고 위에 앉아 있었다. 원고 봉투는 "고양이의 온기가 묻어 따뜻했(p.5)"고 원고는 멀쩡했다고 한다. 책의 첫 장, 작가의 말에 실린 에피소드인데 이 책의 인상이 딱 이 느낌이다. 꼼지락거리면서 올라오는 온기에 마음이 따스해지는 느낌.



벌써부터 새해 목표가 하나 생겼다. 첫째는 작가님이 소개해 주신 책들 읽기.

앨리스 먼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켄 리우 같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이름이 있어서 반갑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내가 읽어보지 못한 책이었다.



말하자면 지금 나와 이 책들의 관계는 백수린 작가님을 사이에 두고 어색하게 악수를 주고받는 사이다. "어, 여기서 또 뵙네요!"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는 상상을) 했던 켄 리우 작가의 《종이 동물원》만 빼고. 내가 직접 만나보고 작가님의 글을 다시 읽어 봐야겠다. 책이든 사람이든 막 소개받았을 때와 사귀고 나서 인상이 달라지듯이 새로운 발견을 할 것 같아 두근거린다.



그중 가장 먼저 읽고 싶은 책은 소설 쓰는 마음(p.67)에 소개된 《파스칼 키냐르의 말》이다.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글을 쓴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책이라고 한다. 조금씩 쓰다 보면 나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는 풋내기로서 작가님도 나와 비슷한 고민하시는구나 싶어서 위안이 되었다. 바로 상상 속에선 블록버스터 액션 로맨틱 코미디 영화 느낌이 났던 글이 정작 밖으로 꺼내 보면 영화 포스터 조각보다도 납작한 이 현실에 대한 고민이다.




인물들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한 번에 가주는 법이 없고, 몇 번이나 상상했던 근사한 장면조차 언어의 옷을 입혀놓으면 내 머릿속의 그것과는 조금도 닮아 있지 않다. 내가 써놓은 것과 쓰고 싶은 것 사이의 간극 때문에 괴로울 때면 나는 파스칼 키냐르의 말을 떠올린다.



언어는 그것을 갖고 있지 않은 자가 뒤늦게 얻는 것입니다. 언어는 상실의 자리만 있을 뿐 다른 자리는 없어요. 언어는 항상 인류를 저버리고 떠나는 중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언어의 결여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경험입니다.

68쪽.



새해 둘째 목표는 작가님이 소개해 주신 빵도 찾아 먹어 보기. 오페라, 구겔호프, 아마레티, 콜롬바 같은 처음 들어보는 빵이 많아서 이 책을 읽기 전엔 항상 검색 엔진을 켜두었다. 하나같이 다 맛있어 보였다. (칼로리 괜찮을까?) 이건 새해 목표라기보단 버킷 리스트 맨 밑으로 슬쩍 내려둬야겠다. 히히.





문장을 읽었을 뿐인데 그 사람과 친분을 쌓고 있다는 착각이 들 때가 있다. "당신은 나를 모르지만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아요.(p.88)" 백수린 작가님에겐 기시 마사히코의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이 그런 책이라고 한다. 나에겐 이 책, 《다정한 매일매일》이 그렇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님의 옆에 앉아 이야기를 듣는 상상을 한다. 남몰래 쌓아본다, 작가님과의 특별한 우정을.



세상 어딘가에 나와 공명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오래전부터 많은 작가들과 이런 식의 특별한 우정을 남몰래 쌓아왔다.

88쪽.



소설을 쓰고 싶은 열망이 부드럽지만 단단한 돌멩이처럼 가슴속에 박혀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할 일은 좋은 소설을 쓸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을 견디며 관찰한 것들을 묵묵히 계속 써나가는 것뿐일 테다. "나는 내가 쓴 글에 실망할 게 틀림없다는 생각을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101쪽.




산책을 나온 솜사탕 같은 강아지를 봤을 때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느려지듯이 이 책을 읽을 때는 시계 초침조차 움직이기를 거부한다. 손가락은 책장을 쓰다듬기만 할 뿐이다. 여기 좀 더 머무르고 싶다고 속삭인다. 나에게 다정하지 못했던 날들의 안부를 묻는다. 







이십 대의 나는 자신감이 정말 없었고, 타인에게 나를 드러내는 걸 공포스럽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 그것은 모두,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세상에 없다는 이상하지만 강한 믿음에 내가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 P146

올해는 존재의 가치를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처럼 억지로 거창한 목표를 세우지 않으면 어떨까? 마치 내일이면 세상이 끝장날 것처럼 모든 일을 당장의 손해와 이익으로 계산하지도 말고. 싫어하는 노래를 다른 사람들이 부른다고 해서 억지로 따라 부르지 않는다면, 고통을 쉽게 외면하거나 누군가의 상처에 대해 가볍게 말하지 않는다면. 새해에 당신과 내가 들여다보았으면 하는 것은 오직 마음. 빈집처럼 쓸쓸하지만 마시멜로처럼 달콤하고, 쿠키 조각처럼 바삭거리며 쉽게 부서지거나 구멍 뚫린 양말처럼 초라하다가도, 털실 뭉치를 닮은 강아지의 엉덩이처럼 둥글고 따뜻해지는 마음, 마음, 마음들. - P58

이 책을 읽는 사람에게, 고양이가 앉았던 자리만큼의 온기가 되어주었으면. 이상하고 슬픈 일투성이인 세상이지만 당신의 매일매일이 조금은 다정해졌으면. 그래서 당신이 다른 이의 매일매일 또한 다정해지길 진심으로 빌어줄 수 있는 여유를 지녔으면. 세상이 점점 더 나빠지는 것만 같더라도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안녕을 빌어줄 힘만큼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을 것이므로. 그런 마음으로 당신에게 이 책을 건넨다. -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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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버나딘 에바리스토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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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함께 존재하는 것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은 흑인 정체성에 주목하며 끊임없는 형식 실험을 하는 영국계 흑인 작가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손에서 태어난 산문시 같은 소설이다.



문장부호가 거의 없는게 특징이다. 그런데도 대화, 독백, 묘사가 서로 엉키지 않고 의식의 흐름과도 같이 흘러가며, 마침표는 각 챕터의 마지막 문장에만 찍힌다. 금방 적응할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첫 장을 펼치고 나서 다 읽을 때까지 마침표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열두 명의 이야기 속에 푹 빠져있었다.



책을 펼치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인물이 앰마다. 젊었을 때는 저항하는 페미니스트였고, 50대인 지금은 연극 감독이다.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많이 투영된 인물이다. 앰마를 기준으로 뻗어나가는 흑인 여성 서사의 나뭇가지는 열두 명 그 이상으로 나아간다. 인종, 성, 젠더, 계급, 억압과 부조리함에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며 대처하는가 보여준다.



열두 명의 관계는 가족, 친구, 직장동료, 선생과 제자 사이 같은 고리로 이어져있다. 모두가 모두를 아는 것도 아니며, 서로 대립되는 가치관을 지닌 사이도 많다. 독자의 시선에선 각 인물들의 과거, 현재, 속마음이 다 보인다. 그러나 소설 속 열두 명은 서로의 비밀을 알지 못하기에 같은 상황에서 종종 다르게 생각하고 받아들인다.





244쪽. 여기서 책을 내려놓고 며칠 동안 거리를 두었다. 캐럴과 버미의 이야기를 읽는 중이었다. 앰마가 작가 본인을 가장 많이 닮은 인물이라면 캐럴은 이 책을 탄생하게 해준 인물이다. 나이지리아 출신 영국 이민자인 버미는 꿈을 좇아 남편 오귀스트와 함께 도착한 영국도 고향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인종차별이라는 새로운 장애물과 맞닥뜨렸다. 영국에선 버미가 수학과 전공인 것도, 오귀스트가 예의 바르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것도 쓸모없었다.



그래서 버미는 딸 캐럴에겐 나이지리아인 느낌의 이름은 지어주지 않았다. 캐럴은 열세 살 때 파자마 파티에서 끔찍한 경험을 하고 돌아온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시궁창과 같은 현실과 자신에게 확정된 미래 "유모차를 몰고 가는 미혼모, 아빠 없는 시한폭탄을 밀고 가는 미혼모(p.184)"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공부만이 살길이라 판단하고 또 다른 주인공인 교사 셜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캐럴의 친구들은 갑자기 변해버린 친구의 태도가 아니꼬웠고, 어른이 되어 캐럴이 금융계 고위직에 오른 걸 보면서 배 아파하거나 재수 없어 했다. 캐럴에게 아무리 영국인처럼 행동하고 말해도 나이지리안임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했던 엄마 버미도 캐럴에게 일어난 일을 몰랐다. 내가 책을 읽을 때 새벽에 혼자 훌쩍거리면서 울고, 울음소리가 엄마와 비슷하다는 건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뜻밖의 사실이었다.



나와 가장 가깝게 느껴졌던 인물은 이분법적 젠더 분류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매건/모건이었다. 매건이라는 여자아이로 태어나 가족 안에서 '여자아이다움'을 강요받아야 했던 매건은 온라인에서 만난 트랜스젠더 친구 비비를 통해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을 처음 알게 되고, 생물학적 성과 젠더의 차이를 배워간다.



LGBTQIA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트랜스젠더·간성애자·무성애자).

소수자들은 왜 새로운 단어들을 만드는가? 처음에 우리가 가진 건 두 개가 전부였다. 그들이 단어를 만들고 범주를 만드는 것. 두 개가 익숙한 사람 입장에선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 그렇게 해서 언젠가는 분류 자체가 의미 없어지고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 단어가 너무 많아서 그 단어들이 가치를 잃도록 만들기 위해. 여성, 남성이라는 단어에 얼마나 많은 부가적 의미가 들러붙어있는가. 그것들을 전부 떼어내어 분해하고 곱게 갈아서 뿌리겠다는 뜻이다. 그렇게되면 남는 건 사람과, 이름이 전부일 테니.




이분법적 젠더가 자리 잡은 사회에 살면서 어떻게 젠더 프리 정체성을 실천할 수 있을까? 그러게 많은 정의가 있다면 (정신 나간 내용이면서도 동시에 정신 멀쩡한 내용이라는 말은 삼갔다) 젠더라는 개념 자체가 결국 아무 의미도 없는 게 아닐까? 누가 이 정의를 다 기억할 수 있겠어? 어쩌면 그게 핵심인가? 그렇게 완전한 젠더 프리 세계가 되는 건가? 아니면 순진한 유토피아적 꿈일까?

본문 455쪽.





BBC는 "마거릿 애트우드와 또 다른 작가"가 2019년 부커상을 공동 수상했다면서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이름을 빼놓고 보도했다. 만약 이 책의 내용이나 인물들의 대사가 정치적이라고 느껴진다면 그건 피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사회와 정치는 권력의 흐름과 민감하게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고 부조리한 권력은 위에서 아래로 일방적으로 행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권력은 누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가 중요하지 않다. 흑인 인권 운동가도 성차별적인 농담을 한다. 차별, 혐오와 폭력은 범인류적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에 어떻게 대처하고 행동할 것인가다.

극단과 무관심 그 사이 어디쯤. 나는 그것이 나의 상태였으면 한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이고, 스펙트럼 안을 하루 이틀 새에 시계추 마냥 왔다 갔다 하는 게 나의 현실이지만. (조울증일까? 호르몬 때문일까?) 하지만 내가 어디쯤에 있든 간에, 나는 이것만은 지키려고 한다.



상대방을 모르면 모를수록, 그 사람의 눈을 마주 보며 이름을 부르는 것.

가진 것이 없어도 내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이 아닐까.

이 책의 목차가 그런 이름 열두 개이듯이.



각자의 견고한 존재를 나타나기에

이런 단어들은 무색하고

당신의 빛깔과 비교하면

저런 표현들은 무색무취이기에

그래서 나는 당신을 이름으로 부르고자 한다

한때 아무도 칭송하며 노래해주지 않고

아무도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

존재였어도

지금 여기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내게 (이름을_입력하세요)이다.









버미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코피가 싱싱한 레몬으로 만들어 가져다준 레모네이드를 마신다

그녀 어머니가 살아서 새로운 인생을 즐길 수 있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 날 봐요, 마마, 날 봐요. - P263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어떻게 만났는지 이야기해주세요, 무릎에 졸린 얼굴로 위태롭게 앉은 매디슨의 등을 쓰다듬으며 레이철이 난데없이 묻는다 (…) 할머니, 한 개인이었을 때 할머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이에요

(…)

윈섬은 자신이 어머니가 되기 전, 레이철이 말했듯이 한 개인이었을 때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레이철이 궁금해하는 게 좋았다

그러나 그녀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딸이었고, 다음에는 아내이자 어머니였고, 지금은 할머니면서 증조할머니다. - P360

여기선 일 못 해, 클로비스가 부두에서 물으면 사람들이 말했어
여기선 식사할 수 없어, 작은 카페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말했어
여기선 술 마실 수 없어, 술집에 들어가면 모든 눈이 우리에게 쏠렸고, 바텐더가 말했어
여기선 잘 수 없어, 당신 피부색이 시트에 묻어날 거잖아, 유리창에 숙박 제공이라고 써 붙인 여자가 말했어, 당신 사람들은 그 정도로 무례하고 무식했지, 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내뱉었고 우리가 상처받는 건 신경조차 쓰지 않았어, 그들을 제지할 차별금지법이 없었거든

당신들이 할 수 있는 건 여길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거요,
우리가 항의하러 갔을 때 경찰이 충고했어 - P366

한번은 발작을 일으켜 바비 인형을 죽이려 한 적이 있었다, 색깔 마커 펜으로 얼굴을 마구 칠하고, 머리카락을 모두 잘라버리고, 가위로 눈알을 빼내고, 팔다리를 부러뜨렸다



(…)



침대, 책장, 벽난로 위 선반, 창문턱에 온통 인형이었고 방 안 어디에 있든 공포영화처럼 곳곳에서 소름 끼치게 그녀를 보면서, 볼록 튀어나온 완벽한 형태의 입으로 마음속 이야기를 그녀에게 들리게 말했다, 그래, 우리 싫어하는 거 알아, 그래도 우린 계속 여기 있을 거야 - P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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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종에 대하여 외 - 수상록 선집 고전의 세계 리커버
미셸 에켐 드 몽테뉴 지음, 고봉만 옮김 / 책세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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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모두가 독립적인 개별 인간으로서 판단되었으면 하며, 세상 일반의 사례에 따라 취급되지 않기를 바란다.

본문 81쪽.









이 책은 16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사상가이자 수필가였던 미셸 드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6개의 글을 선별해 엮은 것이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쏟아져 들어온 미지의 세계에 대한 정보는 유럽인들의 지리적 지식을 넓힘과 동시에 혼란과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야만’이라 이름 붙이고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경멸하고 무시하고 있을 때 몽테뉴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여기서 그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몽테뉴에겐 여행을 갈 여유가 있었다. 반면 21세기 사람에겐 인터넷이 있다. 몽테뉴 보다 훨씬 빠르고 쉽게 지구 반대편의 사람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그런데도 혹자는 지금을 '혐오의 시대'라고 평가한다. 적극적으로 바깥 세계와 접촉하고 문화와 사회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걸까.




타인과의 대화가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고 광범위하게 이뤄짐에도 독단과 아집의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몽테뉴의 글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인터넷이 "타인을 대화의 대등한 상대로 인정하고 선입관이나 편견 없이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13쪽),열린 마음을 만들어 주진 않기 때문이다.




몽테뉴의 시각에도 한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유럽인의 시각으로 '신대륙' 문화를 자신에게 익숙한 서구 문화와 견주어 비등하다고 판단하며 그들 문명의 비야만성을 역설한다. 몽테뉴가 루앙에서 만나 대화를 나눴던 브라질 원주민들은 몽테뉴가 적은 것과는 달리 '교류를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그곳으로 '끌려온' 것이었다. 또한 그가 우려했던 원주민과 유럽인 사이의 '교류'는 사실 '전쟁과 일방적인 침략'의 결과물이었다.




나는 우리의 지식이 모든 면에서 미약한 것이 아닌가 걱정한다. 우리는 앞을 멀리 내다보지도, 뒤를 돌아보지도 않는다. 우리의 지식은 아주 작은 영역을 다루고, 오래 지속하지도 못한다. 내용의 폭도, 시간의 폭도 좁은 것이다.

본문 62쪽.




몽테뉴는 이런 자기 지식의 미약함을 알고 있었다. 몽테뉴의 의견이 맞다 틀리다를 떠나서 다름을 이해하려면 차이점을 적대시하기 보다 공통점을 찾는 노력부터 했다는 점을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내 삶은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아무 의미 없는 선과 점이 모여 뜻을 상징하는 문자가 놀랍다. 몇 개의 단어만으로 서로를 재고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비약과 오만의 탄생 또한 놀랍다. 그러나 몽테뉴의 글이야말로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감탄의 연속이었다. 그의 문장이 지금 우리 사회가 마주하고 있는 혐오와 편견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16세기 철학자의 눈에도 확연했던 문제를 두고 왜 우리는 둘 이상 편을 짜고 들들 볶고 싸우고 있는 건지 당황스러웠다. 몽테뉴의 문장은 정곡을 찌르면서도 우아하고 가벼웠다.




이해를 돕는 주석과 고봉만 교수의 해제 덕분에 책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책의 맨 끝자락에는 몽테뉴를 더 알아볼 수 있는 참고 도서도 소개되어 있다. 그중에 솔 프램튼의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가 있어서 반가웠다. 어떤 경로로 추천받아 철학서 위시리스트에 올려둔 책인데 몽테뉴에 관한 내용이라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




타인과의 대화에서 대립과 갈등을 피할 수는 없다. 나와는 다른 그들과의 "연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붕대감기』)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밤이다.










몽테뉴는 신대륙 발견이 불러온 충격과 혼란 속에서 ‘타인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새로운 고민에 천착했다. - P9

자연은 우리를 자유로운 존재이자 얽매이지 않는 존재로 이 세상에 내놓았는데, 우리가 스스로를 좁은 곳에 가두어버리는 것이다. - P14

사물은 자체의 무게와 치수, 그 밖의 여러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사물이 일단 우리 내부로 들어오면 정신은 그 사물을 자신이 이해하는 바에 따라 마름질한다. - P93

사람들의 정신에는 저마다의 양식, 규준, 본보기가 있기 때문에 결코 똑같은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 그러므로 사물의 외적인 성질을 탓하며 우리 자신을 변명하는 짓은 더 이상 하지 말자. 오히려 사물에 성질을 부여한 우리 자신에게 설명을 요구하기로 하자. - P94

몽테뉴를 상징하는 ‘크세주Que sais-je‘라는 말은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뜻이다. 그것은 일종의 방법으로서의 의심, 다시 말해 자유로운 검토를 위한 의심이다. 그 성과는 자유로운 정신이다. 몽테뉴의 회의주의는 허무주의가 아니라, 회의를 통해 어떤 확실성을 자유롭게 추구하려는 노력이다. 몽테뉴에게 그것은 자신을 아는 것이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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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나의 도시를 앨리스처럼 1~2 - 전2권
네빌 슈트 지음, 정유선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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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들이 다 이렇게 잘 된다면 당신은 곧 앨리스 스프링스 같은 도시를 갖게 될 거예요.”

“내가 하고 싶은 게 바로 그거예요. 이 도시를 앨리스처럼 만드는 거요.”

2권, 250쪽.




《나의 도시를 앨리스처럼》은 생존과 개척 그리고 사랑을 다룬 장편 소설이다. 분량은 540여 쪽이며 총 2권으로 나눠져 출간되었다. 2차 세계대전 중엔 일본군의 전쟁 포로로, 전후엔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새 삶의 터전을 개척하는 주인공 진 패짓의 파란만장한 삶을 단정한 문체와 충실한 묘사로 그려냈다.




"전쟁 때 포로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 많은 책을 썼어요. 그들은 수용소에 가지 못한 사람들의 처지가 어땠는지 짐작도 못 할 거예요."

1권, 105쪽.




질병과 모기, 식량부족과 싸워가며 당장 잠잘 곳도 걱정이었던 말레이의 전쟁 포로들은 마을 사람들과 감시병들의 친절에 의지하며 싱가포르에 있는 수용소를 향해 행군을 계속했다.



행군 시작 5개월, 거의 800킬로를 걸었을 때쯤, 진은 조 하먼이라는 호주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일본 군대를 위해 트럭을 운전했는데, 호주에선 목동이었다. 조는 여자들을 위해 비누, 약품과 식량을 구해다 주다가 일본군에게 붙잡혀 목숨을 잃는다. 조의 죽음은 진의 가슴에 전쟁이 남긴 또 다른 상처로 남았다. 일본 감시병이 열병으로 죽은 후 진과 남은 포로들은 쿠엘라텔랑 마을에 정착하여 3년을 살았다.




"촌장님은 마을 대표로 저와 함께 가셔서 우리가 계속 논에서 일하도록 허락해 주면, 일본군을 위해 더 많을 쌀을 재배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이게 제가 원하는 거예요."

"난 백인 여자들이 논에서 일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우리처럼 강제로 걷다가 죽은 백인 여자들 얘기는 들어보셨나요?"

그는 대답이 없었다.

1권, 178쪽.




전쟁이 끝나고 영국으로 돌아온 진은 어머니와 오빠의 부고를 들었다. "자유는 되찾았지만, 세상에 완전히 혼자 남겨진(p.188)" 그녀는 몇 년 후 자신이 외삼촌 더글러스의 5만 3000파운드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평생 일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돈으로 가치있는 일을 하고 싶었던 진은 가장 먼저 쿠엘라텔랑 마을에 우물을 짓겠다고 결심한다. 바로 그 대목이었다. 내가 진 패짓을 사랑하게 된 순간이.



마을에 우물과 공동 세탁장이 생기고, 진은 죽은 줄만 알았던 호주 남자 조 하먼이 살아있다는 희소식을 듣게 된다.



여기까지가 1권의 간략한 줄거리인데, 이후 진의 여정을 세세한 부분까지 나열할 필요를 못 느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독자가 직접 만났을 때를 대비해 여백을 남겨두는 것이 나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숨겨진 보물을 찾기 위해 위험천만한 유적을 탐험하진 않으나, 소설은 마치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처럼 흥미진진하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넘어서기 위해 진은 자신의 모든 능력을 쏟아붓는다. 그녀 특유의 신중함, 친화력 그리고 행동력은 주변 사람들의 신뢰와 도움을 끌어온다. 진과 조의 관계는 존중과 신뢰를 토대로 이뤄져 견고하다. 서로를 위하고 아끼는 모습은 찬란하게 빛이 난다.



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 때 수마트라 전역을 돌아다녔던 여성 포로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작가 네빌 슈트는 생존자를 직접 만나 함께 지냈다. 그렇게 전쟁 속에 폐허가 되어버린 꿈과 고향, 가족의 상실을 딛고 일어섰고, 끝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새 삶의 터전을 일구어낸 사람들과 그 중심에 있었던 한 여인의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진 패짓. 나는 그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작품의 제목이 명시하는 바, 폐허가 된 마을을 살기 좋은 도시 앨리스 스프링처럼 가꾼다는 것, 운명을 개척한다는 것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 느낀 벅찬 감동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말레이에서 사람들이 말라리아와 이질에 걸려 죽어가고, 열병으로 빗속에서 덜덜 떨고 있을 때 옷도 없고 식량도 없고 갈 곳도 없었어요. 아무도 우리를 원치 않았거든요. 그때 저는 무엇보다 사우샘프턴의 아이스링크를 떠올리곤 했어요. 그건 전에 살았던 삶의 상징 같은 거였어요. 누구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그런 거요. 영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사우샘프턴으로 돌아갔어요. (…) 그런데 그곳이 폭격당했더군요."

1권, 60쪽.



도시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일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나는 여기 앉아 런던의 자욱한 안개를 내다보며 이따금 진이 이룩한 일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한다. 우리 중 누구라도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이루었는지 깨달은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2권, 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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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생각 - 이 세상 가장 솔직한 의사 이야기
양성관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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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가 아니라 현실 세계,

그것도 한 의사의 머릿속에 들어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구경 잘하고 가시기를.

본문 14쪽.









이 책의 구성인 ‘보다’, ‘듣다’, ‘두드리다’, ‘만지다’는 환자를 진찰하는 가장 기본적인 진찰 순서이다. ‘시청타촉’을 통해 환자와 보호자뿐만 아니라, 의학과 의료 환경 그리고 의사로서 자신을 진단하는 저자의 솔직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에세이다.




보고, 듣고, 두드리고, 만지는 의사의 진찰은 증거 수집과 용의자 소거 과정을 통해 탐정의 추리와 비슷하다. 범인은 찾았으나, 사건을 해결할 수도, 범인을 체포할 수도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의사는 탐정이 될 수 없다. "사람들은 확실한 것을 원하지만 의사는 불확실함을 말하기 때문이다.(p.116)"





어떤 해부학 교수님이 해주셨다는 말이 떠오른다.


”앞으로 너희들을 이해해 주는 건, 같은 의사들밖에 없을 것이다. 심지어 가족들조차도 너희를 이해 못 하고, 너희 의견에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의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이런 의사들을 이해해 줄 사람이 있을 거라고 믿기에 글을 쓴다.


본문 131쪽.





후덥지근한 여름날 새벽. 아픈 몸을 이끌고 찾아간 응급실. 절반 정도 꺼진 조명과 바깥공기와는 다른 병원 냄새에 긴장했던 어깨. 헝클어진 머리카락, 피곤에 반쯤 잠긴 눈으로 계단을 내려오던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 선생님이 떠올랐다. '감사합니다'하고 고개 숙여 인사하고 열린 자동문 밖으로 나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었다. 이 책을 읽으며 환자로서의 내 생각과 감정만 있던 그 기억의 자리에 여러 가지가 겹쳐졌다.




진찰실에 들어오는 환자를 보면서 스쳐 지나가는 의사의 생각과, 잠 못 자는 새벽, 호스피스 환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죽음 앞에서 느꼈던 패배감과, 응급실에서 마주했던 인간의 바닥, 그 바닥에 떨어진 보이지 않는 눈물, 어머니의 소중한 아들이며 위계질서의 말단 의사의 고민, 고이 접어둔 불가능한 꿈이 다시 펼쳐지는 찰나의 순간이….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가 아니라 '사람'을 돌보는 사람으로서의 진솔한 글을 읽을 기회가 주어져서 감사하다.










응급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온다. 아픈 사람도 있지만, 보험 사기꾼에 알코올 중독자, 마약 중독자, 노숙자에 살인자까지. 자신의 삶을 포기한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을 빼앗은 인간들이 온다. 응급실뿐만이 아니다. - P78

그는 자리에서 쉽사리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한 의사를 보았다. 그런 의사의 생각을 모른 채 잘 돌봐주셔서 감사하다는 보호자의 말에 의사는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울었다. 그날 그곳에서, 그는 차마 보고 싶지 않았던 한 인간의 바닥을 보았다. - P98

매일매일 새로운 자극과 도전이 필요했다. 모든 과를 두고 곰곰이 생각했다.(…) 가정의학과가 나에게 어울릴 것 같았다.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 또한 사람이 가진 ‘질병’이 아니라, 질병을 가진 ‘사람’을 볼 수 있었다. - P141

비록 의사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은지 가정환경과 은지의 우울한 삶도, 이비인후과 과장님의 수술 실력도, 어떻게든 환자를 빨리 퇴원시키도록 몰아가는 포괄수가제도,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한국 사회와 의료 문화도 내가 바꿀 수는 없다. 몇 년이 지나서야 겨우 이렇게 용기를 내어 글을 써보는 게 전부이다. - P213

"의사 선생님 주려고 그렸어요."

아이의 그림을 보면서 20년 전, 의사를 꿈꾼 것이 현명한 선택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불가능한 꿈을 꿔본다.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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