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켄 리우 한국판 오리지널 단편집 1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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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에 얻어맞았다’라고 썼다. 

《종이 동물원》은 내게 그런 작품집이었다. 

그게 지난 1월에 있었던 일이다. 켄 리우 작가의 글은 나의 내면을 뒤바꿔놓았다.




한국판 오리지널 중단편집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로 그의 글을 다시 만났다. 1월에 내가 봤던 그 신비한 동물이 표지에 떡하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조각가 츠치야 요시마사의 2010년 작 <기린 Qilin>이다.

전설 속 동물, 기린은 켄 리우의 작품세계를 대표하는 동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종이 동물원》이 갓 물 밖으로 나온 야생 동물 같았다면, 이젠 그 녀석이 아름답게 꾸며진 수족관 속에서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 걸 내가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초월’이라는 주제로 느슨하게 엮인 12개의 작품은 어딘가 온순하고 길들여진 느낌이다. 《종이 동물원》에게 귀싸대기를 맞았으니 상대적으로 그렇게 느낀 걸지도.





내가 생각하기에

과학 소설이 하는 일,

또는 적어도 내가 이야기 속에서

하고자 하는 일은,


오히려 희망과 공포로 가득한

지금 이 순간의 현실에

확대경을 가져다 대는 것이다.


본문 9쪽,

저자 머리말 중에서.






여러 작품이 실려있는 중단편집이다 보니 독자마다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 다를 텐데, 그 감상을 비교보는 것도 이런 책을 읽는 매력 중 하나인 것 같다.




『카르타고의 장미』 ― 『뒤에 남은 사람들』 ― 『어딘가 상상도 못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로 이어지는 싱귤래리티 3부작은 순서대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유연하게 이어진다.



『카르타고의 장미』, 『뒤에 남은 사람들』을 읽는 동안 단편 『시뮬라크럼』이 생각났다. 《종이 동물원》에 실린 그 단편에는 피촬영자의 의식과 행동양식을 저장해서 홀로그램 형식으로 투사하는 기술이 나온다. 싱귤래리티 3부작에선 인간의 의식을 디지털 세계로 업로드하는 기술이 등장한다. 그 결과물을 실재의 재현 또는 모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갈등이 발생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이야기는 인공지능 인형을 만드는 공학자 엘레나가 나오는 『사랑의 알고리즘』이다. 엘레나는 총 4개의 인형을 만든다. 제작 순서대로 척척박사 로라™, 재치 만점 킴벌리™, 에이미™, 타라™다. 왜 중간부터 앞 수식어 없이 그냥 에이미나 타라로 이름 붙였을까? 엘레나는 사람같이 행동하는 정교한 인형을 만들면서 철학적 난관에 부딪힌다. 그것이 엘레나를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지켜보는 게 흥미로웠다.



인조 피부 조금, 합성 고분자 겔 조금, 알맞은 수량의 모터와 영리한 프로그래밍 능력을 잔뜩 동원하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기술로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일.

본문 153쪽.




같은 맥락에서 『곁』도 좋았다. 먼 미국 땅에서 원격 접속을 통해 태평양을 건너 임종을 기다리는 어머니를 로봇으로 간병하게 된 남자의 이야기다. "이 로봇은 죄책감을 덜어 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239쪽)" 『사랑의 알고리즘』에서 엘레나가 만든 인형들에도 목적이 있었다. 기술이 발전하며 인간의 생활상이 변해간다. 그것에 저항하는 사람도 있고, 적응하는 사람도 있다. 이번 작품집에는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게 뭔지, 지켜야 할 가치가 뭔지(212쪽)" 고민하는 주인공들이 대거 등장한다. 유한한 생, 연약한 몸의 한계를 '초월'할 준비가 이들은 아직 되어있지 않다. “인간성에 대한 믿음. 우리가 사는 방식에 대한 믿음(223쪽).” 때문이다.




문명이란 죽음이라는 현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점점 더 정교해지는 거짓말을 쌓아 가는 과정이다.

본문 236쪽.



역사학 교수 유발 노아 하라리는 국가, 기업, 돈, 법, 종교 등이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이며, 이 이야기를 믿기 때문에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십대 중국인 남자 장원차오의 이민 신청을 돕는 변호사 샐리 러스가 나오는 『달을 향하여』는 '이야기'라는 게 뭔지 질문한다. 켄 리우는 서문에서 "우리는 저마다 각자가 만든 장대한 판타지의 주인공(10쪽)"이며,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공감', '관용', '애국심'이나 '정직' 같은 가치를 배워간다고 한다. 한편으로 "국가는 역사라는 덫에 붙잡혀서는 안 되며, 개개인은 단지 경험의 총합에 머물러서는 안 됨(11쪽)"을 강조한다.



작품 중 변호사 샐리 러스는 어려서부터 원칙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변호사로서 지켜야 할 규칙과 장원차오가 지어낸 이야기 사이에서 갈등한다. 샐리가 지키려고 하는 규칙 또한 인간이 만든 이야기의 일종이다.



“우리는 그저 규칙대로 하려고 애쓰는 것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는 정해져 있지요.”

“나는 진실이 듣고 싶어요!”

장원차오는 껄껄 웃었다.

287쪽.




책에 실린 작품 중에서 《종이 동물원》에서 받았던 켄 리우의 느낌과 가장 닮아 있는 것은 『모든 맛을 한 그릇에 ― 군신 관우의 아메리카 정착지』라고 생각한다. 알고 보니 미국판 《종이 동물원》엔 수록되어 있는 작품이라고. 중국계 미국인으로서 바라보며 탐구하는 두 문화의 접촉. 삼국지의 명장이자 군신으로 칭송받는 관우를 똑 닮은 ‘로건’이 어째서 골드러시가 한창이던 미주리 주로 오게 된 걸까?




원작을 옆에 두고 읽지 않아도, 문장이 착 달라붙는 느낌에 감탄하는 번역본이 있다. 개인적으로 《종이 동물원》, 《냉정과 열정 사이 Blu》, 《허삼관 매혈기》가 그랬다. 켄 리우의 작품들은 장성주 번역가님이 계속 맡아서 한국에 소개해 주셨으면 좋겠다. 최신 단편집 소식도 들려오니 벌써 가슴이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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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작은 아씨들 (1896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디럭스 티파니 민트 에디션) - 합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박지선 외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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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가 뽀얗게 쌓이고 

세월의 흔적이 묻은 채

일렬로 늘어선 나무 상자 네 개.

그 뚜껑 밑에 숨겨진 

행복한 아이들의 이야기.​


조세핀 마치, 

<다락방에서> 중에서.

본문 957쪽.




▲ 여리여리한 색을 입고 나온 민트 은장 에디션. 벨벳 금장 에디션과는 사뭇 다른 느낌. 아름다운 책 디자인 덕분에 책장에 꽂아두어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휘한다.




"선물도 없는데 크리스마스는 무슨 크리스마스." 

조가 양탄자에 누워서 투덜댔다.


《작은 아씨들》의 첫 문장.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예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조를 다시 만난 것에 기쁨을 금치 못했다. 




루이자 메이 올컷이 1856년 '소녀들을 위한 책'을 써달라는 출판사의 요청으로 집필하기 시작한 《작은 아씨들(Little Women)》은 1868년에 1,2 부로 나뉘어 출간되었다. 여성, 계급, 인종 문제 등 인권에 관심이 많았고 활발하게 활동했던 올컷이 어린 소녀들에게 전하는 애정어린 조언이 담겨 있는 소설이다.



올컷은 평생 독신으로 언니와 동생의 자식을 돌보며 살았다. 이 책에 담겨있는 가족의 끈끈한 결속력, 결혼생활의 밝고 어두운면, 부모 자식 사이의 교감, 자매들 간의 우애는 올컷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과 닮아 있다. 당돌한 말괄량이이자 작가를 꿈꾸는 둘째 조 마치는 올컷의 분신이다. 



1부는 크리스마스 날에 시작해서 일 년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가난 속에서도 이웃에게 베풀고 감사할 줄 아는 자세를 실천하는 자매들의 일상이 펼쳐진다. 네 자매에겐 각자 극복해야 할 시련이 있다. 메그는 허영, 조는 불같은 성격, 베스는 수줍음, 에이미는 자존심을 극복해야 했다. 네 자매의 어머니 마치 부인은 전쟁터로 나가 집에 없는 남편의 빈자리를 현명함과 신중함으로 채운다. "자식이 순순히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직접 가르침을 얻을 수 있도록 놔두는(534쪽)" 마치 부인의 교육 방식은 현대에도 본받을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2부는 1부가 끝난 후 3년 뒤, 메그의 결혼식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제 어른이 된 자매들은 각자의 꿈을 좇아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현실이 그렇듯이, 자매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행복 만이 아니었다. 상실과 슬픔을 마주 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불신하지 않은 채 삶을 받아들이고, 삶의 아름다운 기회들을 감사히 여기며 힘차게 사용하도록(876쪽)"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타협하되, 안주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자녀를 위해 열심히 살아온 부모는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많은 사랑을 주었고 

그렇게 이어진 가족의 끈끈한 결속력은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축복이었다.

본문 497쪽. 







◆◆◆




수많은 출판사의 손을 거쳐 다양한 판본으로 탄생한 《작은 아씨들》은 《빨간 머리 앤》처럼 독자들의 마음속에 특별하게 자리 잡은 작품이다. 시간이 지난 후에도 회자되면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니 말이다.



더 스토리가 펴낸 《작은 아씨들》 티파니 민트 은장 에디션은 지금까지 봐온 판본 중에 가장 어여쁘고 호화스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보이는 아름다움 만큼 원작의 매력을 충분히 전달할 번역이 중요하다. 안타깝게도 이번 작의 번역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오역도 적지 않았고, 지나친 지칭 대명사 사용을 고수해서 어색한 문장도 많았다. 



번역 후에 검토 및 교정 작업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출간된 것 같은 느낌이다. 부드러운 문장과 자연스러운 번역을 중요시하는 독자로서 개정판을 요구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메그가 남편 존에게 가계부에 적은 내용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에게 '파이핑 장식'이 무엇인지 궁리하게 만들고 '날 꼭 안아줘요.'라고 하게 만드는 수단을 맹렬하게 요구하거나 장미꽃 봉오리 세 개, 벨벳 조금과 끈 한 짝과 같은 사소한 것들이 모자 만드는 데 들어가 5~6달러가 된다는 것 등을 알려주었다. (본문 577쪽)." 


'날 꼭 안아줘요 (허그 미 타이트 Hug-me-tight)'는 몸에 꽉 끼는 여성용 편물 상의이다. 남편이 이 생소한 단어를 보고 물어보는 장면인데, 본문에서는 그 뜻이 전달되지 않을 뿐더러 문장도 어색하다.




◆◆◆




내가 어려서 읽었던 그 책은 어린이를 위한 1부 요약본이었기에 성인이 되어 이 책을 정식으로 읽게 된 것에 감사한다. 하나같이 재미있거나, 교훈을 주는 대화로 끝나거나, 각 자매들과 더 친해질 수 있는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있다. 처음 몇 장만 제외하면 각 챕터는 독립적이라서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 때도 편했을 것 같다. 영화로도 나온 걸로 알고 있고, 요약본도 편집자의 판단으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에피소드만 선택해서 책으로 만들기 쉬웠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읽었던 요약본에는 에이미의 이야기가 현저하게 적었다. 그래서 그런지 네 자매 중에서 가장 멀게 느껴지는 게 에이미였다. 어른이 돼서 다시 읽는 동안에는 에이미가 친근하게 다가왔다. 남들이 비웃더라도 "마음과 태도가 진정 우아한 숙녀가 되기위해 자신이 아는 방법대로 노력(625쪽)"하는 에이미의 모습에 용기를 얻었다. 



어디에도 얽매이길 거부하는 자유로운 조의 면과 수줍음 많은 소녀 같은 면이 공존했던 나는 이 두 인물에 감정이입을 했었다. 어른이 되어 처음으로 2부를 읽고 나서 조와 베스의 행방을 알게 된 후에는 이 작품이 다르게 다가온다. 조가 쓴 시 '나의 베스'는 눈물겹고 '다락방에서'는 아련하다. 문득 소설 내내 자기 자신을 은근히 드러내 보였던 화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때로 독자에게 '설교'를 하기 위해 지면을 할애하기도 하고, 마치 가家 딸들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겠다며 인사를 하기도 했던 '나'는 조세핀 마치이자 루이자 메이 올컷인 것일까. 



축복받은 빛이 올 때까지

어둠 속에서 인내하는 

고요하고 거룩한 존재여,

고통받는 우리 가정을 씻겨주는구나.


세속의 기쁨과 희망과 슬픔은

그녀가 기꺼이 딛고 선

깊고 장중한 강물의

잔물결처럼 부서지네.


네 삶을 아름답게 밝힌

그 미덕들을 나에게 선물로 남겨주렴.

감옥 같은 고통 속에서도

활기차고, 불평하지 않는 

그 영혼을 지켜주는 힘,

그 위대한 인내심을 나에게 물려주렴.


본분을 따르며 가는 길,

네가 기꺼이 발 딛는 곳마다 

초록으로 물들이는

그 용기와 지혜와  상냥한 마음이

간절하게 필요하니, 나에게 주렴.


조세핀 마치, 

<나의 베스> 중에서. 

본문 841쪽.



조는 나의 영웅이고 베스는 나의 천사다. 그 점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이제 좀 어른스러워졌나 싶은 때에 내가 어린 나를 위해 책을 쓴다면 어떤 내용을 담을까? 인류의 절반, 작은 아씨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건 무엇일지 생각에 잠기며… 책을 조심스럽게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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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 (반양장) - 제13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96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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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안해하며 눈을 떴다.


소설 《유원》의 첫 문장이다.

호기심을 자극하면서도 담백한 문장이라 마음에 든다.()


12년 전 일어난 아파트 화재 사고. 

한 명은 죽었고, 한 명은 살아남았으며, 한 명은 불구가 되었다.

한 명은 매일 미안해하며 잠에서 깨며, 한 명은 유성펜 같은 기억이 되어 살아있으며, 

한 명은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만약 각자의 사연이 딱 거기서 끝이라면 이 이야기는 결이 다른 동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인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사고로 인생이 뒤바뀐 것은 그 세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부모, 배우자와 자녀들 또한 영향을 받았다. 12년 전 사건이 남기고 간 것은 축복일까, 불행일까. 소설은 재를 뒤집어쓴 폐허 같은 가슴속을 조명하며 시작한다. 


고등학교 2학년인 유원은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그녀의 이야기는 이슈가 되어 학교의 누구나가 유원의 과거를 알고 있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해맑게 웃고 있는 신문 기사 속 6살 아이에게 앞으로 베풀며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길 기원했다. 유원의 생존은 다른 누군가의 단명을 의미한다. 바로 이 사실이 유원에게 미친 부정적 영향을 많은 이가 간과하고 있었다.






이 작품을 읽었다기보다 '피부로 느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적확한 표현인 것 같다. 소독약을 바른 후 아픔이 스며들며 아련하게 찾아오는 얼얼함과 편안함이 있었다. 내용을 읽어보면 편안함과는 거리가 먼 데도 내가 그렇게 느꼈던 건, 죄책감, 유감, 분노, 연민, 단절, 호기심, 이기심, 너그러움 같은 모순된 감정들이 뒤섞여 공존하는 십 대 소녀의  감정과 생각에 동조를 했기 때문이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옥상, 높은 곳에 대한 상징성이 마지막 장면에서 확 펼쳐지면서 "어딘가의 바깥에서 드디어 안으로 들어온 느낌(본문 223쪽)"이 들었다. 뭐라고 말로 하기 어려운 감정이 그 순간 유원의 내면을 흔들며 맴돌았을 텐데 차분히, 나란히, 그러면서도 벅차게 늘어선 문장 덕분에 카타르시스가 배가 되었다. 올해 읽었던 소설 속 잊지 못할 마지막 장면 중 하나로 남았다. 




높은 곳에 서려면 언제나 용기가 필요했다. 

본문 221쪽.


나는 어떤 사고 후에 주인공이 치유되는 과정이라는 것만 아는 상태에서 이 작품을 읽었다. 덕분에 사전 정보 없이 유원이라는 아이의 인생의 장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만끽할 수 있었다. 다른 독자분들도 그렇게 만나보시는 걸 추천드린다. 유원이 높은 곳을 꺼리는 이유, 사고가 남기고 간 정신·육체적 후유증, 상처의 치유 과정은 책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길...!


"내 이름의 뜻이 뭔지 알아?"

"뭔데?"

"원하다 할 때 원이야. 원하다, 희망하다, 그런 뜻이야. 원(願)."

"그래서?"

"언니가 나를 원했대. 엄청 기다렸대. 

그래서 원이라고 지은 거래."

본문 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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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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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내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내게 찾아온 자유와 행복. 

올바른 판단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세계는 이렇게 조화롭고 아름답고,

나는 그저 거기에 있기만 해도 된다. 

본문 66쪽.



스물네 살 때 페미나상을 받았을 때만 해도 에쿠니 가오리에게 글은 취미생활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세토우치 자쿠초는 편집자였던 아버지를 통해 얼굴만 알고 지낸 사이였는데 그녀에게 "쓴다는 건 부업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열심히 써서 궤짝에 한가득 모아놓고 시작하라(57-58쪽)"는 말을 해 주었다. 그 후 삼십 년이 지난 지금은 활발하게 활동하며 사랑받는 작가가 된 에쿠니 가오리. 그녀에게도 글이 마음대로 써지지 않아 영화를 보며 기분전환을 했던 날이 있고, "이런 글을 무심히 쓸 수 있게 되려면 대체 뭘 지나왔어야 하는 것일까(59쪽)"라며 감탄을 하게 만드는 우상도 있다. 



일기, 편지, 추억 회상, 단편 소설, 독서노트, 수상소감, 추천도서 목록, 여행 노트, 글로 쓴 먹방 등 지난 세월 잡지와 책에 실린 에쿠니 가오리의 글을 만나볼 수 있는 책이다. 크게 세 파트로 -읽기, 쓰기 그리고 그 주변- 나누어져 있다. 인생을 바꾼 책, 서점에서 우연히 신간을 발견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작가들, 여행과 음식 이야기를 읽는 동안 에쿠니 가오리라는 작가의 공간으로 들어선 기분이 들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도피인 동시에,

혼자서 밖으로 나가기 위한 연습이기도 했다. 

혼자서 여행하는 것, 사물을 보는 것, 이해하는 것, 

그리고 혼자 살아가는 것의, 간단한 연습이기도 했다.

본문 101쪽.



가장 첫 번째 글의 제목은 무제인데, 작가가 어느 날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받는다. 의사는 심각한 표정을 하고 환자의 몸 안에 "스노보드가 한 개 걸려 있다(11쪽)"고 말한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소형 보트와 비행기, 금귤베리 등등 하나하나 열거하자면 총 102페이지에 달하는 차트에 들어가는 것들이 전부 환자가 쉰이라는 나이가 되는 동안 "온 몸으로 주워모았다(17쪽)"고 한다. 그러자 환자는 안심하며 "어쩔 수 없다. 나는 소설가니까(18쪽)" 라며 진찰실을 나온다. 첫 장을 읽을 때만 해도 진짜 큰 병 때문에 병원에 갔나 보다 하고 걱정하면서 읽었는데 마술적 사실주의 요소가 들어간 아주 재미있는 도입부였다! 너무나 신선하고 놀라웠고, 재미도 있었기에 나는 순식간에 한 챕터를 다 읽어 버렸다.



쓰다 막힌 원고를 내버려 두고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전투하듯이 글을 써 내려간 어느 2009년 10월의 일기라던가,


한밤중에 서재 책장 위에 담아둔 잡동사니 박스가 덜커덩거려서 봤더니 그 속에서 짜리 몽땅한 지우개들이 옹기종기 내려와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문을 열어주고 작별 인사를 했다는 이야기는 이 책에 실린 글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글이다. 지우개들의 움직임을 사랑스럽게 묘사한 글이 너무 마음이 들어서 울고 싶어질 정도였다.  



소설 《도쿄타워》에서 받았던 인상과 달리 몽글몽글한 문장이 많았다. 몸이 너무 아파서 아무것도 못할 때 놓칠세라 끌어안았던 따끈따끈한 보온팩이 생각났다. 이 책에는 그림책과 동화 작가 이야기도 자주 나온다. 해외 동화를 번역했다는 작업 이야기, 어린이 서적 전문 서점에서 대형서점엔 없는 단 한 권의 책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을 쓴 글을 읽으니 그녀의 동화 사랑이 납득이 갔다. 에쿠니 가오리라는 사람 자체에 동화와 어울리는 구석이 있구나, 싶었다. 그녀가 쓴 동화「눈사람 유키코雪だるまの雪子ちゃん」를 읽어보고 싶어졌다. 




글자에는 질량이 있어, 

글자를 쓰면 내게 그 질량만큼의 조그만 구멍이 뚫린다.

가령 내가 안녕이라고 쓰면, 

안녕이라는 두 글자만큼의 구멍이 내게 뚫려서,

그때껏 닫혀 있던 나의 안쪽이 바깥과 이어진다. 

본문 52쪽.



에쿠니 가오리에게 "쓴다는 것은, 혼자서 하는 모험(54쪽)"이다. 그러나 완전히 혼자인 채로 끝나지는 않는다. 그녀가 이 책에서 말했듯이, 글을 쓰는 순간, 열린 구멍으로 바깥과 소통하는 통로가 생긴다. 독자는 그 길을 따라 작가의 세계로 떠나 잠시 머물게 되는 것이다. 한 번 연결된 통로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독자가 작가가 되고 작가가 독자가 되어 끊임없이 이어지는 언어의 장. 쓰고 읽고 주변의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은 삶이고, 인생은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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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이방인 - 1944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알베르 카뮈 지음, 최헵시바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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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직 인간으로서 세상의 부조리를 직시한 카뮈.

그의 뜨거운 시선이 불타는 태양과 어우러져 읽는 이의 가슴을 달군다. 




《이방인》을 처음 읽을 때는 어려운 단어나 표현이 없고 간결하고 건조한 느낌의 문장에 이끌려 읽어내려갔다. 완독 후에는 "다 읽긴 읽었는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느꼈다. 겉으로 드러나는 사건들만 읽어내려가는 걸로 이 소설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게 확고해지자, 나는 조사했다. 가까이서 찾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이방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읽어 보았다. 난해한 소설과 친해지려는 시도는 머지않아 소설을 쓴 작가, 알베르 카뮈의 생을 만나 잠시 멈춰 서게 된다. 카뮈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그의 삶을 이해해야 한다는 어느 교수님의 말씀이 있었다. 하나의 계시처럼, 그렇게 그 말이 하늘에서 둥실둥실 떠내려온 깃털처럼 내게 왔다. 



알제리에 이주한 가난한 프랑스인의 후손이었던 카뮈의 삶이야말로 부조리함으로 꽉 차 있었다. 아버지는 카뮈가 태어난 지 몇 달 만에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프랑스로 간다. 그는 처음으로 밟아본 자신의 고향 땅에서 전사했다. 카뮈의 집은 처참하게 가난했고 카뮈는 여러 차례 폐결핵을 앓았다. 어려서부터 병과 가난과 함께 자란 카뮈는 그것들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지 않고 명증하게 인식했다. "삶이 부당한데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부조리'이다. 카뮈의 '반항'은 부조리한 삶을 사랑하겠다, 끌어안겠다는 의미이다.





작가 카뮈의 삶처럼 《이방인》도 부조리로 점철 되어있다. 주인공 뫼르소는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 살인을 저지르는데, 살해당한 아랍인은 안 좋은 시간에 안 좋은 장소에 우연히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었다. 뫼르소의 살인죄를 심판하는 법정에서 기자와 방청객과 검사는 엉뚱한 곳에 집중한다. 뫼르소의 어머니 장례식 날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꼬집으면서 그가 얼마나 도덕적, 윤리적으로 타락한 최악의 인간인지를 침을 튀기며 열변하는 검사. 법정에서 마땅히 이뤄져야 하는 사건 경위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뫼르소가 살인을 저지른 진짜 이유를 -그런 게 있다면-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피고는 어머니 장례를 치른 것으로 기소된 것입니까, 

아니면 살인죄로 기소된 것입니까?"

방청객들이 웃었다. 

본문 124쪽.






제1부에서 뫼르소의 감정과 동기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가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제2부가 시작되자 법정에 선 뫼르소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방인이 된 느낌을 잘 표현한 것이 제2부의 탁월한 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법정의 인간들은 이미 뫼르소를 천하의 악당으로 점을 찍었기에, 여러 증인이 나와서 뫼르소에게 유리한 증언을 할 때는 귀담아듣지 않고, 불리한 증언, 즉 뫼르소가 어머니의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아들이라는 관점을 강화하는 증언들에만 주목한다. 심지어는 뫼르소가 신을 안 믿는 것이 재판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데, 뫼르소는 도통 이 모든 것이 내가 저지른 살인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권태로움을 느낀다. 세상은 개인에게 무관심하고 부당한 일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일어난다. 개인이 그 부조리함의 원인을 파헤쳐 바로잡기엔 부조리한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이들이 있기에 더욱 힘들어 보인다. 



작중에는 도로의 아스팔트마저도 녹여버리는 작열하는 태양이 자주 묘사되는데 뫼르소는 이 더위를 견디기 힘들어하며, 쉽게 지친다. 이 태양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태양은 모든 것을 비추어 어둠에 가려진 모습을 드러낸다. 동시에 지상의 모든 것들에게 예외 없이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한다. 태양을 피하는 법은 집 안에 틀어박혀 밤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문장 하나하나가 강렬하게 다가왔다. 특히 태양의 뜨거운 빛을 묘사하는 장면에선 문장의 높은 온도가 느껴질 정도였고 후텁지근한 공기에 갑갑함마저 느꼈다. 



숱한 이들의 인생을 바꾼 책으로 거론되는《이방인》. 어렵고 난해하다고 느꼈고, 사실은 지금도 미지의 세계처럼 느껴지는 책이다. 뫼르소가 죽음의 문턱에서 생의 가치를 확인하고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하며, "사형 집행을 받는 그날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와 증오에 가득 찬 함성으로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157쪽)"이 남은 유일한 소원이라고 했을 때,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동과 전율에 휩쌓였다. 



그는 불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나 부조리의 바람에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러니 또 언제 어디서 부조리의 바람에 휩쓸려 갈지 모르는 것들은 중요하지 않으며, 사람이 죽음을 향해 살아간다는 확신만이 불변하는 진리임을 소리치는 장면은 내 가슴과 머리에 화상 자국처럼 남았다.



내게는 확신이라는 게 있다. 나 자신에 대한 것, 모든 것에 대한 확신.

당신보다 더한 확신. 내 인생과 곧 닥쳐올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다.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이 진리가 나를 붙들고 있는 한 나도 이 진리를 붙들고 있다. 

본문 153 - 154쪽. 



삶은 부조리하다. 

이 사실을 절절하게 깨달은 어떤 이들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어떤 이들은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만들어 사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망각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카뮈는 저항한다.

회피하지 않고, 

분명하게, 

똑바로, 

죽음을 보고 있다.


죽음과 마주하는 순간, 비로소 삶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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